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리가 나가자마자 엘라는 침대에서 몸을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잠에서 완전히 깬 눈은 크고 강렬했다. 잠시 후 엘라는 다시 몸을 돌려 창문 셰이드 가장자리로 들어오는 가느다랗고 환한 빛줄기 두 개를 유심히 살폈다. 침침한 공기 속에서 미세한 먼지들이 춤추고 있었다. 작디작은 생명체들이 물속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라는 곧 도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얼굴 위로 두 팔을 포개고 잠든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 <플레인송>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765232 - P14

잠에서 깨기도 전에 가슴과 목에서 그것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빅토리아는 잠옷 대용인 헐렁한 티셔츠와 흰 팬티 차림으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가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한 손으로는 얼굴과 입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변기통을 부여잡은 채 웩웩대며 구역질을 했다. 이 발작으로 온몸이 피폐해졌다. 입술에서 침이 주르르 흘러내려 흔들거렸다. 침은 길게 늘어지고 또 늘어지다가 결국 끊어졌다. 빅토리아는 나약하고 텅 빈 기분이 들었다. 목구멍이 화끈거렸고 가슴이 쓰라렸다. 갈색 얼굴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창백해졌고, 높은 광대뼈 밑은 움푹 패고 누르스름하게 변했다. 검은 눈은 평소보다 더 크고 더 새까맣게 보였고 이마는 끈끈한 땀으로 번들거렸다. 빅토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 구역질과 발작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 <플레인송>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765232 - P16

빅토리아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문간의 여자는 사십대 후반이었고 마른 몸에 얼굴은 수척했으며 몹시 지쳐 보였다. 막 잠에서 깨어 피곤한 듯했고, 축 처진 가슴 위로 얼룩진 푸른색 새틴 가운의 앞섶을 모아 쥐고 있었다. 머리는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적갈색이었는데, 염색한 지 꽤 되어서 관자놀이와 이마 위로 하얀 뿌리가 보였다. - <플레인송>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765232 - P17

너무 늦었어. 여자가 말했다. 네가 자초한 일이니 뒤처리도 네가 알아서 해. 네 아비도 맨날 기대려고만 했지. 아침마다 돌아오면 여기가 아프네, 저기가 아프네 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인 척하고. 너까지 징징대지 마. - <플레인송>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765232 - P19

정거장은 붉은 벽돌로 지은 단층 건물로, 지붕은 초록색 타일이었다. 침침한 대기실은 환기가 안 되어 퀴퀴한 냄새와 흙냄새가 났고, 교회 신도석 같은 등받이 높은 나무 벤치 서너 개가 철로와 매표소를 향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창문 하나에 검은 격자 철망을 쳐놓은 방이 매표소였다. 정거장 건물 밖으로 나가보면 철제 바퀴가 달린 낡은 초록색 우유 배달 마차가 서 있었다. 더는 쓸 일이 없는 마차였다. 하지만 플랫폼에 서 있는 모습을 무척이나 맘에 들어 한 역장 랠프 블랙은 마차를 그대로 놓아두었다. 랠프 블랙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객차는 홀트에서 오 분만 정차했고, 오 분이면 승객 두세 명이 기차에 타거나 내리기에 충분했다. 수화물차의 남자가 <덴버 뉴스>를 기찻길 옆 플랫폼에 떨어뜨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삼실로 묶어놓은 신문 뭉치는 아래쪽이 거친 조약돌에 찢긴 채 아직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 <플레인송>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765232 - P22

복사기 손잡이를 돌리느라 손과 팔이 빠르게 돌아갔고 엉덩이가 함께 움직이면서 치마가 들썩이고 흔들렸다. 검은 치마와 흰 블라우스 차림에 은제 장신구를 주렁주렁 걸친 매기는 키가 컸고 건강해 보였으며 머리색은 검었다. - <플레인송>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765232 - P36

부인이 발을 끌며 뒤로 물러났고 아이들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덥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온갖 물건으로 가득했다. 소포 상자들. 종이들. 옷더미들. 높이 쌓인 누런 신문들. 꽃 화분들. 원형 선풍기. 사각형 선풍기. 모자걸이. 순서대로 모아둔 시어스 통신판매 카탈로그들. 한쪽 벽에서 내려 펼친 다리미판 위에는 식료품이 가득 든 종이봉지들이 한 줄로 세워져 있었고, 방 한가운데 놓인 나무 장 안에는 텔레비전 위에 더 작은 휴대용 텔레비전이 머리처럼 얹혀 있었다. 텔레비전 뒤쪽에는 해진 팔걸이에 작은 수건들을 올려둔 안락의자가 있었으며, 그 옆 창문 앞에는 빛바래고 길쭉한 소파가 있었다. - <플레인송>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765232 - P72

바람 없이 맑고 쾌청한 11월의 어느 날이었고, 아직 오후 시간은 충분했다. 등 뒤로 늘어진 그림자가 시꺼먼 흙길에 널브러진 걸레처럼 보였다. 길은 가루처럼 건조했다. - <플레인송>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765232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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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불타오르는 크고 검은 두 눈은 매우 아름다우며, 그 창백한 두 눈은 약간 누르스름한 기색이 비치는 갸름한 얼굴에 특히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그는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두 눈과 매혹적인 입술의 윤곽에는 자기 형이 한때 무서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 사랑이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 같은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이대우 저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1 - P410

커튼이 열리면서 바로…… 그루셴까가 기쁨에 넘친 듯 활짝 미소를 지으며 탁자를 향해 다가왔다. 알료샤는 마치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료샤는 그녀를 응시한 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바로 그녀다, 그 끔찍한 여자. 이반 형이 30분 전에 〈짐승〉이라고 불렀던 그 여자다. 그 여자가 바로 자기 앞에 서 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게 보이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아닌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다른 아름다운 여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여자가 아닌가! 사실 그녀는 매우, 매우 아름다운 여자였으며 많은 사내들의 정열을 자극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러시아적 미인이었다. 그녀는 상당히 큰 키였으나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보다는(그녀는 매우 키가 컸다) 약간 작은 편이었다. 몸매도 풍만한 데다가 몸 동작도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부드러웠고, 목소리도 어떤 달착지근한 향기를 뿜어내듯 여성스러웠다. 그녀는 까쩨리나 이바노브나처럼 의기양양하고 힘있게 걷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뿐히 걸어서 다가왔다. 마룻바닥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화사한 검은 비단 옷을 사각거리며 안락의자에 사뿐히 걸터앉아 거품처럼 하얗고 토실토실한 목과 넓은 어깨를 검은 모직 숄로 얌전히 감쌌다. 그녀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었으며 얼굴은 자신의 나이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 얼굴은 매우 흰 편이었고 뺨에는 연분홍빛 홍조가 돌고 있었다. 얼굴형이 너무 넓은 게 아닌가 싶고 아래턱은 살짝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윗입술은 얇았으나 약간 튀어나온 아랫입술은 두 배 가량 두꺼워 마치 부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놀라우리만치 매혹적인 검은 머리칼, 짙은 검은색 눈썹, 속눈썹이 긴 아름답고 푸른 눈 등은 혼잡한 군중 속을 거니는 아무리 무심하고 부주의한 남자라 할지라도 일단 마주치기만 하면, 갑자기 그 앞에 걸음을 멈추어 서서 오랫동안 그 얼굴을 못 잊을 것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이대우 저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1 - P421

그녀는 천진난만한 눈으로 바라보며 무엇이 그리 좋은지 즐거운 표정이었고,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확신에 가득 차서 조바심내는 어린애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벙글거리며〉 바로 탁자 쪽으로 다가왔다. 알료샤는 그녀의 시선이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고 느꼈다. 그녀에게는 알료샤로서는 이해가 되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저 천성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양이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몸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매는 풍만하고 힘이 넘쳐흘렀다. 숄 밑으로는 넓고 풍만한 양 어깨와 아름다움의 절정에 다다른 젊은 처녀다운 볼록한 젖가슴이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몸은 분명히 비율이 약간 과장되긴 했지만 밀로의 비너스 상의 형태를 그려 나가는 듯했다. 그걸 예감할 수 있었다. 러시아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루셴까를 보면서 그 싱싱하고 젊음이 넘치는 아름다움도 서른 살이 되면 조화를 잃어 뚱뚱해지고 얼굴은 살이 쪄 축 늘어지며 눈가와 이마에는 얼마 안 되어 주름살이 가득하고 얼굴빛은 윤기가 사라져 어쩌면 불그죽죽해질지도 모르는, 한마디로 말해서 러시아 여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찰나적인 아름다움, 무상한 아름다움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드시 예언할 것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이대우 저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1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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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거스리는 홀트의 자기 집 부엌 창문 앞에 서서 해가 막 떠오르는 뒤뜰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해는 풍차 꼭대기에 닿았다가 나무기둥 위 강철 날개와 꼬리날개를 따라 움직이며 점점 붉어졌다. 잠시 후 거스리는 담배를 끄고 이층으로 올라가 문이 닫힌 손님방을 지나쳤다. 닫힌 문 뒤 어두운 방 안 침대에는 그녀가 자고 있었다. 혹은 깨어 있었다. 거스리는 복도를 지나 남자아이 두 명이 있는 부엌 위쪽 방으로 갔다. - <플레인송>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765232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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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책 중독자다. 나는 많이, 아주 많이 걷는다. 나에게 산책은 다리 근육을 사용해서 이족 보행을 일정 시간 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나에게 산책은 예식이다. 산책에 걸맞은 옷을 입고, 신중하게 그날 날씨를 살피고, 가장쾌적한 산책로를 선택한다. 그리고 집을 나가, 꽃그늘과 이웃집 개와 과묵한 이웃과 버려진 마네킹을 지나 한참을 걷다가 돌아온다. - P284

나에게 산책은 구원이다. 산책은 쇠퇴해가는 나의 심장과 폐를 활성화한다. 산책은 나의 허리를 뱃살로부터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안구를 노트북과 휴대폰 스크린으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마음을 스트레스로부터 구원한다. 산책은 나의 심신을 쇠락으로부터 구원한다. 동물원의 사자가 우리 안을 빙빙 도는 것은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워서라는데, 산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 P285

나에게 산책은 생업이다. 얼핏 보면, 빈 시간을 죽이려고 산책 다니는 것처럼 보이겠지. 나는 산책을 통해 일상의 필연적 피로를 씻는다. 그뿐이랴. 산책 중에 떠오르는 망상은 메모가 되고, 메모는 글이 되고, 글은 책이 된다. 그렇다고 글감을 얻기 위해 산책하는 것은 아니다. 글감은산책 중에 그저 발생한다. 산책하면 단지 기분이 좋다. - P285

나에게 산책은 네트워킹이다. 술자리와 골프와 동창회와 조기축구회를 즐기지 않는 중년에게 산책은 거의 유일한 정기 네트워킹이다. 걸으면서 나보다 앞선 산책자들과 뒤에 올 산책자들을 생각하며 상상의 네트워크를 맺는다. 나는 특히 산책을 즐기다가 죽은 스위스의 작가 로베르트 발저를 생각한다. 1956년 12월 25일, 발저는 홀로 산책하다가 눈 위에 쓰러져 죽었다. - P285

발저는 산책을 이렇게 찬양한다.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최고로 아름답고, 좋고, 간단하다. 신발만 제대로 갖춰 신은 상황이라면 말이다." 나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 차가 없다. 신발은 있다.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골라 신고 평지를 산책한다. 오르막길은 하나의 과제처럼 여겨지므로되도록 피한다. 모든 것에 눈이 내려앉은 날 산책은 얼마나 황홀하던가. 발저는 그러한 황홀함 속에서 죽었다. - P287

산책할 시간에 차라리 회식을 하고, 골프를 치고, 출마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겠냐고? 홀로 산책하면 외롭지않냐고? 산책은 세상과 멀어지는 일이 아니냐고? 그렇지않다. 산책은 이 세상에서 내가 존재하기 위한 거의 모든것이다. 발저는 말한다. "활기를 찾고 살아 있는 세상과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대한 느낌이 없으면 나는 한마디도 쓸 수가 없고, 아주작은 시도, 운문이든 산문이든 창작할 수 없습니다. 산책을 못 하면, 나는 죽은 것이고, 무척 사랑하는 내 직업도사라집니다. 산책하는 일과 글로 남길 만한 것을 수집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습니다." - P287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책에 목적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나는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므로.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으므로. 목적은 결국 삶을 배신하기 마련이므로,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해보자. 대개 기대만큼기쁘지 않다. 허무가 엄습한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뭐 하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고 해보자. 허무가 엄습한다. 그것 봐, 해내지 못했잖아.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지? - P288

목적을 가지고 걷는 것은 산책이 아니다. 그것은 출장이다. 나는 업무 수행을 위한 출장을 즐기지 않는다. 나는 정해진 과업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난 아닌데? 나는 그냥 태어났다. 여건이 되면 민족중흥에 이바지할 수도 있겠지만, 민족중흥에 방해나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난 산책하러 태어났다. 산책을 마치면 죽을 것이다. - P288

그렇다고 무위도식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열심히 일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이런저런 성취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그 일을 하러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 별거 아닌, 혹은 별거일 수도 있는 성취를 이루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성취는 내가 산책하는 도중에 발생한다. - P289

산책하러 나갈 때 누가 뭘 시키는 것을 싫어한다. 산책하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줘. 곡괭이 하나만 사다 줘. 손도끼 하나만 사다 줘. 텍사스 전기톱 하나만 사다 줘. 어차피 나가는 김인데. 나는 이런 요구가 싫다. 물론 그런 물건들을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목적이 부여되면 산책은 더 이상 산책이 아니라 출장이다. 애써 내 산책의 소중함에 대해 설명하기도 귀찮다. 그냥 텍사스 전기톱을 사다 준 뒤, 나만의 신성한 산책을 위해 재차 나가는거다. 신성한 산책을 하는 중이라고 해서 걷기만 한다는것은 아니다. 길가의 상점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물건을사기도 한다. 그것은 미리 계획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발길을 옮기다가 관심이 생겨서 하는 일일 뿐이다. - P289

인생에 정해진 목적은 없어도 단기적 목표는 있다.
산책에 목적은 없어도 동선과 좌표는 있다. 내가 가장 즐겨 가는 곳 중 하나는 인근의 독립서점이다. 자, 나온 김에 오늘도 독립서점 쪽으로 걸어가볼까. 그렇다고 해서 특정책을 구입하려는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어떤 책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는 그냥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한다. 독립서점에는 그냥 간다. 그냥 가서 과묵하고 유식한 점장이 큐레이팅한 서가를 돌아보다 보면종종 책을 사게 된다. 그곳에는 재밌는 책이 많으니까. - P291

목적 없는 삶을 바란다고 하면, 누워서 ‘꿀 빨겠다’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오해다. 쉬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 아니던가. 소극적으로 쉬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쉬어야 쉬어진다.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
목적 없는 삶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야 목적 없이 살 수 있다.
꼭 목적이 없어야만 한다는건 아니다. 나는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으므로. - P291

행복하고 싶어! 많이들 이렇게 노래하지만, 나는 행복조차도 ‘추구’하고 싶지 않다. 추구해서 간신히 행복을 얻으면, 어쩐지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다. 가는 대신에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일. 억지로가려고 하면 더 안 오는 일. 잠이 안 와요, 라는 표현에서드러나듯 우리가 잠에게 가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억지로 잠들려고 할수록 잠이 달아나지 않던가. 행복도 그런게 아닐까. 나는 자네에게 가지 않을 테니, 자네가 오도록하게. 행복이여, 자네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도록 하게, 셔터가 무심코 눌려 찍힌 멋진 사진처럼. - P292

목적 없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다. 내가 너무 지나친 궁핍에 내몰린다면, 생존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내가 너무 타인의 인정에 목마르다면, 타인의 인정을 얻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내가 시험에 9수를한다면, 시험 합격이 삶의 목적이 되겠지. 그렇게 되지 말기를 기원한다. - P292

재산은 필요하지만, 재산 축적 자체가 삶의 목적이될 수는 없다. 에피쿠로스는 말했다. "자유로운 삶은 많은재산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군중이나 실력자들 밑에서 노예 노릇을 하지 않고서는 재산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돈이 많으면 잘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잘사는 것은 다르다. 나는 잘생긴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잘생기기를 바라며, 건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하기를 바라며,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혜롭기를 바란다. 나는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란다. - P293

사람마다 다양한 재능이 있다.
혹자는 살아남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척하는 데 일가견이 있고,
혹자는 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삶을 원한다.
산책보다 더 나은 게 있는 삶은 사양하겠다.
산책은 다름 아닌 존재의 휴가이니까. - P293

『아우스터리츠』에서 작가 W. G. 제발트는 벽에 붙어있는 나방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방들은 살아 있는 동안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생식이란 과업을 가능하면 빨리 완수하는 것만 생각한다고 알폰소가 말했지요. … 녀석들은 자기들이 잘못 날아왔음을 아는 것 같아요. 녀석들이 죽음의 경련으로 경직된 미세한 발톱으로 매달린 채 목숨이 끝날 때까지 불행의 장소에 달라붙어 있으면, 공기의 흐름이 그들을 떼어내어 먼지 쌓인 구석으로 날려 보내지요. 내 방에서 죽어가는 그런 나방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종종 이 혼돈의 시간에 그들은 어떤 불안과 고통을 느꼈을까 하고 자문하곤 하지요. - P9

인간은 생식이란 과업 이상을 꿈꾸게 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번식에 그치지 않고 번식 이상의 의미를 찾으면서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현재에 만족하지않고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면서 인간이 되었다. 인간은 약육강식에 반대하고 인간의 선의를 발명하면서 인간이 되었다. - P9

의미와 희망과 선의를 좇으면서 동시에 학살과 전쟁과 억압과 착취의 역사를 만들어온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대를 이어 생멸을 거듭해온 인간이란 종(種)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혼돈의 시간에 그들은 어떤 기쁨과 불안과 고통을 느꼈을까 하고 자문해보곤 한다. - P9

희망은 답이 아니다.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답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이미 탈진 상태인 이들에게 앞으로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희망은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끔 필요한 위안이 되어야 한다. - P10

인간의 선의는 답이 아니다.
선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답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이들에게 인간의 선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간의 선의는 선의 없이도 살아갈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끔 주어지는 선물이 되어야 한다.
의미는 답이 아니다.
의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답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텅 비어버린 이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역설하는 게 무슨 소용이있을까. 의미는 의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가끔 떠올릴 수 있는 깃발이 되어야 한다. - P10

인간에게는 희망이 넘친다고, 자신의 선의는 확고하다고,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고 해맑게 웃는 사람을 믿지않는다.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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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끄람스꼬이의 작품 중에는 「관조자」라는 제목의 뛰어난 그림이 있다. 그 그림 속에는 겨울 숲이 그려져 있고, 그 숲 사이로 난 숲길에는 낡은 농부복에 짚신을 신은 지독하게 외로워 보이는, 깊디깊은 고독 속에서 길을 잃은 농부가 서 있는데 마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이대우 저

리디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1242000791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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