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케게, 목양견, 젖소, 옥수수 등에서 볼 수 있는 인위 도태의 핵심은 식물과 동물의 외형적 특성과 행동 형질 들이 그대로 유전된다는 점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인간은 특정 변종의 번식을 조장하고 다른 변종의 번식을 억제해 왔다.
(71-72p)

인간이 동식물의 새로운 품종을 만들 수 있을진대, 자연이라고 그렇게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자연적으로 유전 형질이 변하는 과정을 우리는 자연 도태 natural selection 혹은 자연 선택이라고 한다.(72p)

자연 도태가 진화의 기작이라는 사실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과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위대한 발견이다. 100년도 더 전에 그들은 대자연이 생존에 더 적합한 종들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산성多産性이야말로 자연 생물계의 특성이다. 자연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개체 수보다 훨씬 더 많은 후손을 낳게 만든다. 그 많은 후손들 중에서 우연히 자연에 더 적합한 형질을 가진
개체들만 살아남게 되므로, 결국 그러한 형질을 갖고 태어난 종이 선택적으로 번성하게 된다. 유전 형질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돌연변이는 순종을 낳는다. 그러므로 돌연변이가 진화의 동인이 된다. 수많은 돌연변이들 중에서 생존율을 증대시킬 수 있는 소수만이 선택되므로, 오랜 기간에 걸쳐 생물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종의 탄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의 기원이요 진화의 실현이다. (73-74p)

우리가 자연스럽게받아들이고 있으며 마음에 들어 하는, 설계자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생물 세계에 대한 전적으로 인간적인 해석인 것이다. 그러나 다윈과 월리스는 설계자가 존재한다는 생각만큼 우리 마음에 들고 또 그만큼 인간적이지만, 설계자의 존재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생명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해석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자연 선택이 진화의 원동력이라는 설명이었다. 자연 선택은 영겁의 세월 속에서 생명의소리를 더 아름다운 음악 작품으로 조탁해 왔다. (76p)

이렇게 해서 앞으로 모든 지상 생명 현상의 주인공 구실을 하게 될디옥시리보핵산 deoxyribonucleic acid 분자, 다시 말해 DNA의 원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DNA는 나선형으로 꼬인 긴 사다리와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사다리의 가로대는 각각 서로 다른 네 종류의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이 바로 유전자 코드를 기술하는 네 가지 부호이다. (80p)

사다리의 가로대를 뉴클레오티드 nucleotide라고 부르며 그 가로대들이 모여서 주어진 생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설계도, 즉 유전 설계도를 이룬다. 지구상 모든 형태의 생물들은 각각 그 형태에 맞는 설계도를 갖고있다. 그러나 설계도들은 모두 앞에서 이야기한 네 개의 문자만으로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같은 언어로 씌어 있다. 유기체의 종류마다 유전 형질이 다른 이유는, 유전 설계도가 비록 같은 언어로 씌어 있지만 그 내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돌연변이는 뉴클레오티드의 변화에서 초래되고 변화된 형질은 다음 세대에 그대로 전해진다. 즉 돌연변이는 순종을 생산한다. 뉴클레오티드에 일어나는 변화는 무작위적이다. 그래서 태어난 돌연변이들의 거의 대부분이 비기능성 효소들을 만들게 되므로, 돌연변이는 대부부의 경우 결과적으로 해롭거나 치명적이다. 그러므로 이로운 돌연변이가 발생하려면 오랜 세월을 기다려다. 뉴클레오티드는 폭이 겨우 1센티미터의 10만분의 1에 해당하는 지극히 작은 물질이다. 이렇게 작은 물질에서 일어난 변화들 중 지극히 일부의 경우가 이로운 돌연변이를 유발하고 진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81p)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 복제술의 완성도는 점점 나아졌다. 마침내 특정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는 분자들이 한데 모여서, 일종의 분자 집합체인 최초의 세포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식물 세포는 엽록체라고 불리는 분자들로 이뤄진 아주 작은 공장들을 갖고 있다. 엽록체 공장은 햇빛, 물, 이산화탄소를 탄수화물과 산소로 바꾸는 광합성 작용을 한다. 혈액 속에는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라 불리는 또 다른 종류의 분자 공장이 있다. 이 공장에서는 주어진 생물이 섭취한 음식물에 산소를 첨가하여 에너지를 추출하는 작업을 한다. 현재는 이 공장이 식물과 동물의 세포 안에 존재하지만, 한때 독립된 세포로 독자 활동을 했 던 시기가 있었다고 믿어진다.

사람은 100조 개가량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람 한 명 한 명은 수많은 생활 공동체가 모여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거대한 군집인 셈이다.
성性은 대략 20억 년 전부터 생긴 듯하다. 그 전에는 새로운 종의 출현이 무작위적 돌연변이의 축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82p)

생명의 탄생 이후 40억 년의 거의 대부분 기간 동안, 지구의 생명계는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던 청록색의 조류類들이 지배했다. 대략6억 년 전부터 조류의 독과점 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새로운 형태의 생물들이 폭발적으로 지구에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캄브리아기 대폭발 Cambrian Great Explosion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지구가 만들어지자마자 생명이 탄생했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표현은 아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출현은 지구와 같은 행성의 환경에서 쉽게 일어날 수있는 화학 반응들의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생물은 30억 년이나되는 긴긴 세월을 녹조류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지구 생명이 특화된 기관들을 갖추고 체구가 큰 유기체로 진화하기가 생명의 출현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계 행성들을 탐사하다 보면 동물이나 식물이 서식하는 곳보다 미생물의 세상을 더 흔하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84p)

DNA는 완벽한 자기 복제를 통해 유전 형질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일을 한다. 이와 더불어 핵의 DNA는 전달자 messanger RNA라고 불리는 또 다른 핵산을 합성하여 세포의 신진대사 활동을 관장한다. 전달자 RNA는 핵 밖으로 이동한 후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 효소의 생성을 조절한다. 결과적으로 효소가 하나 생성되고, 이 효소는 세포 내화학 반응의 특정 단계를 관리한다.
인간의 DNA는 10억 개의 뉴클레오티드로 연결된 두 개의 나선이 이루는 매우 긴 사다리처럼 생겼다. 다시 말해 DNA 분자는 가로대를 10억 개나 가진 긴 사다리이다. 뉴클레오티드들이 이룰 수 있는 조합의 대부분은 아무 쓸모도 없는 단백질을 합성하므로 생명의 관점에서 무의미하다. 우리같이 복잡한 생물의 경우에도 유용한 핵산 분자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렇지만 유용한 핵산을 조합하는 방법의 수는 우주에 존재하는 전자와 양성자의 수를 전부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다. (90-91p)

진화는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DNA 중합체효소가 복제 과정에서 실수를 범하면 돌연변이가 생긴다. 그러나 중합체 효소가 실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태양에서부터 오는 방사능입자나 자외선 광자도 돌연변이의 요인이 된다. 또 우주에서 지구로 들어오는 높은 에너지의 우주선 입자나 주위 환경의 화학 물질 때문에 돌연변이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뉴클레오티드를 변화시키거나 핵산의 끈을 꼬거나 묶는다. (9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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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발코니에서 아내는 그에게 손짓을 했고 그는 연신 뛰어가다가 뒤돌아보며 밀짚모자를 흔들어 응답하더니 먼지와 더위로 잿빛이 된 거리로 달려 나갔고 더 멀리 영화관 앞 아침나절의 눈부신 햇빛 속으로 사라져 버린 뒤 다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119/662p)

앙리 코르므리도 끼여 있는 아프리카 부대는 최대한 신속히 수송되어 와서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그 알 수 없는 고장 마른에 떠날 때 모습 그대로 배치되었는데 군모를 마련해 쓸 겨를도 없었고 알제리에서와 같이 색깔이 바랠 정도로 햇살이 거세지도 않았으므로 아랍인과 프랑스인들로 구성된 알제리 사람들의 무리들은 번쩍거리고 말쑥한 색깔의 옷을 입고 밀짚모자를 쓴 채 수백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붉고 푸른색의 과녁들이 되어 무더기로 전투에 투입되었고, 무더기로 부서져 가지고 장차 4년 동안 전 세계 곳곳에서 온 사내들이 진흙탕의 굴속에 엎드린 채 조명탄, 소이탄이 빗발치는 하늘 아래 1미터 간격으로 매달려 있게 될 그 비좁은 영역을 기름지게 해주기 시작하는 가운데 부질없이 진격을 예고하는 탄막(彈幕) 사격 소리만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다.[a] 그러나 당장은 아직 소굴도 없었고 다만 빗발치는 포탄들 밑에서 오색의 밀랍 인형들처럼 녹아내리는 아프리카 부대들뿐이었으며 매일같이 수백 명의 고아들이 알제리의 방방곡곡에서 만들어져 이 아랍인, 프랑스인의 아버지 없는 아들딸들은 그 후 가르침도 유산도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되어 있었다.
(123-124/662p)

가난한 사람들의 기억은 벌써 부자들의 기억만큼 풍요롭지 못하다.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 떠나는 적이 거의 없으니 공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고 그게 그 턱인 단조로운 생활을 하니 시간적으로 가늠할 만한 표적이 더 적었다.
(139/662p)

가난한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그저 죽음이 지나간 길의 희미한 자취를 표시할 뿐이다. 그리고 잘 견디려면 너무 많이 기억을 하면 못 쓴다. 매일매일, 시간시간의 현재에 바싹 붙어서 지내야 했다.
(140/662p)

물론 그는 친구들이 불러내는 소리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놀이의 매혹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가능한 도덕의 실천보다는 잘못을 호도하는 쪽으로 온갖 주의를 다 기울였다.
(150/662p)

또 어떤 사람들은 기름과 꿀이 뚝뚝 떨어지는 아랍 튀김 과자들을 팔았다. 이렇게 늘어놓은 물건들 주위에는 설탕 맛에 이끌려 달려드는 파리와 아이들의 떼거리가 서로서로 뒤를 쫓으면서 윙윙거리고 와글거렸고 상품을 벌여 놓은 진열대가 기우뚱할까 봐 걱정이 된 장사꾼은 욕을 퍼부어 대며 파리와 아이들을 한꺼번에 쫓아 버리는 것이었다.
(163/662p)

영화가 계속되는 동안 줄곧 어떤 노처녀가 피아노로 반주를 하게 되는데 레이스로 장식된 칼라로 뚜껑을 해 덮은 광천수 병 모양으로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그녀의 차분한 뒷모습은 〈벤치 좌석〉의 떠들썩한 야유와 대조를 이루었다.
(165/662p)

어느 의미에서, 그들과 함께 살고 있고 완전한 귀머거리이며 자신이 알고 있는 백 개 남짓한 어휘들 못지않게 의성어와 손짓으로 의사 표시를 하며 지내는 터인 자신의 동생 에르네스트[1]만큼도 그녀는 생활에 섞이지 못하고 지냈다.
(171/6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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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파리를 떠나 아프리카로 갈 때는 매번 이런 기분이었다. 어렴풋하게 솟아오르는 희열, 부풀어 오르는 가슴, 멋진 탈출에 성공하여 경비병의 낯짝을 상상하면서 껄껄 웃어 대는 사람의 만족감. 육로로 혹은 기차로 돌아올 때마다 변두리 동네의 첫 번째 집들이 나타날 즈음이면 그의 가슴은 죄어드는 것이었다.
(74/662p)

어쨌든 여름철에 그 샘은 바싹 말라서 짙은 색 돌로 된 그 거대한 가장자리는 수많은 손길과 바지 엉덩이에 쓸려 반들반들해지고 미끄러워져 있었는데 자크, 피에르, 그리고 다른 여러 친구들은 그 위에서 말 타기를 하면서 엉덩이를 깔고 앉아 빙그르르 돌면서 놀다가 끝내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넘어지면 오줌과 햇빛 냄새가 나는 별로 깊지 않은 연못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79/662p)

그럴 때면 그들은 꼬마 장과의 입씨름이 없지 않으나 결국 굵은 박하사탕, 땅콩 혹은 말려서 간을 한 이집트 콩, 아랍인들이 영화관 문 앞에다가 바퀴 달린 간단한 나무 상자로 파리가 잔뜩 엉겨 붙은 좌판을 차려 놓고 파는 트라무스라는 이름의 층층이부채꽃 혹은 색깔이 요란한 보리사탕 등을 나눠 먹었다.
(84/662p)

제철에는 매일같이 감자튀김 장수들이 열심히 화덕을 달구었다. 대개 이 작은 무리의 아이들에게는 튀김 한 봉지 사먹을 돈도 없었다. 어쩌다가 그들 중 어느 하나가 필요한 돈[a]을 가지고 있게 되면 그는 감자튀김 한 봉지를 사가지고 공손하기 짝이 없는 친구들의 무리를 이끌고 엄숙하게 모래사장 쪽으로 걸어간 다음 바다 앞 망가진 낡은 배 그늘에서 두 발을 모래에 박고 한 손은 튀김 봉지를 똑바로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통통하고 바삭바삭한 감자튀김이 한 개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봉지를 덮은 채 털썩 엉덩방아를 찧으며 앉는 것이었다.
(90-91/662p)

그들은 삶에서나 바다에서나 지배자였다. 그들은 세상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호화로운 것을 받아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부유한 재산을 가진 영주처럼 그것을 무제한으로 쓰는 것이었다.
(92/662p)

하늘은 대낮의 후끈한 열기가 가시면서 더 맑아지다가 이윽고 초록빛으로 변해 갔고 햇빛이 누그러지면서 만(灣)의 저편에서는 지금까지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하게 묻혀 있던 집들과 도시의 곡선이 더욱 뚜렷해졌다.
(93/662p)

대개 피에르가 가장 먼저 〈늦었어〉 하고 말을 꺼냈고 그러면 곧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지면서 서둘러 인사들을 나누었다. 자크는 조제프와 장 형제와 함께 다른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집을 향하여 달렸다. 그들은 숨이 턱 끝에 닿도록 힘껏 뛰었다. 조제프의 어머니는 걸핏하면 매를 들었다. 더군다나 자크네 할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93/662p)

식탁 주위에는 석유램프의 붉은 불빛 아래 반벙어리인 삼촌이 계속 수프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아직 젊고 머리의 숱이 많고 갈색인 어머니가 아름답고 정다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잘 알면서……〉 하고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검은색 옷을 꼿꼿하게 가다듬어 입고 입을 꼭 다문 채 맑고 엄격한 눈초리로 쏘아보면서 할머니가 딸의 말을 끊었다. 〈어디 갔다 오는 거냐?〉 하고 물었다. 「피에르하고 같이 산수 숙제 했어요.」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머리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고 아직 모래투성이인 양쪽 발목을 만져 보았다. 「해변에 갔다 왔구먼.」 〈이 거짓말쟁이〉 하고 삼촌이 또록또록 말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의 등 뒤로 가서 방 문 뒤에 걸려 있는 황소 힘줄이라고 하는 조잡한 채찍을 벗겨 들고 그의 종아리와 엉덩이를 서너 번 고함치고 싶을 정도로 아프게 후려쳤다. 잠시 후 그는 입 안과 목구멍 속에 눈물이 가득한 채, 불쌍히 여긴 삼촌이 떠준 수프 접시를 앞에 놓고 눈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하려고 전신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가 할머니에게로 잠시 눈길을 던지고 나서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수프 먹어. 이제 됐다. 이제 됐어.」 그제야 그는 울기 시작했다.
(94-95p)

한편 그는 턱밑에 있는, 두 개의 목 힘줄 사이의 언저리를 상기시켜 주는 어머니의 달콤한 살 냄새를 맡고 있었다. 다 큰 지금은 입술을 갖다 대고 키스할 용기가 나지 않지만 어렸을 때 아주 드물게나마 어머니가 그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혀 줄 적이면, 그리하여 어린 시절의 삶 속에서는 너무나도 희귀한 애정의 냄새가 난다고 여겨졌던 그 오목한 곳에 코를 박고 잠이 든 척할 때면, 숨을 들이켜 냄새를 맡고 애무하기를 좋아했던 바로 거기였다. (99/662p)

그는 항상 죽음처럼 헐벗는 가난의 한가운데서, 보통 명사들 속에서 성장했다. 반면에 삼촌 댁에 가면 고유 명사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었다.
(108/662p)

일생 동안 일만 하고 지내다가 명령에 따라 사람을 죽였고 피할 수 없는 것이면 무엇이나 달게 받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손상되기를 거부했던 강인하고 씁쓸한 표정의 한 사내. 요컨대 가난한 사내. 가난이란 일부러 선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없어지지 않고 줄곧 따라다닐 수는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117-118/6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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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은 동쪽 바다에는 이르지 못한 채 이제 이 고장 전체를, 강 가까운 질퍽한 땅들과 그 주위의 산들을, 희미한 울음소리가 그들 등 뒤에서 이따금씩 들리곤 하는 동안 자루를 같이 쓰고 꼭 붙어선 두 사내에게까지 그 진한 냄새가 피어올라오는 거의 인적 없는 광대한 저 대지를 적시게 될 것이었다.

최초의 인간 | 알베르 카뮈, 김화영 저

(35/662p)

프랑스에 와서 살게 된 이후 여러 해 동안 그는 알제리에 그대로 눌러 살고 계신 어머니가 그렇게도 오래전부터 당부하며 시킨 일을 실행해야겠다고 별러 왔다. 다름이 아니라 어머니 당신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아버지의 무덤을 한번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다.
(44/662p)

더욱 뿌연 하늘에는 희고 갈색 나는 작은 구름들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고 하늘에서 가벼운, 그리고 나중에는 어두워진 빛이 차례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광대한 사자(死者)들의 벌판에 침묵이 가득했다. 도시의 어렴풋한 소음만 높은 담 저 너머로 들려오고 있었다. 이따금 검은 실루엣이 저쪽 멀리 있는 무덤들 사이로 지나가곤 했다.
(46/662p)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무덤들 사이에 꼼짝 않고 서 있는 그의 주위에서 시간의 연속성은 부서지고 있었다. 세월은 끝을 향하여 흘러가는 저 도도한 강물을 따라 순서대로 배열되기를 그쳐 버리고 있었다. 세월은 오직 파열이요 깨어지는 파도요 소용돌이일 뿐이었다. 자크 코르므리는 그 속에서 고통, 그리고 연민을 부둥켜안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48/662p)

지난 40년 동안 그를 따라다녔던 이 세계의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질서에 반항하여 더 멀리, 저 너머에까지 가고자 하면서, 앎을 얻고자 하면서, 죽기 전에 앎을 얻고자 하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단 한순간만이라도, 그러나 영원히 존재하기 위하여 마침내 앎을 얻고자 하면서, 그를 온 생명의 비밀로부터 갈라놓는 벽에다 대고 한결같은 힘으로 고동치고 있는 이 가슴일 뿐이었다.
(49/662p)

푸근하고 둥근 몸매 그 자체, 손가락들이 약간 뭉툭한 손은 제 발로 걸어서 돌아다니는 일이라면 질색을 하는 중국의 고관을 연상시켰다. 그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 눈을 지그시 감을 때면 영락없이 비단옷을 입고 손가락 사이에 젓가락을 낀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매를 보면 영 딴판이었다.
(56/662p)

20년 동안이나 같이 살고 나서도 한 인간을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죽은 지 40년이 지난 사람에 대해서 당연히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조사를 한다 해봤자 제한된, 그래 제한된 것이라고 해야 옳겠지, 의미의 정보밖에는 얻지 못할 것 아닌가. 하기야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58/662p)

그러나 재능을 많이 타고난 사람들에게는 스승이 필요해요. 우리가 가는 길 위에 인생이 어느 날 세워 놓은 사람, 그 사람은 영원히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돼요, 그가 의식적으로 은혜를 끼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이게 나의 신념이에요!
(60/662p)

「맞아요. 난 인생을 사랑했어요. 탐욕스러울 정도로. 그리고 동시에 인생이 끔찍스럽고 접근 불가능한 그 무엇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게 바로 내가 인생을 믿는 이유예요. 회의주의 때문에. 그래요, 나는 믿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항상.」
(65/662p)

「예순다섯 살이 되면 한 해 한 해가 유예 받은 시간이지. 나는 조용하게 죽고 싶어. 죽는 것은 무서워. 난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어.」
(66/662p)

「나의 내면에는 끔찍한 공허가, 가슴 아픈 무관심이 도사리고 있어서…….」 (67/6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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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투성이의 길 위로 굴러 가는 작은 포장마차 저 위로 크고 짙은 구름 떼들이 석양 무렵의 동쪽을 향하여 밀려가고 있었다. 사흘 전에 그 구름들은 대서양 위에서 부풀어 올라 가지고 서풍을 기다렸다가 이윽고 처음에는 천천히, 그리고 점점 더 빨리 동요하는가 싶더니 인광처럼 번뜩이는 가을 바닷물 위를 대륙 쪽으로 곧장 날아가 모로코의 물마루에서 실처럼 풀렸다가[b] 알제리의 고원 위에서 양 떼들처럼 다시 모양을 가다듬더니 이제 튀니지 국경에 가까워지자 티레니아 바다 쪽으로 나가서 자취를 감추려고 하는 것이었다.
(10/6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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