때는 겨울이라 눈이 내려 집 앞 문까지 완전히 덮어 버리면서 세상 만물에 모두 같은 색깔과 같은 형상을 부여하고 있었다. 작은 묘 역시 그런 백색의 세계 안에서 모습을 잃었지만 묘표(墓標)의 가장 높은 십자가들은 두껍게 쌓이는 눈 속에 머리를 내밀었 다. 온통 눈 천지 속에서도 좁은 오솔길의 흔적만 유일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것은 어제 페타르 수사(修士)를 매장할 때 생겨난 길 이었다. 그 길 끝쯤에서 오솔길의 얇은 선은 울퉁불퉁한 원으로 넓어지는 한편, 그 주위의 눈은 축축한 점토와 섞여 붉은빛을 띠고 있어 멀리서 보면 흰 바탕의 땅을 피로 물들인 갓 생긴 상처처럼 보였다. 순백의 설원이 끝도 없이 펼쳐지며 잿빛의 황량한 하 늘과 이어져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8

그곳은 레반트 * 인과 다양한 국적을 가진 선원들이‘데포시토 (창고)’ 라 부르는 수인 (囚人) 과 보초들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 마 을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저주받은 안뜰’ 이 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은 매일 이 거대한,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체포 당하거나 연행되어 온 범죄자이거나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인 데, 이곳에서는 죄목도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고 의심은 한도 끝 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스탄불 경찰은 범인을 추격하느라 이스탄 불 곳곳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느니‘저주받은 안뜰’ 에 서 무죄로 판명된 자를 석방하는 쪽이 쉽다는 수사 원칙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체포자를 분류하는 일이 대규모로, 그리고 천천히 진행되었다. 어떤 부류는 재판을 위해 심문을 받고 또 다른 부류는 단기형을 치르게 되는데, 만약 정말 죄가 없다고 판명이 나면 석방되기도 하고 또 다른 부류는 먼 유배지로 기약 없이 떠나기도 한다. 한편 이곳은 경찰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허 위 목격자, ‘바람잡이’등을 동원할 수 있는 집결지이기도 하다. 그렇게‘안뜰’ 은 잡다한 무리를 끊임없이 체로 걸러야 하는데 늘 만원이었고 사람들의 출입이 계속 이어졌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15

어려서부터 비만한 데다 정글 같은 털에 검푸른 피부인 그는 어 릴 적에도 나이가 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외모는 사람들을 속 이기에 충분했다. 1 백 오카 * 나 되는 체중에도 불구하고 암사자처 럼 재빠르고 민첩했으며 그의 육중한 육체는 그런 순간에도 황소 의 힘을 발휘했다. 졸린 듯한 얼굴 뒤, 마치 죽은 사람처럼 감은 두 눈 뒤에는 언제나 눈을 뜨고 있는 주의력과 악마와 같은 불안 하고 예민한 사고력이 숨어 있었다. 어두운 올리브색 얼굴에서 웃 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카라조즈의 몸 전체가 내부의 무 거운 웃음으로 흔들릴 때조차도 그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얼굴은 굳어지거나 이완될 수도 있었고 극도의 증오와 위협에 서 깊은 동정과 이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돌변할 수도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눈의 놀림은 카라조즈 최고의 기술이었다. 왼쪽 눈 은 거의 감고 있었지만 그 겹친 눈썹 틈새로 쏘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이 번득였다. 반면 오른쪽 눈은 부리부리하게 크게 부릅뜨고 있었다. 그 눈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 있을 뿐이었으며 마치 서치라이트처럼 굴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눈알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튕겨 나왔다가 똑같이 빠른 속도로 그 속에 숨어들었다. 또 그 눈은 먹이를 습격하고 자극을 주고 혼란에 빠 뜨리고 그 자리에 못 박아 놓고 상대의 사고나 희망이나 계획의 가장 비밀스러운 구석구석을 투시했다. 이 때문에 그 추악한 애꾸 눈은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한 가면의 표정을 얻기에 이르렀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33

"어느 누구도 누군가를 위해 무죄를 주장하는 말을 내게 해서는 안 되지. 결백이라니, 그것만은 절대 안 되지. 왜냐하면 이곳에 무 고한 자는 있을 수 없으니까. 그 누구도 이곳에 실수로 온 자는 없 다고. 안뜰의 문턱을 넘는 순간, 무죄란 있을 수 없지. 틀림없이 죄를 지은 거니까. 현실 세계가 아니라면 꿈속에서라도 말이야. 그도 아니라면 어미가 배 속에 아이를 가졌을 때 사악한 생각을 품었든가. 물론 자신을 나쁘게 말할 놈은 없어. 하지만 난 지금까 지 억울하게 끌려온 자를 본 적이 없지. 여기에 들어온 자는 무조 건 유죄야. 아니면 죄인과 관련 있는 자란 말이지. 프히! 난 수많 은 수인들을 풀어 주었지. 상부의 명령도 있었지만 내 책임 아래 풀어 주기도 했어. 그러나 모두 유죄였어. 이곳에 무고한 자는 있 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오지 않은, 아니 올 리도 없는 수 천 명의 죄인들이 있기는 하지. 왜냐하면 그 모든 죄인들을 이곳으로 불렀다가는 안뜰을 바다에서 또 다른 바다까지 넓혀야 할 지 경이니 말이야. 난 인간이란 것을 알고 있어. 그들 모두가 죄인이 야. 하지만 모두가 이곳에서 신세를 질 순 없는 거라고."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37

(우리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 특히 자기와 직접 관계없는 일 을 떠들어 대는 사람들을 경계하면서 그런 이들을 지루한 이야기 나 떠벌리고 나불대는 사람으로 경멸한다.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 인간적이며 그런 그들의 단점에도 장점이 있으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인의 마음이나 생각에 관해 알고 싶어 하는 것, 타인의 일에 관해, 뒤집어 말해서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해 알고 싶어 하는 것, 아직 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볼 기 회가 없을 타국의 생활 환경이나 지리에 관해 알고 싶어 하는 것 은, 만약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즉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 체험 하고 생각한 것을 말이나 글로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다면 도대체 얼마만큼 알 수 있을 것인가. 조금, 아주 조금일 것이다. 그렇게 인간적인 진실에서 그것들을 세심하게 듣거나 읽었던 것들만 언 제나 조금 남을 뿐이다.)
‘차밀 에펜디야와 그의 운명에 대한’하임의 잡다하고 오락가 락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페타르 수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63

"하지만 이건 학문이고 모두 책이란 소리지요!"씁쓰름하게 몰 아붙인 판사는 편협된 지식 때문에 자신들만의 이성과 통찰력, 모든 판단과 결론의 정확성을 무한히 믿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와 개개인에게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를 경험상 익히 알고 있는 터 였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75

흔히 그런 법이다. 우리가 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 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서 가장 멀 리 떨어져 있을 때 나타나는 법이다. 그래서 다시 보게 되어 기뻐 하는 우리의 희열은 바닥에서 표면으로 떠오르기까지 약간의 시 간이 걸리는 것이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86

스미르나 출신의 터키인 지주 청년과 보스니아에서 온 이방인 기독교도 사이의 묘한 우정은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며칠 사이에 이 이상한 감옥에서 더욱 커지고 더욱 두터워졌는데, 이런 상황에 서만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예외적인 상황답게 신속하고 예상치 못 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들의 대화는 그들이 과거에 보고 읽었던 것을 다시 천천히 이야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도 자신 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그 들 주위에서 들리고 볼 수 있는 그런 것들하고는 구별되었다. 그 것이 중요했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87

‘술탄의 형제’주위에는 음모와 책동이 소용돌이쳤는데, 여기에 는 당시 유럽 국가들, 교황과 물론 바예지드 술탄도 개입되어 있었 다. 헝가리 국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교황 인노첸시오 8 세도 터 키와 바예지드 2 세에 대항하는 전투의 또 다른 수단으로 젬의 인 도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활한 피에르 도뷔송은 귀중한 포로 를 자신의 권력 안에 두고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그를 이용해 바예 지드와 이집트 술탄과 교황을 협박했다. 바예지드는 젬을 위한 경비로 거액을 지불하고 있었는데, 이는 젬을 다른 곳에 인도하지 않 고 기사단이 잡아 두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교황은 기사단장에게 젬을 인도하는 조건으로 추기경의 지위를 약속했다. 이집트 술탄 은 그에게 상당한 금액을 건넸다. 이집트에서 자기 아들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불쌍한 젬의 모친도 젬을 위해 송금했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기사단장의 수중에 들어갔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94

이 모든 얘기 역시 한 가지에 귀착하고 있었다. 서로 진정한 접촉 이나 상호 이해의 가능성이 전혀 존재할 수도 없고 또 실제로 없기 도 한 두 개의 끔찍한 세계가 1 천여 개의 유형으로 영원한 싸움에 운명 지어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가운데 자신의 방식으로 그 두 세계의 전쟁터에서 대가를 치르는 한 인간이 있었다. 황제의 아 들이자 황제의 동생, 자신의 가장 깊은 믿음과 감정 속에서 스스로 를 황제로 생각하며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던 한 인간. 처음부터 배신당하고 패하고 사기당하고 자유를 박탈당 하고 고독하고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격리당하고 비극적인 어려움 에 처하여 만천하에 죄인으로 공개되었지만 긍지를 가지고 본래 의 입장을 견지하며 늘 목표를 잃지 않고 사형 집행인인 형에게도, 혹은 비열하게 자신을 배신하고 을러대고 계속 팔아넘기는 이교 도들에 대해서도 양보할 줄 몰랐던 한 인간.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102

‘나!’─ (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자리를 한정하는, 운명적이고 불가변적이며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알고 있는 것의 훨 씬 아래, 아니 훨씬 위에 머무르게 하는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능 력을 넘어서는 매우 의미 있는 단어다. 이 두려운 말은 일단 발음 이 되면 그 사람과 그가 생각하거나 말한 모든 것을 그에게 그런 마음이 없어도 실제로 이미 그가 동화해 버린 것으로 인정하고 영 원히 동일화시키고 마는 것이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106

그렇게 청년과 관리들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꽤 오랜 시간 이 흘렀다. 일출과 일몰에 의해 측정되는 일상 시간 밖에 인간관 계를 초월한 시간의 밖, 그 밤의 어느 무렵이 되자 차밀은 젬 술탄 과 자신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 즉 누구보다 불행하고 막다른 골 목에 이른 인물, 자기를 버리려 하지 않고 버릴 수도 없고 자기 자 신일 수밖에 없는 그 인물과 동일하다는 것을 공공연히 자랑스럽 게 고백했다. - <저주받은 안뜰 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00475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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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총가虛塚歌 1


한밤중에 붉은
햇덩이 뜬다.
하늘로 가자.
하늘로 가자.

풀 눕고 모래 눕고
새들도 누운 다음.
돌아온 강물 끝에. 뻘 바람에.
지붕을 거두어.
지붕을 거두어.

우훠넘차 슬프다.
어허영차 슬프다.

네 살은 내가 안고.
내 살은 네가 업고.
청천 하늘 밝은 밤
없는 곳 없는 곳으로.

길은 동서남북.
길은 동남서북.

그림자 되어 너.
한 꿈 그림자 되어 우리 함께.
오늘도 수만數萬 잠
헛되고 헛되었으니.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82

진달래


나는 한 방울 눈물
그대 몰래 쏟아 버린 눈물 중의
가장 진홍빛 슬픔
땅속 깊이깊이 스몄다가
사월에 다시 일어섰네

나는 누구신가 버린 피 한 점
이 강물 저 강물 바닥에 누워
바람에 사철 씻기고 씻기다
그 옛적 하늘 냄새
햇빛 냄새에 눈 떴네

달래 달래 진달래
온 산천에 활짝 진달래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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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아일랜드 - 희귀 원고 도난 사건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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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스콧 피츠제럴드와 어네스트 헤밍웨이, 이 두사람의 일화가 문득 궁금해 지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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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아일랜드 - 희귀 원고 도난 사건
존 그리샴 지음, 남명성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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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은 첫 대목부터 눈길을 끈다.  

"범인은 포틀랜드 주립 대학에서 미국 문학과 교수로 실제 강의를 하고 있으며 곧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예정인 네빌 맨친의 이름을 빌렸다. 완벽하게 위조한 대학 서류 양식에 쓴 편지에서 '맨친 교수'는 자신이 F. 스콧 피츠제럴드를 연구하는 젊은학자라고 주장하면서, 이번에 동부 지역에 다녀가는 동안 어떻게든 그 위대한 작가의 '친필 원고 및 관련 서류'를 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편지는 프린스턴 대학 파이어스톤 도서관의 원고 소장부 책임자 제프리 브라운 박사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8p)


초반부는 전직 CIA 요원이었던 데니와 그 일당(총 5명)의 피츠제럴드 다섯 작품의 초고 도난 과정이 영화의 한 장면 처럼 상당히 긴박하게 전개된다. 그치만 일당 한 명의 사소한 실수 하나로 초반에  FBI에게 쫓기고 만다. 여기까지는 흔한 범죄수사물 같은 분기기가 난다. 그런데, 여기서 이어지는 다음 두 장(챕터)의 장면은 이 작품의 남녀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브루스 케이블과 머서 만의 등장으로 갑자기 반전된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플로리다 키웨스트 카미노아일랜드란 곳에 '베이 북스-신간 및 희귀본 서점'을 오픈하여 성공한 브루스의 일화에 이어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시간강사로 문학을 가르치다 해고된 잊혀진 소설가인 머서의 신산한 삶이 대비되어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는 교수가 아니라 작가였고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할 때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강의실에서 3년을 보내고 나니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소설이나 짧은 이야기를 쓰면서 유유자적하는 자유가 애타게 그리웠다."

(103p)


여기서 보험관련(도난품 회수 및 협상 등) 특수한 일을 하는 일레인이 머서에게 접근하면서 이야기는 극적으로 전개된다. 이후는 머서가 그녀의 할머니 고향이기도 한 카미노 아일랜드의 오두막에 머무르며 브루스와의 의도적 관계를 맺고 그 주변인물들 - 주로 브루스 주변의 작가들과 브루스의 아내이자 동업자인 노엘 - 과의 소소한 일상이 중첩되면서 이야기는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흘러간다. 여기서 특히 마이라와 리라는 두 여성이 양념과 같은 티키타카 역할을 하는데, 이른바 통속소설가로 성공하여 유유자적한 삶을 살면서 그녀과 어울리는 같은 동네 작가들을 통해 글쓰기와 문학이란 무엇인가 - 창작과 경제활동 사이 어디쯤 - 란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베스터셀러 작가인 저자 존 그리샴이 그들을 통해 지난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마이라 집에서의 작가들 모임의 모습은 개인적으론 이 소설 전체 중 가장 유쾌하고 활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창작과 출판세태를 꼬집기도 하면서 가감 없는 그들만의 세계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이 대목에서 저자의 팬서비스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줄거리가 후졌다는 뜻이죠. 실제로도 그렇고. 솔직히 나도 좋다고 느껴 본 적이 전혀 없어요."
"언제든 직접 출판할 수 있잖아요. 브루스가 서점 안쪽에 있는접이식 테이블에 다른 책들과 함께 진열해 줄 텐데."
브루스가 대답했다. "제발 참아 주세요. 자비 출판 테이블에 자리가 없어요."(187p)


소설은 중반을 넘어서면서 교차편집 같이 절도범 데니 일당이 다시 등장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물론 여기서 머서와 브루스 간의 의도된 '썸'도 첩보 로맨스물처럼 전개된다. 법적 구속력 있는 혼인관계를 하지 않고 10년째 동거중이면서 각자 또 자유연애를 하는 브루스와 노엘 커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계약결혼'으로 유명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커플의 오마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머서와 브루스의 침실에서의 이야기 중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간의 픽션과 넌픽션을 오가는 일화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주었다. 관련 내용을 한 번 더 찾아보고 싶을 정도였다. 


머서와 브루스가 도난품을 두고 밀당을 한 결과는 - 스포일러가 될듯 하여 궁금하면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게 좋을듯 함 - 예상을 뒤엎게 되고, 에필로그에선 두 사람 모두에게 뭔가 여운을 남기는 장면으로 마무리가 된다. 

간만에 재미있으면서도 서점과 출판계, 그리고 작가의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어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물론 책을 좋아하는 면에서 브루스란 인물이 왠지 빌런 같지 않은 빌런 같고 또 남 같지 않기도 하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오랜만에 다시 소환한 것도 좋았고, 존 그리샴의 소설 역시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갑다. 내겐 30년 전 대학 시절이 떠오르게 하는 반가운 작품, 작가이기 때문이다. 존 그리샴은 그 당시에도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니까, 아마 그때 출간된 그의 작품들 중 초판본 1쇄 책을 몇 권이라도 갖고 있다면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 이 서평은 출판사 도서제공을 통해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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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는 기분이 상한 듯 몸을 움츠렸다.
마이라가 말했다. "아, 좋아요. 참고로 난 맥주를 직접 만들어 마셔서요. 맛이 좀 다를 거예요."
"끔찍해요." 리가 덧붙였다. "나도 마이라가 맥주를 직접 만들기전까지는 맥주를 즐겨 마셨답니다. 지금은 입에 대기도 싫어요"
"그럼 자기는 럼이나 마셔. 우린 우리끼리 알아서 할 테니까." 마이라는 머서를 보며 말했다. "강렬한 맛이 나는 8도짜리 에일 맥주예요. 방심하면 확 취해요." - P158

그러나 그녀는 교수가 아니라 작가였고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할 때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강의실에서 3년을 보내고 나니 매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소설이나 짧은 이야기를 쓰면서 유유자적하는 자유가 애타게 그리웠다. - P103

"줄거리가 후졌다는 뜻이죠. 실제로도 그렇고. 솔직히 나도 좋다고 느껴 본 적이 전혀 없어요."
"언제든 직접 출판할 수 있잖아요. 브루스가 서점 안쪽에 있는접이식 테이블에 다른 책들과 함께 진열해 줄 텐데."
브루스가 대답했다. "제발 참아 주세요. 자비 출판 테이블에 자리가 없어요."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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