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인정하며 건넨 따듯한 말보다, 내게 했던 그 거친 쓴소리들을 얄궂게도 더 자주 떠올린다. 그렇게 듣기 싫던 말들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나의 연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그래서,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일까? 내까짓 게 계속 연주를 해도 되는 걸까.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 보면, 마치 아버지가 어딘가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관객석 어딘가에 하얀 양복을 입고 까만 나비넥타이를 맨 모습으로, 날카롭지만 분명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백혜선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90305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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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벌판 너머 서쪽 하늘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벽돌은 노을빛과 어우러져 거대한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50

단지 그녀는 세상에 벽돌을 남겼을 뿐이다. 그리고 그 벽돌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림을 남겼을 뿐이다. 벽돌에 담긴 그림 속엔 장차 벽돌이 세상에 나가 자신의 마음을 전해주기를 바라는 춘희의 간절한 바람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58

하지만 적어도 가장 소설답지 않은 스타일을 통해 소설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가장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텍스트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만큼은 부정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고래』는 서구 근대 장편소설이 제시한 리얼리즘과 그럴듯함verisimilitude의 형식과 기율에 상당 부분 부합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동서양 고금의 다양한 서사 텍스트의 스타일에 빚진 바가 많은, 역설과 혼합의 산물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65

금복은 노파의 죽음과는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노파의 원령 또한 생전에 그토록 집착했던 돈 자체에 들러붙어 상속된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68

분명한 것은 그녀가 당시에 몰입하고 있었던 남성으로는 충족시키지 못하는 또다른 욕망의 대상에 눈을 돌리는, 즉 타자를 발견하는 순간 파국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69

그도 그럴 것이 금복은 자신의 믿음과는 무관하게 그때그때 동경했으나 손에 넣지 못했던 모든 대상 및 완전히 극복했다고 여겼던 죄의식의 원인 일체가 물질적으로 집약·구현된 고래극장을 건설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길 만큼 부지불식간 자신의 과거에 구애되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72

그저 노파와 금복이 자신의 죄를 회피하려 한 것이 예기치 않은 결과를 불러온 것이며, 애꾸와 춘희 역시 우연찮게 몰입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에 각자 운명처럼 받아들인 것뿐이다. 이 과정에 개인들의 의도는 개입되지 않으며 이에 따른 특정한 인과관계 역시 설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들은 자신이 상속한 바로 이 일에만 구애되고 각각 꿀벌과 벽돌이라는 사물에 즉卽하면서 스스로 세속과 교유하지 않게 된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78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다시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공장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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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현실로부터 꿈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사라진 것으로, 사람들 간의 대화와 교통으로부터 혼자만의 고독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78

그날 이후, 소녀를 지배한 건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리고 인생의 절대 목표는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거였다. 그녀가 좁은 산골마을을 떠난 것도, 부둣가 도시를 떠나 낙엽처럼 전국을 유랑했던 것도, 그리고 마침내 고래를 닮은 거대한 극장을 지은 것도, 모두가 어릴 때 겪은 엄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02

큰 물고기는 이미 산속에 떨어졌다. 종말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으며 저주는 그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전조는 남쪽에서 온 사내, 금복에게 먼저 찾아왔다. 금복은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 같았으나 곧 그것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드러났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26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36

그것은 토론의 법칙이었다. 지식인이란 부류는 대개 음험한 속셈을 감추고 있어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론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아무하고도 적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대화는 언제나 수박 겉핥기식일 수밖에 없었으며 약장수는 그 점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81

그간 춘희의 수형생활은 침묵과 망각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을 피해 구석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동안 새순처럼 여리고 무구한 춘희의 감성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춘희는 자신의 상처를 어떤 뒤틀린 증오나 교묘한 복수심으로 바꿔내는 술책을 알지 못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치되지 않았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고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엔 고통이 화석처럼 굳게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춘희의 방식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90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갑자기 그 놀라운 세계가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금복은 뭔가 속은 것처럼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오르가슴을 향해 솟아오르다 추락한 것 같은 허망함과 아쉬움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그 순간 그녀는 방금 눈앞에서 펼쳐졌던 그 신기한 세계가 멈추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길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 그렇게 해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과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84

노파는 겁에 질려 쳐다보는 춘희를 보고 썩은 이를 드러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어서 두부를 받으라는 듯 눈짓을 했다. 춘희는 조심스럽게 손으로 두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두부를 베어먹었다. 비릿한 콩냄새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노파는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표정으로 옆에서 춘희가 먹는 양을 지켜보다 어느샌가 함지를 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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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평평하나坪 너른 벌 하나 없고
이름은 집터로되垈 사람 살 집 아니로다
……야, 이 개새끼들아! 그만 좀 짖어!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58

그날, 금복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 구경을 했다. 커다란 스크린에선 사람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제멋대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면서 말을 타고 사막을 달리며 총을 쏘기도 하고 마차 뒤에서 남녀가 서로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 영화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을 가진, 미국美國이란 먼 나라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금복은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과 사방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웅장한 소리가 너무 생생하고 두려운 나머지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내는 손가락 두 개만 남은 손으로 옆자리에 앉아 떨고 있는 금복의 손을 꼭 잡아주었는데, 금복은 영화에 너무 몰입해 있어 자신이 잡고 있는 것이 사내의 손가락인지 발가락인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84

철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평대 사람들의 호구책은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일 수밖에 없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59

그야말로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는 원시적 삶의 형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큰 눈보다는 작은 눈이, 평평한 발보다는 뾰족한 발이 유리해 눈은 점점 작아지고 평평한 발은 우제류偶蹄類의 그것처럼 뾰족해졌으며 질긴 가죽을 씹어 무두질을 하느라 이빨이 한층 더 커지는 한편, 다른 곳보다 일찍 찾아오는 추위를 견디느라 코는 길어지고 얼굴은 더욱 납작해졌다. 그것은 진화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0

평대 사람들의 수직적 삶에 커다란 변화가 닥친 것은 마을에 철도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철도는 수평의 세계였으며 좌우로 뻗어나가는 직선의 세계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0

이런 식으로 일거리를 찾아, 볼거리를 찾아, 기회를 찾아, 건수를 찾아, 신도를 찾아, 짝을 찾아 먼 도시 또는 인근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훗날 평대의 향토사학자들은 이때의 갑작스런 인구팽창을 가리켜 ‘평대의 일차 빅뱅’이라 일컬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1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그녀의 특별한 재능은 바로 그런 한없이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들, 끊임없이 변화하며 덧없이 스러져버리는 세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을 자신의 오감을 통해 감지해내는 것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2

개망초.
그것은 춘희가 금복의 손을 잡고 평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역 주변에 무성하게 피어 있던, 슬픈 듯 날렵하고, 처연한 듯 소박한 꽃의 이름이었다. 이후, 그 꽃은 가는 곳마다 그녀의 뒤를 따라다녀 훗날 그녀가 머물 벽돌공장의 마당 한쪽에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간을 보낼 교도소 담장 밑에도, 그녀가 공장으로 돌아오는 기찻길 옆에도 어김없이 피어 있을 참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3

소위, 근대문명이라고 하는 거대한 물결은 도시를 타고 넘어 바야흐로 평대에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다리가 짧고 발이 뾰족한 평대 사람들은 외지에서 떠들어온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뒤섞여 따로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그들만의 고유한 에토스도 점차 사라져갔다. 평대 사람들은 더이상 나물을 캐지 않았고 올무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지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네안데르탈인처럼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5

따라서 춘희네는 금복이 운영하는 찻집을 가리키는 것임과 동시에 바로 금복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훗날 춘희네는 ‘坪垈茶房평대다방’이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그것은 평대에서 최초로 생긴 다방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7

금복은 생각이 깊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에 충실했으며 자신의 직관을 어리석을 만큼 턱없이 신뢰했다. 그녀는 고래의 이미지에 사로잡혔고 커피에 탐닉했으며 스크린 속에 거침없이 빠져들었고 사랑에 모든 것을 바쳤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8

춘희는 처음부터 금복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삶 안에 들어와 있는 생명체의 존재에게서 낯선 이물감을 느꼈으며 그것을 더없이 불편하게 여겼다. 더구나 춘희가 걱정의 씨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아이를 더욱 멀리했다. 걱정은 한때 자신이 온몸을 바쳐 사랑한 남자였지만 그것은 무지와 혼돈, 식탐과 어리석은 만용, 비극과 불행의 또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8

그런 식으로 춘희는 미처 세상과 가까워지기도 전에 점차 혼자만의 세계로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9

다방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평대 사람들에게 많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주었다. 그것은 마약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으며 오랫동안 그들의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70

두 사람은 그렇게 뜨겁고 아슬아슬하게, 끈적하고 늘큰하게, 두근두근 숨가쁘게, 달아오른 한여름의 대기 속에 들큼한 날숨을 뒤섞으며 거의 반나절이 족히 걸려 남발안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82

그들은 생선장수가 운전하는 노란 사륜차의 짐칸에 실려 평대로 모여들었고 덕분에 평대는 점점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녀의 다방이 더욱 성황을 이룬 것 또한 물론이었다.
드디어 평대의 이차 빅뱅이 시작된 것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3

코끼리 점보는 자기만의 시간대에서 살아갔다. 그는 일 분에 겨우 스물다섯 번밖에 뛰지 않는 심장을 가지고 느릿느릿 움직였으며 춘희 또한, 그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 그들의 세계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지만 대신에 길 한쪽에 비켜서서 질주하는 자동차를 지켜보는 것처럼 점점 더 빨라지는 세상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하루살이의 인생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3

文은 본시 침착하고 과묵하며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사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온갖 물리적 반응과 화학적 변화에 대해 남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매우 뛰어난 장인적 기질을 가지고 있어 금복이 그에게 벽돌공장을 맡긴 것은 꽤나 적절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금복과 종종 갈등을 일으켰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9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6

더구나 생각지도 못했던 벽돌공장이 들어서면서 잠시 주춤했던 뜨내기들이 다시 평대로 발길을 돌리는 통에 평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려, 향토사학자들은 이때를 기차가 처음 들어왔을 때의 갑작스런 인구유입과 구분해 ‘평대의 이차 빅뱅’이라 일컬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13

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죽어지면 썩어질 몸’이란 말을 자주 되뇌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39

사람들 마음속엔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43

금복의 바람기는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목사와의 관계로 시작되었고, 그 이듬해 목사는 소원대로 평대 한복판에 번듯한 예배당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헌금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46

진흙을 만지는 순간, 그녀는 그 축축한 물질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운명적인 일체감을 느꼈으며 알싸한 듯 구수한 흙냄새와 손에 와 닿는 차지고 끈끈한 진흙의 촉감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금 그것은 그 옛날 자신이 태어났던 순간의 마구간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52

한편, 춘희는 곧 文이 한없이 고독하고 슬픈 감정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그녀는 끝내 文의 슬픔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 때문에 文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점보와 함께 공유했던 일종의 연대감과 같은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선 말이 없는 가운데 그렇게 차츰 독특한 부녀관계가 형성되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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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의 말라비틀어진 육체는 점점 더 썩어들어갔다. 그것은 세상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1

이 무렵, 한겨울에 때아닌 꿀벌이 날아들어 평대의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사람들은 뭔가 큰 변괴가 생긴 거라며 두려움에 떨었는데, 뒤이어 한 여자가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는 섬뜩하게도 한쪽 눈이 빠져 달아난 애꾸였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잔주름 하나 없이 백옥처럼 깨끗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것은 여자가 어릴 때부터 꿀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나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1

무릇,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소이연이 생육과 번식일진대, 아무리 세상에 드문 박색이라곤 하지만 그녀도 엄연히 X자 두개를 갖고 태어난 암컷임에는 틀림없었으니 그 특별한 수컷의 기물을 마주하고 어찌 기함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4

다행히 반편이의 딸은 반편이가 아니었다. 얼핏 보면 반편이하고 닮은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쌍꺼풀 진 커다란 눈, 순진한 듯 허무하고 미련한 듯 무심해 보이는 그 눈만큼은 반편이의 것을 빼박은 듯 닮아 있었다. 그것은 유전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1

춘희의 엄마, 금복의 세계라.
평대에 들어오기 전, 금복은 쌍둥이자매가 운영하던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어디론가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스물다섯의 한창 나이였지만 이미 사내라면 신물이 날 만큼 충분히 겪은 후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1

그때부터 그녀를 충동질하고 아무때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게 만드는 그 수상한 바람은, 크고 넓은 것에 무턱으로 매료되는 습관과 더불어 평생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녀가 생선장수의 차에 실려 떠나던 그날 밤도 남쪽에서 그렇게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터덜터덜 산길을 넘던 생선장수의 삼륜차를 스쳐 금복의 아버지가 홀로 달빛과 마주하고 서 있던 저수지를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50

그것은 자신이 살던 집보다 족히 서너 배는 됨직한 거대한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바다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올라 등에서 힘차게 물을 뿜어올렸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51

거대한 장골壯骨의 사내가 참나무처럼 우뚝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복도 눈을 살짝 치켜뜨고 올려다보았다. 팔 척이 넘는 장골의 사내는 두 사람을 모두 덮을 만큼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린 팔뚝은 웬만한 사내의 허벅지보다도 굵어 보였고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적삼 아래 어린애가 뛰어놀아도 좋을 만큼 넓은 뱃구레가 숨을 쉴 때마다 크게 오르내렸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56

그러나 물화物貨의 덧없음이여! 생선장수가 그 모든 것이 한낱 허상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게 마련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63

바다 한복판에서 갑자기 집채만한 물고기가 솟아오른 것이었다. 부두에 처음 도착한 날 목격했던 바로 그 대왕고래였다. 몸길이만도 이십여 장丈에 가까운 고래는 등에 붙어 있는 숨구멍으로 힘차게 물을 뿜어냈다. 분수처럼 뿜어올려진 물은 달빛 속에서 은빛으로 눈부시게 흩어졌다. 그녀의 배 한복판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거대한 생명체가 주는 원초적 감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69

금복과 걱정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변강쇠와 옹녀처럼, 아사달과 아사녀처럼 운명적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그들은 부족함도 더함도 없이 연리지連理枝처럼 서로 단단하게 결합되었고 암나사와 수나사처럼 빈틈없이 꼭 들어맞았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74

그녀가 진정 사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단순한 세계였다. 그녀는 그의 육체를 신뢰했으며 그 거대한 존재 안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행복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77

그것은 무지의 법칙이었다. 금복은 비로소 충만한 기쁨 안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육체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단순함의 비극적 측면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93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생명체가 그렇게 덧없이 고깃덩어리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내장을 다 드러낸 채 해체되어가는 고래의 처지가 마치 걱정과 자신의 처지처럼 여겨져 저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올랐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97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자국은, 영화를 볼 때마다 옆에 앉아 금복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06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부둣가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자국은 매우 과묵한 사내였지만 금복에게만큼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11

과연 객관적 진실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칼자국이 죽어가면서 금복에게 한 말은 과연 진실일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도 인간의 교활함은 여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도 마찬가지, 우리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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