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산책의 끝은 언제나 앨리스의 다락방이었다. 부암동 초입에서 골목길 안쪽까지 종아리가 좀 땅긴다 싶은 정도로 걸어가면 나오는 모퉁이의, 전혀 앨리스처럼 보이지 않는 중년 부인이 10월 하순의 은행잎보다도 더 샛노란 카레를 끓여주는 이층 카페였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5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계단 바로 뒤 창가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그 자리로는 늘 하오의 성기고 바랜 빛이 비스듬하게 드리워졌다. 원목 테이블 위 가지런히 놓인 아이비와 산호수와 포인세티아의 초록과 빨강은 저녁을 앞두고서야 또렷해졌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5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앨리스인가요?"
지훈이 카페 주인에게 물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Alice’s Attic〉이란 단편영화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Alice’s Attic. 지훈은 기억하기로 했다.
"자기 안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못 봐요."
"네?"
"그 영화가 그런 내용이에요."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6

서른한 살에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는 "튤립은 맨 먼저 너무 빨개서,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썼고, 무대의 모리타 도지는 죽은 친구를 기억하기 위해 검은 선글라스를 한 번도 벗지 않았으며, 기억을 모두 지운다고 해도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미셸 공드리는 영화를 찍었다는 것을 지훈은 전혀 몰랐을 뻔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7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72

그처럼 내 안에는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들, 아무런 쓸모도 없는 말들이 가득하네요. 끝내 부치지 못할 이 편지에 적힌 단어들처럼. 그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말은, 그때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던, 하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게 된 그 말, 한때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는 말할 수 있었으나 이제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 말,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 그리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부디 잘 지내고, 잘 지내시길.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74

주석에는 할아버지가 번역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라벨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적혀 있었다.

육체는 우리 외에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협소한 영역 안에 우리를 가둬버린다. 그러나 영적 삶은 이와 반대로, 우리를 존재하는 것의 공통적인 첫 시원으로 이끌어간다. 또한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82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했다. 덕분에 책은 우리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83

‘여아가 항행하여 무화하면 기식우지진부재리오如我恒幸無禍, 豈識友之眞否哉’라면 리마두의 그 책에 나오는 문장으로, ‘만약 내게 항상 행복만 있고 불행이 없다면 어찌 벗의 참되고 거짓됨을 알 수 있으리오’라는 뜻인데, 그 몇 년 뒤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이승훈이며 이벽이며 정약용 형제들은 그 문장이 가리키는 바를 온몸으로 절감하게 되지. 추국청에서 고문을 받으며 한때의 벗이었던 그들이 서로를 부인하고 고발하는 중심에 정약용이 있었어.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85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91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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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는 태양이 지나가는 길이고, 별자리는 항상 같은 곳에 있는데 지구가 자전할 때 팽이처럼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스르르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가 하느라고 기준 면이 아주 조금씩 바뀌니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별자리 위치가 오늘날은 조금 틀어져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짐작 섞인 설명은 시작한 지 십오 초 이상 지나면 정적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기능이 있다. 상대방은 이미 내가 앉아 있는 뒤쪽 벽의 무늬를 감상하는 중이고, 나는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8

연주시차였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매년 한 바퀴씩 돌면서, 이쪽 끝에 있을 때와 반대쪽 끝에 있을 때 별의 위치가 약간 다르게 보인다. 마치 왼쪽 눈만 뜨고 볼 때와 오른쪽 눈만 뜨고 볼 때 책상 위 물건의 위치가 달라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0

별도 마찬가지다. 멀리 있으면 지구가 6개월에 한 번씩 오른쪽 왼쪽에서 본다고 해도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있는 별은 위치가 달라 보인다. 반대로 말하자면 시차가 클수록 가까운 별이다. 지구가 일 년 동안 더 큰 원을 그리며 돈다면 별의 연주시차는 더 클 것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1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3

대기를 구성하는 물질의 스펙트럼을 보면, 각자 정해진 파장에서 삐죽삐죽 방출선을 내보인다. 얼핏 보면 바코드처럼 보이는데, 역할도 바코드와 비슷하다. 어떤 물질이 어떤 온도와 압력 상황에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물론 ‘띡’ 찍어서 바로 정보가 나오지는 않는다. 다양한 물질이 한데 섞여 있으니 누구누구의 방출선인지 한눈에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런 면에서 스펙트럼은 『어린 왕자』의 ‘모자 그림’과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스펙트럼을 분석한다는 것은 그 그림 안에 들어 있는 보아뱀과 코끼리의 피부색과 자세와 몸무게와 나이를 알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샘플을 하나씩 맞춰보는 것과 비슷한 작업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8

카시니 탐사선이 토성 궤도에 도착해 새로운 데이터를 쏟아내고 있는데, 분석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했다. 타이탄은 토성의 위성인데, 지구와 비슷한 환경인데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유기물질이 많아 카시니의 주요 탐사 대상 중 하나였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19

카시니는 1997년 지구를 떠나 여러 행성을 경유하며 약 7년간의 항해 끝에 토성 궤도에 도착했다. 인류가 타이탄을 탐사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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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돌아올 곳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돌아올 곳 없이 떠나는 여행은 방황이다. - <여행선언문>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65568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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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공책에 받아 적은 끔찍한 글을 읽고 난 뒤에도 저를 이해해준 사람은 아빠뿐이었어요. 사람의 마음을 연구한다는 선생님도 저를 이해하려고 애썼을 뿐이지 이해하진 못하셨잖아요.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70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이해만 있었죠.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0

다시, 깨어날 때는 귀부터 깨어난다. 죽을 때 마지막으로 청력이 사라지듯이. 어둠 속 저 멀리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면서 그의 의식이 돌아왔다.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였다. 눈을 살짝 뜨자 하얀 커튼이 보였다. 몸을 돌리니 창문 너머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하오의 빛은 말 그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3

그냥 서로 궁금한 것을 묻고 아는 만큼 대답했을 뿐인데, 어쩐지 그 대화가 서글프게 들린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르갈. 캇땀 호 가야. 이제 그렇게 된 거야?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자신에게 말을 거는 줄 알았는지 자르갈이 "예?" 하고 물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자신이 "자르갈, 캇땀 호 가야"라고 외친대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7

고비사막에서 보는 하늘에는 시간적인 광대함도 담겨 있었다. 밤이 되자 어둠 속에서 고대의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사시대, 혹은 아직 인간이 지구에 나타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하늘. 별들만이 가득한 하늘. 광활하게 펼쳐진 공간처럼 시간 역시 계속 뻗어나갔다. 과거로, 더 먼 과거로, 시간이 시작되던 그 순간까지. 그렇게 시간은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깊어졌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사막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에서 본 ‘깊은 시간deep time’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깊은 시간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8

"밤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로, 밤은 밤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인간은 백오십 리 높이의 대기권에 짓눌려 그 육체적 기관이 저녁이면 피로하게 된다. 피로해진 인간은 누워 휴식한다. 육체의 눈이 감기는 바로 그 순간, 생각보다 그리 무기력하지 않은 머릿속에서 또하나의 다른 눈이 열린다. 미지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모르고 지내던 세계의 어두운 사물들이 인간의 이웃이 된다"라고 빅토르 위고는 『바다의 일꾼들』에서 썼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9

이 미래의, 두렵지만 우리를 매혹시키는 아름다움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건 우리에게 밤이 찾아와 피로해진 우리 육체가 잠들 때다. 과거라는 이름의 유령들은 잠든 우리 곁을 지키지만, 이제 우리는 거기에 없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깨어난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9

"이를 응시하는 우리 앞에는 우리의 삶과는 다른 삶이, 우리 자신들 그리고 다른 것으로 이뤄져 있는 또다른 삶이 응집되고 해체된다. 완전히 통찰하는 견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의식적이지도 않은 잠자는 사람은 이상한 동물, 기이한 식물, 끔찍하기도 하고 기분좋기도 한 유령들, 유충들, 가면들, 형상들, 히드라, 혼란, 달이 없는 달빛, 경이로움의 어두운 해체, 커지고 작아지며 동요하는 두꺼운 층, 어둠 속에서 떠다니는 형태들, 우리가 몽상이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라 할 수 있는 이 모든 신비를 언뜻 본다.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91

그 밤은 한숨도 못 잤지만 잠시도 깨어 있지 않았던, 이상한 밤이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어 창밖이 밝아지는 것을 보자 그에게 묘한 감동이 찾아왔다. 더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절망하던 지난밤과 달리 병원에 가기보다는 잠을 좀 자면 더 바랄 게 없다는 느긋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러면서 이상한 확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은 울란바토르의 한 호스텔 방에서 죽기로 돼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침대에 누워 정미를 보고 있었다. 오래전의 그녀를. 젊다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던 시절의 그녀를. 그리고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라는, 그 시절 노래방에 가면 다들 합창하던 그 노래 가사처럼 젊고 서로 사랑을 하기 전의 두 사람을. 그러니까 그녀를, 그리고 그녀 옆에 선 자신을. 거기에는 어떤 후회도, 두려움도 없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03

정미는 새벽별처럼 짧은 시간 동안 지구에서 살다가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졌다. 분명 서로의 육체에 가닿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건만, 그리고 그때는 거기 정미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05

기쁨으로 탄생을 확인해준 사람처럼, 슬픔으로 죽음을 확인해줄 사람.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은 인식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유예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09

명준이 이제는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얼굴은 유동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과거의 얼굴에서 미래의 얼굴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게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도. 배우는 표정으로 그 시간적 간극을 압축해 조명 아래에서 드러내 보인다. 현재의 얼굴에 과거를, 또 미래를 모두 담고서. 얼굴의 유동적 가능성을 믿지 않으면 연기는 불가능하다. 무대에 오르기 전, 배우의 얼굴은 빈 캔버스와 같아야 한다. 젊음과 늙음,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이 공존하는 가능성의 얼굴. 그러다가 번개의 번쩍임에 의해 어둠 속의 얼굴이 일순간 드러나듯이 연기를 통해 어떤 표정이 노출된다. 인식적 클로즈업. 그리고 알아봄. 그 모든 사랑의 발생학.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17

명준은 그렇게 상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 울음은, 말하자면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의 울음이었다.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 없는 첫 여름을 그는 영영 떠나보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29

1958년 뉴욕 시그램 빌딩의 고급 레스토랑인 포 시즌스의 벽에 걸 그림들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은 마크 로스코는 약 일 년 동안 삼십 점에 달하는, 훗날 ‘시그램 벽화’로 불리는 연작들을 그렸다. 나중에 레스토랑을 방문한 그는 그 공간이 자신의 그림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계약금을 돌려준 뒤, 그 프로젝트를 더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이 연작들은 지금 세 군데 갤러리에 흩어져 있는데, 런던의 테이트미술관과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 그리고 우리가 찾아간 가와무라기념미술관이었다. 그때 우리는 거기 로스코의 방에 앉아 나머지 그림도 모두 같이 보자는, 여태 이뤄지지 못한, 그리고 아마도 영영 이뤄지지 않을 약속을 했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37

"우리에게는 아직도 지켜볼 꽃잎이 많이 남아 있다. 나는 그 꽃잎 하나하나를 벌써부터 기억하고 있다는 걸 네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 뿐."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50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50

그건 어쩐지 리나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모든 게 눈부셨던 그해 봄, 오니리오를 지훈에게 선물한 사람이 그녀였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봄은 길지 않았다. 네스프레소 한정판 캡슐 커피 소사小史에 빗대어 말하자면, 리나와 지훈은 잘라야트라 이후에 만나서 크레알토 이전에 헤어졌고, 이제는 서로 애써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됐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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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는 1852년 임자생으로 만 열네 살에 황위에 올라서 재위 사십 년을 넘기고 있었다.

성인이 남면해서 천하의 소리를 듣고聖人南面而聽天下

밝음을 향해 나아가며 다스린다嚮明而治

라는 중국의 『역경易經』에서 명明, 치治 두 글자를 따서 치세의 연호로 삼았는데 사람들은 ‘밝음을 향해 나아간다嚮明’는 뜻으로 천황을 호칭했다. 메이지의 치세는 힘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시대에 밝음은 힘을 따라오는 것처럼 보였고, 시대는 그 힘을 믿었다. 천황의 군대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이겼다. 천황의 무위武威는 세계에 떨쳤고, 아시아의 산과 바다에 시체가 쌓였다. 천황은 신사에 나아가서 여러 전선의 승리를 열조에게 고했고, 꽃잎처럼 떨어진 충혼들을 진무賑撫했다. 천황은 사해四海가 평온하고 백성들의 삶이 아늑하기를 기원했다. 천황이 신사에 참배할 때 삼엄하고 슬픈 기운이 당내에 가득찼다고 사관은 기록했다. - <하얼빈>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512 - P10

이토의 침대 발치에는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항에 건설되었던 파로스 등대의 모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토가 주물 장인에게 의뢰해서 제작한 청동제 스탠드였다. 모형 등대에 수면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양과 서양, 대양과 대양을 연결하는 이 문명사적인 항구의 옛 등대를 이토는 거룩히 여겼다. 그것은 이 세상 전체를 기호로 연결해서 재편성하는 힘의 핵심부였다. 신호로써 함대를 움직이고 신호로써 대양을 건너가는 기술은 바로 제국이 갖추어야 할 힘의 본질이라고 이토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 <하얼빈>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512 - P18

도장을 찍어서 한 나라의 통치권을 스스로 넘긴다는 것은 보도 듣도 못한 일이었으나, 조선의 대신들은 국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직함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 <하얼빈>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512 - P20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 <하얼빈>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512 - P21

아이가 젖을 자주 토해서, 김아려의 몸에서 젖 삭은 냄새가 났다. 아이의 몸과 어미의 몸이 섞인 냄새였다. 냄새는 깊고 아득했다. 안중근은 그 냄새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 슬픔은 한 생명의 아비가 되고 어미가 되는 일의 근본인 것 같았다. - <하얼빈>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512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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