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 아버지의 영정을 응시하던 그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흰자위가 붉었다. 나의 눈도 그러할 터였다. 작은 상욱이, 김상욱씨가 가만히 눈물을 훔쳤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36

아버지는 죽음 앞에서 담담했을까? 인간의 시원은 먼지, 누구라도 언젠가는 그 시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불변의 과학이라 생각하는 사람답게 담담하게 맞이했을 것도 같고, 아는 것은 머리요, 정작 죽음이 닥쳤을 때는 머리만 바위 밑으로 디밀었다는 김일성대 출신의 엘리트처럼 공포에 떨었을 것도 같았다. 뇌출혈이었으니 죽음을 두려워할 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병원으로 실려 간 아버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한두시간 누워서 경과를 본 후에 퇴원하라는 게 병원의 유일한 조치였다. 침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집에 갈라네, 헛소리를 하고는 순식간에 정신을 놓았고, 순천 가는 구급차 안에서 정신이 없는 채로 어머니의 손을 잡은 게 마지막이었다. 손을 잡은 건 두려워서였을까, 아니면 담담한 인사였을까?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38

레포의 딸이 끓였다고 맛있기야 하겠는가. 남다른 손맛에다 무엇에든 정성스러운 언니의 마음이 담겨 맛있을 터였다. 동지의 딸이 끓인 전복죽이니 빨치산들에게는 남다른 맛이기도 할 것 같았다. 평생 떡 만들며 살아온 언니가 동지는 아니니 이 전복죽이 동지애의 발로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가난한 빨치산의 장례식에는 날고 기는 사람들의 장례식에도 없을 전복죽이 있다! 어쩐지 마음이 언니가 뽀땃하게 끓여 온 전복죽처럼 뽀땃해지는 느낌이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43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언니는 말을 참 예쁘게도 한다. 내가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지금쯤 정교수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 말에는 칼이 숨어 있다. 그런 말을 나는 어디서 배웠을까? 아버지가 감옥에 갇힌 사이 나는 말 속의 칼을 갈며 견뎌냈는지도 모르겠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44

술이 불콰한 상태로도 지팡이를 다리처럼 자유롭게 쓰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잘 가라는 듯 오늘도 날은 화창했고, 도로변에는 핏빛 연산홍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허벅지 아래로 끊어진 그의 다리에서 새살이 돋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순간 그는 사진 속 그의 형보다 어린 소년이 되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48

몇시간 전 의식을 잃은 아버지는 얼굴의 근육이 완전히 이완되어 편안하디편안한 모습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어느 근육이든 긴장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세상사의 고통이 근육의 긴장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49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차가운 철제 침대에 누워 수의에 싸이고 있는 저 시신과 내가 적어도 한때는 한 몸이나 같았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우주였다. 그런 존재를, 저 육신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을 점령하고 있는 저 육신이 내일이면 몇줌의 먼지로 화할 것이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50

아, 작은아버지도 나처럼 이 길을 따라 떠나고 싶었구나. 떠나려고 이 길을 걸어와봤구나. 그런데 왜 떠나지 못했냐고 나는 묻지 못했다,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가자 못 간다 실랑이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작은아버지는 우리 집 사립문 밖에 자전거를 세우고 내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쉰내 풀풀 나는 작은아버지의 등에서 떨어지는 게 시원섭섭했다. 이 쉰내 같은 게 혈육인가 싶었다. 나를 데리러 오가느라 밴 그 쉰내가 정겨운 듯도 역겨운 듯도 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57

그 여름날 작은아버지가 웅얼거리던 말이, 까맣게 잊고 있던 말이 불현듯 기억의 표면으로 솟구쳤다. 한 등에 두 짐 못 지는 법인디…… 섬진강이 보이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에 올라타며 작은아버지는 분명 그렇게 혼잣말을 했었다. 그러니까 그날 작은아버지는 나를 뒤따라오며 내 등에 얹힌 두 짐을 보았던 것이다. 자기 등에도 평생 얹혀 있었을 두 짐을. 그 짐이 버거워 작은아버지는 떠나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술에 취해 한평생을 흘려보낸 것일까? 아버지의 살아남은 유일한 형제를 위해 나는 소주병을 꺼내들었다. 기왕 취해 보낸 일평생, 하루쯤 더 보탠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것도 그 원흉이 간 자리인데.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57

시집 안 간 딸자식에게 언니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비수가 꽂힐 때 알았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자식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가족을 등지고 사회주의에 몸담았을 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혈육을 뿌리치고 빨치산이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이겠구나. 첫걸음은 무거웠겠고, 산이 깊어질수록 걸음이 가벼웠겠구나. 아버지는 진짜 냉정한 합리주의자구나. 나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62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라딘 eBook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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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나 자신이 관습적인 비평 같은 것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았다. 내가 떠올린 것을 일깨웠던 은유와 직유는 음악 속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점점 부족함을 느꼈다. 더욱이, 가장 간단한 직유마저도 허구의 기미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머지않아 은유는 한 편의 이야기와 장면으로 확장되어 나갔다. 그럼에도 동시에 이 장면들은 하나의 곡 혹은 음악가의 특별한 성격에 대한 기록이 되기를 의도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이 읽게 될 내용은 허구인 동시에 상상적 비평이라고도 할 수 있다. - <그러나 아름다운>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6717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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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 대신 사진을 읽는 것을, 자세히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실제 비평이 역사적 뿌리에서 개인의 이야기를 먼지처럼 털어버리고 텍스트를 뽑아내는 반면, 문학 작품 자체와 그 저자가 처한 문화적·역사적 상황에 대한 감각, 즉 전통에 대한 감각은 텍스트의 내용뿐 아니라 텍스트 자체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는 내가 사진을 배우면서, 점점 늘어 가는 수많은 전통 안에 있는 역사를 바라보려고 시도하면서 얻는 이득 중 하나였다. 이런 시도는 세잔에 관한 릴케의 편지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좀 더 잘 알아볼 수 있게 그림 앞에"1 서 있으려는 시도 말이다. - <인간과 사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6702 - P14

비평은 어떤 작품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해명하는 기회가 아니라, 작품에 내재한 진실을 드러낼 의도로 그 반응을 명확하게 표현해서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는 기회다. - <인간과 사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6702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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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판타지와 SF를 구별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기로는 ‘장르 문학’과 ‘주류 문학’을 구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소설이란 손쓸 수 없을 만큼 변칙적이고 무분별한 현실보다 은유의 논리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논리란 대개는 은유의 논리이므로. - <종이 동물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7063 - P5

우리는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쓰며 평생을 보낸다. 그것은 기억의 본질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무감하고 우연적인 우주를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한 습관에 ‘이야기 짓기의 오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의 일면에 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야기는 속에 있는 은유를 좀 더 선명하게 구현할 뿐이다. - <종이 동물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7063 - P6

모든 의사소통 행위는 번역이라는 기적이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서, 내 신경 세포 속의 변화하는 활동 전위들은 특정한 배열과 유형과 사유로 분출한다. 그들은 내 척수를 타고 흘러내려 내 팔과 손가락으로 갈라져 들어가고, 결국에는 근육들이 움찔거리면서 사유가 동작으로 번역된다. 키보드의 조그마한 지렛대들이 눌리고, 전자들의 배열이 바뀌고, 종이 위에 기호들이 찍힌다. - <종이 동물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7063 - P6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올리는 생각이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머릿속에 떠올렸던 생각과 똑같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당신과 나, 우리는 서로 다르고, 우리가 지닌 의식의 특질도 우주 양 끝의 두 별만큼이나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내 사유가 문명의 미로를 지나 당신의 정신에 닿는 기나긴 여정에서 번역을 거치며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나는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리라 믿고, 당신은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우리 정신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닿는다. 비록 짧고 불완전할지라도.

사유는 우주를 조금 더 친절하게, 좀 더 밝게,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런 기적을 바라며 산다.

- <종이 동물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7063 - P7

우리는 단지 인드라의 그물을 이루는 그물코에 지나지 않는다. - <종이 동물원>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77063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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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가시가 쓴 글을 보면 그 생각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종 하나하나가 "신의 생각"이며, 그 "생각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하는 분류학의 작업은 "창조주의 생각들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라고 믿었다.26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55

꼭 집어 말하자면 아가시는 자연 속에 신의 계획이 숨겨져 있다고, 신의 피조물들을 모아 위계에 따라 잘 배열하면 거기서 도덕적 가르침이 나오리라고 믿었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55

아가시가 보기에 어떤 위계들은 아주 명백했다. 예를 들면 자세가 그렇다. 인간은 "하늘을 바라보며" 직립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지만, 물고기는 "물속에서 엎드려"28 있다. 그런가 하면 모호한 위계들도 있다. 앵무새, 타조, 명금류가 그렇다.29 이 가운데 어떤 새가 사다리에서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아가시는 그 답을 알아낼 수 있다면 신이 더 중요시한 것이 무엇인지, 그러니까 언어인지, 크기인지, 노래인지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56

아가시는 신에 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부용 메스를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껍질을 가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내부야말로 동물들의 "진짜 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며, 그들의 뼛속과 연골, 내장 속이야말로 신의 생각이 가장 잘 담겨 있는 곳이라고 했다.32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57

"인간의 육체적 본성이… 어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 인간이 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갈 수 있고 도덕적으로 얼마나 졸렬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33 아가시가 충격적이라고 느낄 만큼 인간과 유사한 어류의 골격 구조(작은 머리, 척추골, 갈비뼈를 닮은 돌출 가시)는 ‘인간’에 대한 경고였다. 어류는 인간이 자신의 저열한 충동들에 저항하지 못하면 어디까지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비늘 덮인 존재였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58

그는 그날 갑판 위에서 파닥거리던 물고기들의 이름은 단 하나도 기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에게 물고기들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자, 남은 평생 맞춰야 할 퍼즐로 그를 손짓해 부르는, 반짝이는 비늘로 된 실마리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55067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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