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평평하나坪 너른 벌 하나 없고
이름은 집터로되垈 사람 살 집 아니로다
……야, 이 개새끼들아! 그만 좀 짖어!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58

그날, 금복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 구경을 했다. 커다란 스크린에선 사람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제멋대로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면서 말을 타고 사막을 달리며 총을 쏘기도 하고 마차 뒤에서 남녀가 서로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 영화는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을 가진, 미국美國이란 먼 나라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금복은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과 사방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웅장한 소리가 너무 생생하고 두려운 나머지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내는 손가락 두 개만 남은 손으로 옆자리에 앉아 떨고 있는 금복의 손을 꼭 잡아주었는데, 금복은 영화에 너무 몰입해 있어 자신이 잡고 있는 것이 사내의 손가락인지 발가락인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84

철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평대 사람들의 호구책은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일 수밖에 없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59

그야말로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는 원시적 삶의 형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큰 눈보다는 작은 눈이, 평평한 발보다는 뾰족한 발이 유리해 눈은 점점 작아지고 평평한 발은 우제류偶蹄類의 그것처럼 뾰족해졌으며 질긴 가죽을 씹어 무두질을 하느라 이빨이 한층 더 커지는 한편, 다른 곳보다 일찍 찾아오는 추위를 견디느라 코는 길어지고 얼굴은 더욱 납작해졌다. 그것은 진화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0

평대 사람들의 수직적 삶에 커다란 변화가 닥친 것은 마을에 철도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철도는 수평의 세계였으며 좌우로 뻗어나가는 직선의 세계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0

이런 식으로 일거리를 찾아, 볼거리를 찾아, 기회를 찾아, 건수를 찾아, 신도를 찾아, 짝을 찾아 먼 도시 또는 인근마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훗날 평대의 향토사학자들은 이때의 갑작스런 인구팽창을 가리켜 ‘평대의 일차 빅뱅’이라 일컬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1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그녀의 특별한 재능은 바로 그런 한없이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들, 끊임없이 변화하며 덧없이 스러져버리는 세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을 자신의 오감을 통해 감지해내는 것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2

개망초.
그것은 춘희가 금복의 손을 잡고 평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역 주변에 무성하게 피어 있던, 슬픈 듯 날렵하고, 처연한 듯 소박한 꽃의 이름이었다. 이후, 그 꽃은 가는 곳마다 그녀의 뒤를 따라다녀 훗날 그녀가 머물 벽돌공장의 마당 한쪽에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간을 보낼 교도소 담장 밑에도, 그녀가 공장으로 돌아오는 기찻길 옆에도 어김없이 피어 있을 참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3

소위, 근대문명이라고 하는 거대한 물결은 도시를 타고 넘어 바야흐로 평대에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다리가 짧고 발이 뾰족한 평대 사람들은 외지에서 떠들어온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뒤섞여 따로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그들만의 고유한 에토스도 점차 사라져갔다. 평대 사람들은 더이상 나물을 캐지 않았고 올무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지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네안데르탈인처럼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5

따라서 춘희네는 금복이 운영하는 찻집을 가리키는 것임과 동시에 바로 금복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훗날 춘희네는 ‘坪垈茶房평대다방’이란 간판을 내걸었는데, 그것은 평대에서 최초로 생긴 다방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7

금복은 생각이 깊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에 충실했으며 자신의 직관을 어리석을 만큼 턱없이 신뢰했다. 그녀는 고래의 이미지에 사로잡혔고 커피에 탐닉했으며 스크린 속에 거침없이 빠져들었고 사랑에 모든 것을 바쳤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8

춘희는 처음부터 금복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삶 안에 들어와 있는 생명체의 존재에게서 낯선 이물감을 느꼈으며 그것을 더없이 불편하게 여겼다. 더구나 춘희가 걱정의 씨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아이를 더욱 멀리했다. 걱정은 한때 자신이 온몸을 바쳐 사랑한 남자였지만 그것은 무지와 혼돈, 식탐과 어리석은 만용, 비극과 불행의 또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8

그런 식으로 춘희는 미처 세상과 가까워지기도 전에 점차 혼자만의 세계로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69

다방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평대 사람들에게 많은 새로운 경험을 제공해주었다. 그것은 마약만큼이나 강렬한 것이었으며 오랫동안 그들의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70

두 사람은 그렇게 뜨겁고 아슬아슬하게, 끈적하고 늘큰하게, 두근두근 숨가쁘게, 달아오른 한여름의 대기 속에 들큼한 날숨을 뒤섞으며 거의 반나절이 족히 걸려 남발안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도착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182

그들은 생선장수가 운전하는 노란 사륜차의 짐칸에 실려 평대로 모여들었고 덕분에 평대는 점점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녀의 다방이 더욱 성황을 이룬 것 또한 물론이었다.
드디어 평대의 이차 빅뱅이 시작된 것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3

코끼리 점보는 자기만의 시간대에서 살아갔다. 그는 일 분에 겨우 스물다섯 번밖에 뛰지 않는 심장을 가지고 느릿느릿 움직였으며 춘희 또한, 그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 그들의 세계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었지만 대신에 길 한쪽에 비켜서서 질주하는 자동차를 지켜보는 것처럼 점점 더 빨라지는 세상의 변화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하루살이의 인생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3

文은 본시 침착하고 과묵하며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사물에 대한 꼼꼼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온갖 물리적 반응과 화학적 변화에 대해 남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매우 뛰어난 장인적 기질을 가지고 있어 금복이 그에게 벽돌공장을 맡긴 것은 꽤나 적절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금복과 종종 갈등을 일으켰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9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06

더구나 생각지도 못했던 벽돌공장이 들어서면서 잠시 주춤했던 뜨내기들이 다시 평대로 발길을 돌리는 통에 평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려, 향토사학자들은 이때를 기차가 처음 들어왔을 때의 갑작스런 인구유입과 구분해 ‘평대의 이차 빅뱅’이라 일컬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13

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죽어지면 썩어질 몸’이란 말을 자주 되뇌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39

사람들 마음속엔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43

금복의 바람기는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목사와의 관계로 시작되었고, 그 이듬해 목사는 소원대로 평대 한복판에 번듯한 예배당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헌금의 법칙이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46

진흙을 만지는 순간, 그녀는 그 축축한 물질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운명적인 일체감을 느꼈으며 알싸한 듯 구수한 흙냄새와 손에 와 닿는 차지고 끈끈한 진흙의 촉감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금 그것은 그 옛날 자신이 태어났던 순간의 마구간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52

한편, 춘희는 곧 文이 한없이 고독하고 슬픈 감정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그녀는 끝내 文의 슬픔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 때문에 文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점보와 함께 공유했던 일종의 연대감과 같은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선 말이 없는 가운데 그렇게 차츰 독특한 부녀관계가 형성되었다.

-알라딘 eBook <고래 - 한국문학전집 019> (천명관 지음) 중에서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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