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오늘 밤이 되기까지 내가 해왔던 행동에 설명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았다. 미적지근하고 모순과 주저로 점철된 몽롱한 반생이었다. 나는 허망한 기분으로 지난 일을 생각했다. 허공중에서 바람을 받은 한 조각 구름처럼 내 인생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갔다.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이고, 모였다가는 다시 모습을 바꾸어, 차례로 백조가 되고, 개가 되고, 악마가 되고, 전갈이 되고, 원숭이가 되었다. 구름은 하염없이 흩날리고 찢겼다. 하늘의 바람에 밀리며 무지갯빛으로 물들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289
하느님, 회사의 이익, 그리고 과부가 조르바의 머릿속에서는 아무 모순도 없는 조화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나는 오두막을 나서는 그의 경쾌한 발소리를 들었다. 일어났다. 마법이 풀리면서 내 영혼은 다시 육신의 감옥에 감금되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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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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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292
하느님 말씀하시기를, 살림 잘하는 여자는 숟가락으로 바느질도 하거니, 오냐, 내 악마의 뿔로 여자를 만들어 보리라! 그리고 만드셨지! 얘, 알렉시스, 그래서 악마가 우리를 못살게 구는 거란다. 여자의 어디를 만지든, 너는 악마의 뿔을 만지는 셈이란다. 그러니까, 얘야, 여자를 조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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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315
달빛을 받고 있는 조르바를 보고 있으려니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쩌면 저렇게 쾌활하고도 단순하게 세상과 어우러질 수 있는지! 그의 몸과 영혼은 얼마나 조화로운 하나를 이루고 있는지! 또 여자와 빵과 물과 고기와 잠 등 모든 것은 그의 몸과 너무도 행복하게 결합하여 저 조르바를 이루고 있다! 나는 우주와 인간이 그처럼 다정하게 맺어진 예를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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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318
말라르메의 시집이었다. 천천히 마음 내키는 대로 읽다가 책을 덮었고, 다시 펼쳤다가 결국은 내려놓고 말았다. 그의 시는 핏기도 없고 냄새도 없고 인간의 본질을 비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경험한 느낌이었다. 그의 시가 창백한 진공 속의 공허한 언어로 보였던 것이다. 박테리아 한 마리 없는 완벽한 증류수였지만 영양분 역시 하나 없는 물 같은 것, 요컨대 생명이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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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321
나는 소스라쳤다. 「붓다가 그 최후의 인간이다!」 나는 부르짖었다. 이것이 그의 비밀이며 엄청난 의미다. 붓다는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 영혼이었다. 붓다의 내부는 공허하며 그 자신이 바로 공(空)이다. 「네 육신을 비워라, 네 정신을 비워라, 네 가슴을 비워라!」 그는 외친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더 이상 물이 솟지 않고 풀이 나지 못하며 아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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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323
자네에겐 시간이 있는데, 내게는 그것이 없네. 행동이 나를 삼키고 말았네만, 나는 이게 좋아. 친구여, 행동하기 싫어하는 내 스승이여. 행동, 행동…… 구원의 길은 그것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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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339
이 원시인은 삶의 껍질 ─ 논리와 도덕과 정직성 ─ 을 간단히 깨고 삶의 본질 속으로 곧장 들어가 버렸다. 우리에게는 그토록 유익한, 그 모든 자잘한 덕성이 그에겐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만족을 모르고 그를 극한으로, 나락으로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거북하고 위험한 한 가지 덕성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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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365
나 혼자만 발기 불능의, 이성을 갖춘 인간이었다. 내 피는 끓어오르지도, 정열적으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했다. 나는 비겁하게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고서 할 일을 다했다고 믿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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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391
계절의 어김없는 리듬, 무상한 생명의 윤회, 태양 아래서 차례로 변하는 대지의 네 가지 얼굴, 생자필멸(生者必滅), 이 모든 사실이 다시 한 번 내 가슴을 조여 왔다. 다시 한 번 해오라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내 속에서 무시무시한 경고의 소리가 울렸다.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경고였다. 영원히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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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404
존재의 심연에서 나는 소리쳤다. 〈유아독존(唯我獨尊)! 오, 대지여! 나는 그대의 막내, 그대 젖줄을 빠는 나는 그대를 놓치지 않으리라. 그대는 다만 한순간의 삶을 내게 베풀지만 그 한순간이 젖이 되고 나는 그 젖을 빠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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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린 나는 하마터면 우물에 빠질 뻔했다. 자라서는 〈영원〉이라는 단어에 거의 빠질 뻔했다. 또 〈사랑〉, 〈희망〉, 〈국가〉, 〈하느님〉 같은 숱한 단어에도 빠질 뻔했다. 그 단어 하나하나를 정복하고 지날 때면 나는 흡사 위험에서 빠져나와 전진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겨우 단어를 바꾸어 놓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2년 전부터는 〈붓다〉라는 말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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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417
그러나 이제 확실히 느낀다. 조르바 덕분이다. 붓다는 최후의 우물, 마지막 낭떠러지 단어가 될 것이며, 이제 나는 영원히 해방될 것이라고. 영원히? 그거야 우리가 늘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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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417
「여자도 우리 같은 사람입니다. 품질이 좀 떨어질 뿐이지요. 여자란 지갑을 보면 돌아 버립니다. 착 달라붙어 자유고 뭐고, 에라 모르겠다, 모조리 던져 버리고 그 상태를 더 좋아합니다. 왜? 마음 한구석에서 지갑이 반짝거리니까요. 그러다가 정신이 돌아오면……. 에이, 이따위 이야기는 집어치웁시다, 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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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조르바만이 그들을 이렇게 이끌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일은 포도주가 되고 여자가 되고 노래가 되어 인부들을 취하게 했다. 그의 손에서 대지는 생명을 되찾았고 돌과 석탄과 나무와 인부들은 그의 리듬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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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까지 달렸던 내 젊은 시절의 꿈은 깃털이 뽑히고 그 순진하고 고상하고 고결했던 충동은……. 지적(知的) 공동 사회를 만들고 음악가, 시인, 화가…… 이렇게 몇몇 친구들이 모여 우리 자신을 거기에다 던져 넣고자 했던 계획……. 낮에는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만 만나 함께 먹고 마시고 읽고 인간의 중요한 관심사를 서로 토론하고 기존의 해답을 뒤집고자 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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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물속에 잠긴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했다. 올라갈수록 정신은 맑아지면서 고상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맑은 공기, 부드러운 호흡, 광막한 수평선이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했다. 영혼 역시 동물이나 마찬가지로 허파와 콧구멍이 있어서 산소가 필요하고, 먼지나 안개 속에서는 호흡에 불편을 느끼겠다 싶었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444
나는 지금도 마시고 피우지만 끊고 싶으면 언제든지 끊어 버립니다. 나는 내 정열에 휘둘리지도 않습니다. 조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한때 그걸 너무 좋아하다 그것도 목젖까지 퍼 넣고 토해 버렸지요. 그때부터 그것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어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464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 봐요, 두목. 악마를 이기려면 자기가 악마 한 마리 반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465
「첫 번째 이론은 이러하오. 꽃의 모양은 색깔에 영향을 미치고, 색깔은 속성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각각의 꽃은 인간의 몸에, 나아가 인간의 영혼에 저마다 다른 작용을 한다. 꽃이 만발한 들을 지날 때 우리가 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483
「나의 두 번째 이론은 이러하오. 실제적인 영향력을 가진 관념은 실체가 있다. 실제로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대기 속을 떠다니는 게 아니라 진짜 몸이 있다. 눈, 입, 발, 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 몸은 남성이나 여성이 되어 서로를 뒤쫓는다. 그래서 복음서에 이르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하는 것이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484
「이러하오. 우리의 덧없는 삶 속에도 〈영원〉이 있다. 우리로서는 혼자서 그걸 뚫어 볼 수 없을 뿐이다. 우리는 나날의 걱정으로 길을 잃는답니다. 소수의 사람, 인간성의 꽃 같은 사람만이 이 땅 위의 덧없는 삶을 영위하면서도 영원을 살지요. 나머지는 길을 잃고 헤매니까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종교를 내려 주신 것이오. 이렇게 해서 오합지졸도 영원 속에 살 수 있게 되는 거지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484
「왜 안 쓰느냐, 이유는 간단해요.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을 못 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르를 살아 버렸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운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떨어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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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입이 지나쳐 글자 그대로 헛껍데기만 남게 되고, 숨이 넘어가면 천당의 문지기 성 베드로 님이 천당 문을 열어 주시면서 이러실 겁니다. 〈어서 오너라, 조르바, 이 불쌍한 것, 어서 오너라. 조르바, 위대한 순교자여, 가서 네 선배 제우스 옆에 누워 쉬어라. 불쌍한 것, 너는 땅에서 네 몫을 했다. 내 너를 축복하지 않고 어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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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지나 있었다. 바람이 일고 있었다. 저 건너 아프리카에서 노토스 ─ 나무를 부풀리고 포도 넝쿨을 부풀리고 크레타 여인의 가슴을 부풀리는 따뜻한 남풍 ─ 가 불어왔다. 물가에 누운 섬 전체가, 수액을 솟게 하는 이 바람의 따뜻한 입김 속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제우스, 조르바, 그리고 남풍이 하나로 뒤섞이면서 밤의 어둠 속에 거대한 남자 얼굴 하나가 뚜렷이 보였다. 검은 수염, 자르르한 머리카락. 숙인 그 얼굴이 뜨겁고 붉은 입술을 밀착하고 있는 것은 오르탕스 부인, 대지였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564 - P521
조르바는 껄껄 웃었다.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그가 조금 뜸을 들이고는 말을 계속했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성물(聖物)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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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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