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이야기지." 가후쿠는 말했다. "‘아아, 서글프다. 무슨 수가 없을까. 나는 이제 마흔일곱이야. 예순에 죽는다 해도 앞으로 십삼 년이나 더 살아야 해. 너무 길어. 그 십삼 년을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뭘 하면서 하루하루를 메꿔나가지?’ 그 당시 사람들은 대개 예순 살에 죽었어. 바냐 아저씨는 이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는지도 모르지."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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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쿠는 벌써 십이 년째 그 사브를 몰았고, 주행거리는 십만 킬로미터를 넘어섰다. 캔버스 지붕도 점점 추레해져갔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에는 틈새로 물이 새지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새 차를 살 마음이 없었다. 지금까지 큰 말썽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는 이 차에 개인적인 애착을 갖고 있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차 지붕을 열고 운전하는 게 좋았다. 겨울에는 두툼한 코트에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여름에는 모자와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핸들을 잡았다. 기어를 올리고 내리는 것을 즐기며 도쿄 시내를 이동하고,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느긋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이며 전깃줄에 앉은 새들을 관찰했다. 그런 일들은 이제 그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일부였다. 가후쿠는 사브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며, 레이스 전에 말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꼼꼼하게 점검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13

키는 165센티미터 정도, 뚱뚱하지는 않지만 어깨가 넓고 몸이 탄탄해 보였다. 목덜미 오른쪽에 큼직한 올리브만한 보라색 타원형 반점이 있었지만 본인은 그게 남들 눈에 띄는 것에 딱히 저항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숱 많은 검은 머리는 걸리적거리지 않게 뒤로 묶었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오바가 말했듯이 몹시 퉁명스러운 인상이었다. 뺨에는 여드름 자국이 조금 남아 있었다. 눈은 크고 눈동자가 또렷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의심 많은 듯한 빛을 띠었다. 눈이 큰 만큼 그 색깔도 짙어 보였다. 두 귀는 넓고 커서 마치 산간벽지에 세워둔 수신기 같았다. 5월에 입기에는 좀 두툼하다 싶은 남성용 헤링본 재킷에 갈색 면바지를 입고 검정 컨버스 스니커즈를 신었다. 재킷 안에는 흰색 긴소매 티셔츠, 가슴은 상당히 큰 편이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14

가는 길에 가후쿠는 항상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조수석에서 거기에 맞춰 대사를 읊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겨 번안한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였다. 그는 바냐 아저씨 역을 맡았다. 대사는 전부 완벽하게 암기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날마다 따라 욀 필요가 있었다. 오랜 습관이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0

가후쿠는 그녀를 사랑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그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강하게 마음을 빼앗겼고, 아내가 죽을 때까지(그때 그는 마흔아홉 살이었다)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결혼생활 동안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2

그가 떠난 뒤, 가후쿠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그와 악수한 손바닥을 펴고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다카쓰키의 손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그 손이, 그 손가락이 아내의 벗은 몸을 쓰다듬었다, 고 가후쿠는 생각했다. 시간을 들여, 구석구석. 가후쿠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나는 무얼 하려는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됐건 그는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35

가후쿠가 보기에,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하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카쓰키는 분명 후자였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37

그날 밤은 아오야마의 작은 바에서 술을 마셨다. 네즈 미술관 뒷골목의 눈에 띄지 않는 가게였다. 마흔 안팎의 말수 적은 남자가 항상 바텐더로 있고, 구석 장식장 위에서는 비쩍 마른 회색 고양이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이 바에 붙어사는 근처 길고양이인 모양이었다. 오래된 재즈 레코드가 턴테이블 위에서 돌아갔다. 그런 분위기가 맘에 들어 전에도 둘이서 몇 번 찾아갔던 가게였다. 그들이 만날 때는 왜 그런지 비가 내릴 때가 많았는데, 그날도 가랑비가 흩뿌렸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40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가후쿠는 말했다. "내가 그녀를—적어도 중요한 일부를—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녀가 죽어버린 지금, 그건 아마도 영원히 이해되지 못한 채 끝나겠지.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 작고 단단한 금고처럼.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41

"내가 아는 한, 가후쿠 씨 부인은 정말로 멋진 여자였어요. 물론 내가 안다고 해봐야 가후쿠 씨가 아는 것의 백분의 일에도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확신해요. 그런 멋진 사람과 이십 년이나 함께할 수 있었던 걸 가후쿠 씨는 뭐가 어찌됐건 감사해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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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민의 60퍼센트는 똑같이 생긴 아파트에 산다. 그중에서도 대형 건설사의 대형 아파트 단지를 선호한다. 많은 청년들이 창업보다는 대기업이나 공무원 같은 대형 조직을 선호한다. 우리 의식에는 도전이나 모험보다는 큰 단체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거나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리한다. 심지어 우리는 중국집에 가서도 짜장면으로 통일하려고 한다. 누구 하나가 볶음밥을 시키면 ‘좀 유별난 사람’으로 치부한다. 원래 사람마다 다른 걸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좀처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보면 다르다고 느끼지 않고 틀렸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표현을 혼동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의식 속에 ‘다른 것=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아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현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24

우리나라 학교 건축은 교도소 혹은 연병장과 막사의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 12년 동안 생활한 아이들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전국 어디서나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교실로 구성된 대형 교사에서 12년 동안 키워지는 아이들을 보면 닭장 안에 갇혀 지내는 양계장 닭이 떠오른다. 남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똑같은 교실에서 자라난 사람은 똑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을 편하게 생각할 것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25

학교 외에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또 다른 시스템으로 전화기, 자동차, 비행기가 있다. 이 네 가지 발명이 새로운 근대사회를 만들었다. 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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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라운 사실은 이 건축물이 기원전 7천 년경에 시작된 농업혁명 이전에 지어졌다는 점이다. 도시 발생에 관한 기존의 정설은 수렵 채집의 시기가 지나고 농업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한곳에 머물러 살게 되어 도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괴베클리 테페의 발견으로 이 순서가 뒤바뀌게 되었다. 괴베클리 테페는 농업혁명이 시작된 시점보다 수천년 먼저 지어졌다. 이 건축물을 지으려면 60~70명의 사람이 6개월에서 1년 동안 매달려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 건축물을 지으면서 한곳에서 생활하려면 지속적인 식량 공급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 원시적인 형태의 농업이 시작됐다는 가설이다. 농업으로 건축이 시작된 게 아니라, 건축을 하기 위해 농업을 시작한 것으로 시각이 바뀌었다. 즉 인간이 사후세계를 믿기 시작하자 의식을 치르기 위해 괴베클리 테페 같은 신전을 건축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농업이 시작된 것이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8

‘아파트 단지’별로 주민들이 나뉘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끼리끼리만 모이는 ‘SNS 단지’에 갇혀서 바깥세상과 소통을 못하고 있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하고만 소통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가장 옳다고 느낀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자신과 조금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맹공격을 퍼붓고, 이런 폭력적 행위는 생각의 다양성을 죽이고 양극화 현상을 만들고 있다. 학교에서 생겨나는 ‘왕따’ 현상의 원인을 심리학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군가가 한 사람을 왕따시키고 공격하면 중립적인 위치에 있던 사람들도 자신이 왕따의 대상이 될 것이 두려워 함께 왕따 공격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단면이 그렇다. 누군가가 극단적인 성향을 띠면 중간층의 사람들은 눈치를 보게 된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성은 인간의 숨어 있던 폭력성을 극대화시켰고 이는 갈등과 반목을 양산했다. - <어디서 살 것인가>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847187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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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든, 슬프든, 기쁘든 간에 나를 대변해주는 상황을 만난다는 것, 그리고 내 상태가 이렇다는 것을 인식하고 밖으로 꺼내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움이 되거든요. - <그림의 힘>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0044 - P347

사람은 이처럼 애정과 증오, 또는 독립과 의존, 존경과 경멸 등 완전히 상반되는
양가감정을 동시에 갖기도 합니다. 그럴 때 내 마음은 어디에도 안착되지 못하고 힘들게 마련입니다. - <그림의 힘>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0044 - P350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을 느끼고 싶다면 바람과 물이 주는 자유로움에 몸을 맡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 <그림의 힘>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0044ㅣ - P359

주로 고정된 형태, 예상된 결과를 추구하는 우리들의 일상에서, ‘뿌린다’는 자체는 그야말로 해방의 몸짓입니다. 잡힐만한 형태랄 것도 없고, 물감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결과를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 내면이란 것도 그렇죠. ‘화가 난다’ ‘기쁘다’ ‘슬프다’라는 정돈된 말들에 나의 감정이 딱 들어맞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잭슨 폴락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뿌리는 기법’을 동원하여 감정의 표현에 가까이 다가간 것입니다. - <그림의 힘>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0044 - P373

그림을 잘 그리고 싶으나 신체적으로 불편한 분들에게 ‘습식화’ 기법을 권하곤 합니다. 습식화란 물감을 투두둑 떨어뜨려 보는 것을 말합니다. 우연히 번지는 효과를 통해서 모양과 색상이 바뀌는 것만 보아도 사람들은 기뻐하고 탄성을 지릅니다. 그와 유사한 방법이 ‘뿌리기’입니다. 원하는 색상을 골라서 붓에 묻히고는 쫙쫙 뿌리는 것이지요. 속이 시원하다고 할까요. 다양한 스트레스와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만 해도 기분이 달라지는 걸 체험할 수 있습니다. - <그림의 힘>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80044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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