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후쿠는 벌써 십이 년째 그 사브를 몰았고, 주행거리는 십만 킬로미터를 넘어섰다. 캔버스 지붕도 점점 추레해져갔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에는 틈새로 물이 새지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새 차를 살 마음이 없었다. 지금까지 큰 말썽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는 이 차에 개인적인 애착을 갖고 있었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차 지붕을 열고 운전하는 게 좋았다. 겨울에는 두툼한 코트에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여름에는 모자와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핸들을 잡았다. 기어를 올리고 내리는 것을 즐기며 도쿄 시내를 이동하고,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느긋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이며 전깃줄에 앉은 새들을 관찰했다. 그런 일들은 이제 그의 라이프 스타일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일부였다. 가후쿠는 사브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며, 레이스 전에 말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꼼꼼하게 점검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13

키는 165센티미터 정도, 뚱뚱하지는 않지만 어깨가 넓고 몸이 탄탄해 보였다. 목덜미 오른쪽에 큼직한 올리브만한 보라색 타원형 반점이 있었지만 본인은 그게 남들 눈에 띄는 것에 딱히 저항감이 없는 모양이었다. 숱 많은 검은 머리는 걸리적거리지 않게 뒤로 묶었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오바가 말했듯이 몹시 퉁명스러운 인상이었다. 뺨에는 여드름 자국이 조금 남아 있었다. 눈은 크고 눈동자가 또렷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의심 많은 듯한 빛을 띠었다. 눈이 큰 만큼 그 색깔도 짙어 보였다. 두 귀는 넓고 커서 마치 산간벽지에 세워둔 수신기 같았다. 5월에 입기에는 좀 두툼하다 싶은 남성용 헤링본 재킷에 갈색 면바지를 입고 검정 컨버스 스니커즈를 신었다. 재킷 안에는 흰색 긴소매 티셔츠, 가슴은 상당히 큰 편이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14

가는 길에 가후쿠는 항상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조수석에서 거기에 맞춰 대사를 읊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겨 번안한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였다. 그는 바냐 아저씨 역을 맡았다. 대사는 전부 완벽하게 암기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날마다 따라 욀 필요가 있었다. 오랜 습관이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0

가후쿠는 그녀를 사랑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그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강하게 마음을 빼앗겼고, 아내가 죽을 때까지(그때 그는 마흔아홉 살이었다)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결혼생활 동안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22

그가 떠난 뒤, 가후쿠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그와 악수한 손바닥을 펴고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다카쓰키의 손의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그 손이, 그 손가락이 아내의 벗은 몸을 쓰다듬었다, 고 가후쿠는 생각했다. 시간을 들여, 구석구석. 가후쿠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나는 무얼 하려는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됐건 그는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35

가후쿠가 보기에,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하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카쓰키는 분명 후자였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37

그날 밤은 아오야마의 작은 바에서 술을 마셨다. 네즈 미술관 뒷골목의 눈에 띄지 않는 가게였다. 마흔 안팎의 말수 적은 남자가 항상 바텐더로 있고, 구석 장식장 위에서는 비쩍 마른 회색 고양이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이 바에 붙어사는 근처 길고양이인 모양이었다. 오래된 재즈 레코드가 턴테이블 위에서 돌아갔다. 그런 분위기가 맘에 들어 전에도 둘이서 몇 번 찾아갔던 가게였다. 그들이 만날 때는 왜 그런지 비가 내릴 때가 많았는데, 그날도 가랑비가 흩뿌렸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40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가후쿠는 말했다. "내가 그녀를—적어도 중요한 일부를—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녀가 죽어버린 지금, 그건 아마도 영원히 이해되지 못한 채 끝나겠지.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 작고 단단한 금고처럼.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41

"내가 아는 한, 가후쿠 씨 부인은 정말로 멋진 여자였어요. 물론 내가 안다고 해봐야 가후쿠 씨가 아는 것의 백분의 일에도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확신해요. 그런 멋진 사람과 이십 년이나 함께할 수 있었던 걸 가후쿠 씨는 뭐가 어찌됐건 감사해야 한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라딘 eBook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중에서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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