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의 말라비틀어진 육체는 점점 더 썩어들어갔다. 그것은 세상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1

이 무렵, 한겨울에 때아닌 꿀벌이 날아들어 평대의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사람들은 뭔가 큰 변괴가 생긴 거라며 두려움에 떨었는데, 뒤이어 한 여자가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는 섬뜩하게도 한쪽 눈이 빠져 달아난 애꾸였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잔주름 하나 없이 백옥처럼 깨끗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그것은 여자가 어릴 때부터 꿀을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나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1

무릇, 생명 가진 모든 존재의 소이연이 생육과 번식일진대, 아무리 세상에 드문 박색이라곤 하지만 그녀도 엄연히 X자 두개를 갖고 태어난 암컷임에는 틀림없었으니 그 특별한 수컷의 기물을 마주하고 어찌 기함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4

다행히 반편이의 딸은 반편이가 아니었다. 얼핏 보면 반편이하고 닮은 데라고는 한 군데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쌍꺼풀 진 커다란 눈, 순진한 듯 허무하고 미련한 듯 무심해 보이는 그 눈만큼은 반편이의 것을 빼박은 듯 닮아 있었다. 그것은 유전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31

춘희의 엄마, 금복의 세계라.
평대에 들어오기 전, 금복은 쌍둥이자매가 운영하던 술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어디론가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스물다섯의 한창 나이였지만 이미 사내라면 신물이 날 만큼 충분히 겪은 후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41

그때부터 그녀를 충동질하고 아무때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게 만드는 그 수상한 바람은, 크고 넓은 것에 무턱으로 매료되는 습관과 더불어 평생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녀가 생선장수의 차에 실려 떠나던 그날 밤도 남쪽에서 그렇게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터덜터덜 산길을 넘던 생선장수의 삼륜차를 스쳐 금복의 아버지가 홀로 달빛과 마주하고 서 있던 저수지를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50

그것은 자신이 살던 집보다 족히 서너 배는 됨직한 거대한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바다 한복판에서 불쑥 솟아올라 등에서 힘차게 물을 뿜어올렸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51

거대한 장골壯骨의 사내가 참나무처럼 우뚝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복도 눈을 살짝 치켜뜨고 올려다보았다. 팔 척이 넘는 장골의 사내는 두 사람을 모두 덮을 만큼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린 팔뚝은 웬만한 사내의 허벅지보다도 굵어 보였고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적삼 아래 어린애가 뛰어놀아도 좋을 만큼 넓은 뱃구레가 숨을 쉴 때마다 크게 오르내렸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56

그러나 물화物貨의 덧없음이여! 생선장수가 그 모든 것이 한낱 허상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게 마련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63

바다 한복판에서 갑자기 집채만한 물고기가 솟아오른 것이었다. 부두에 처음 도착한 날 목격했던 바로 그 대왕고래였다. 몸길이만도 이십여 장丈에 가까운 고래는 등에 붙어 있는 숨구멍으로 힘차게 물을 뿜어냈다. 분수처럼 뿜어올려진 물은 달빛 속에서 은빛으로 눈부시게 흩어졌다. 그녀의 배 한복판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거대한 생명체가 주는 원초적 감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69

금복과 걱정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변강쇠와 옹녀처럼, 아사달과 아사녀처럼 운명적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그들은 부족함도 더함도 없이 연리지連理枝처럼 서로 단단하게 결합되었고 암나사와 수나사처럼 빈틈없이 꼭 들어맞았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74

그녀가 진정 사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단순한 세계였다. 그녀는 그의 육체를 신뢰했으며 그 거대한 존재 안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행복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77

그것은 무지의 법칙이었다. 금복은 비로소 충만한 기쁨 안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육체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단순함의 비극적 측면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93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생명체가 그렇게 덧없이 고깃덩어리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사람들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내장을 다 드러낸 채 해체되어가는 고래의 처지가 마치 걱정과 자신의 처지처럼 여겨져 저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올랐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97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그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자국은, 영화를 볼 때마다 옆에 앉아 금복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06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부둣가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자국은 매우 과묵한 사내였지만 금복에게만큼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11

과연 객관적 진실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칼자국이 죽어가면서 금복에게 한 말은 과연 진실일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도 인간의 교활함은 여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도 마찬가지, 우리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