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외는 언성도 높이지 않고, 그런 것은 잘 모르겠으나, 자기의 말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진저리가 나 있으면서도 인류에 대한 관심은 가지고 있으며 딴에는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기로 결심한 사나이의 말이라고 대답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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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은 대단히 불쾌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인정받지 못하던 두 개의 원칙이 막강한 힘을 얻으며 자신들이 예전부터 누려온 특권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왕권신수설의 원칙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습의 원칙이었다. - P261

단순왕 피핀은 살아생전에 미리 왕국을 나누어 카를로만 1세에게 네우스트리아를, 샤를마뉴에게 아우스트라시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최근에 정복한 아키텐 공작령을 둘로 쪼개 물려주었다. 하지만 왕위 세습에는 감히 반박조차 못하던 귀족들이 왕국 분할 방식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공식적으로 밝히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 샤를마뉴를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카를로만 1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선언했다. 피핀의 임명을 정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하지만 젊은 두 왕은 뒤바뀐 임명을 받아들였고, 샤를마뉴는 누아용에서, 카를로만 1세는 수아송에서 동시에 왕위에 올랐다. - P266

샤를마뉴의 칼날을 피한 민족은 노르만족이 유일했다. 이들이 훗날 갈리아 지역 안에 자리 잡고 있던 민족들과 결합하여 프랑스 민족의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조상이 되었다. - P272

샤를마뉴가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만든 강력한 제국은 존경을 받았고, 그 영토는 독일에서는 발트해까지, 이탈리아에서는 볼투르노강까지, 스페인에서는 에브로강(스페인 피레네 산맥 남쪽을 따라 흐르는 강_옮긴이)까지, 갈리아 지역에서는 대양까지 뻗어나갔다. 아홉 개의 큰 민족이 제국의 광대한 경계선 안으로 들어와 같은 법률, 같은 종교를 따랐다. 군주 단 한 사람의 힘으로 성취한 이 화합은 대제국 건설 계획을 세운 인물의 천재성뿐 아니라 대제국을 완성한 무기의 힘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 P284

샤를마뉴는 일 년 열두 달의 명칭도 바꾸려 했다.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1000년 후 프랑스 국민공회도 같은 일을 추진하다 같은 결과를 얻은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 P287

정통 신앙을 지킨 위대한 황제, 샤를마뉴가 이 돌 아래 누워있다. 황제는 당당한 프랑크족의 왕국을 확장하고, 47년간 평화롭게 치세한 후, 인딕티오indictio(15년 간격의 징세 주기_옮긴이) 7년,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신 지 814년째 되던 해 1월 28일 70대에 운명했다. - P297

이처럼 일부는 프랑크 왕국에서 받고 또 일부는 독일 왕국에서 받은, 서로 다른 4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4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긴 띠 모양의 영토가 샤를 2세와 독일왕 루트비히 2세가 합의하여 로테르의 황제 망토 끝에 꼬리처럼 달아준 땅이었다.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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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도시를 제대로 알기 위한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어가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의 이 작은 도시는 기후 때문인지 몰라도 그 모든 것이 동시에, 그리고 열광적이고도 무심하게 이룩된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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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우데리크와 클로도미르, 킬데베르트, 클로타르가 통치하며 영토를 분할했을 때, 노예로 신분이 추락한 갈리아 주민들의 지위에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영토 분할로 인해 이들을 구속하는 속박이 더 단단해졌을 뿐이다. 주인이 사망하자 엄청난 규모의 주민이 상속자들을 따라 나뉘었다. 상속자에게는 이들을 내다 팔거나 무상 양도하거나 죽일 권리가 있었다. - P230

한마디로 수도원은 이교도 문학의 진수를 보존하고 전해주는 요새화된 도서관이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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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제국의 황제 레오 3세Leo III(재위 717~741)가 성상 숭배를 금지하고 성상도 우상이니 교회에서 모두 철거해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교황 성 그레고리오 3세는 무모하게 행동한 레오 3세를 파문하며 영적 권위로 세속적 권위에 맞서는 첫발을 내디뎠다. - P203

치열한 삶의 무게와 피로에 지친 샤를 마르텔은 콩피에뉴 시 인근 베르브리 쉬르 우아즈Verberie sur Oise에서 병에 걸렸다. 그는 두 아들 카를로만Carloman(710?~754. 아우스트라시아 궁재 재임 741~747, 747년부터는 수도사로 지냄_옮긴이)과 피핀Pippin(714~768, 궁재 재임 741~751, 카롤링거 왕조의 초대 왕. 재위 751~768. 피핀 3세・단신왕 피핀_옮긴이)을 병상으로 불러 자신이 칼로 획득한 왕국을 물려주었다. - P204

우리가 첫 번째 왕조를 프랑크-로만 왕조라 부른 이유는, 프랑크족 정복자들이 (자신들이 세심하게 지켜온) 자신들의 언어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처음에는 피정복민의 관습을 나중에는 피정복민의 종교까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72 물론 자유선거로 왕을 선출하는 원칙은 예외였다. 로마는 자유선거 원칙을 가끔 위배하긴 했지만 결코 폐지하지는 않았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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