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의 화면은 후기로 갈수록 표현성이 강해진다. 거기서 후기 인상주의가 탄생한다. 사실 후기 인상주의는 더 이상 인상주의 운동의 범위에 속한다고 할 수가 없다. 후기 인상주의 화면은 외부 사물의 ‘인상(impression)‘이 아니라 내면의 정서적 표현(expression)‘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흐의 작품에는 아직신인상주의에서 유래한 분할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고갱의 작품에서는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다. 대상은 어두운 윤곽선으로 둘러싸이고, 그 안쪽은 실제로 보이는 것과 관계없는 표현적 색채로 처리된다. 고흐와 고갱은 조형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림이 동시에 정신의 표현이 되게 했다. - P221
고흐에게도 색채는그저 재현의 수단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는 "색은 그자체로 뭔가를 표현한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고흐는 노랑을 좋아했다. 노랑이 감정적 진실의 상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서 노랑은 태양과 삶과 신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초기의 모노크롬에서 벗어나 색채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온전한 색채의 형이상학‘에 빠져든다. 색의 상징주의. 이 중세의 전통이 동시에 현대미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칸딘스키는 모든 색에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고흐의 작품은 그 밖에도 다양한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 P235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다. ‘상징‘이란 가시적인 것 속에 담긴비가시적 의미를 가리킨다.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가시적 세계를 그저 ‘재현‘ 하려 했다면, 상징주의는 가시적 대상을 비가시적인 의미의 ‘상징‘으로 제시하려 한다. 이를테면 귀스타브 모로의 작품에 등장하는 스핑크스나 오르페우스의 형상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어두운 힘을 의미한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상징주의는 독일·오스트리아 · 노르웨이 등으로 뻗어나가 하나의 국제적 운동이 된다. 20세기 미술 특유의 상징적 성격은 상징주의 운동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 P2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