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산책의 끝은 언제나 앨리스의 다락방이었다. 부암동 초입에서 골목길 안쪽까지 종아리가 좀 땅긴다 싶은 정도로 걸어가면 나오는 모퉁이의, 전혀 앨리스처럼 보이지 않는 중년 부인이 10월 하순의 은행잎보다도 더 샛노란 카레를 끓여주는 이층 카페였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5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계단 바로 뒤 창가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그 자리로는 늘 하오의 성기고 바랜 빛이 비스듬하게 드리워졌다. 원목 테이블 위 가지런히 놓인 아이비와 산호수와 포인세티아의 초록과 빨강은 저녁을 앞두고서야 또렷해졌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5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앨리스인가요?"
지훈이 카페 주인에게 물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Alice’s Attic〉이란 단편영화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Alice’s Attic. 지훈은 기억하기로 했다.
"자기 안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못 봐요."
"네?"
"그 영화가 그런 내용이에요."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6

서른한 살에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는 "튤립은 맨 먼저 너무 빨개서,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썼고, 무대의 모리타 도지는 죽은 친구를 기억하기 위해 검은 선글라스를 한 번도 벗지 않았으며, 기억을 모두 지운다고 해도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미셸 공드리는 영화를 찍었다는 것을 지훈은 전혀 몰랐을 뻔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7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72

그처럼 내 안에는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들, 아무런 쓸모도 없는 말들이 가득하네요. 끝내 부치지 못할 이 편지에 적힌 단어들처럼. 그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말은, 그때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던, 하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게 된 그 말, 한때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는 말할 수 있었으나 이제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 말,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 그리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부디 잘 지내고, 잘 지내시길.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74

주석에는 할아버지가 번역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라벨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적혀 있었다.

육체는 우리 외에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협소한 영역 안에 우리를 가둬버린다. 그러나 영적 삶은 이와 반대로, 우리를 존재하는 것의 공통적인 첫 시원으로 이끌어간다. 또한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82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했다. 덕분에 책은 우리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83

‘여아가 항행하여 무화하면 기식우지진부재리오如我恒幸無禍, 豈識友之眞否哉’라면 리마두의 그 책에 나오는 문장으로, ‘만약 내게 항상 행복만 있고 불행이 없다면 어찌 벗의 참되고 거짓됨을 알 수 있으리오’라는 뜻인데, 그 몇 년 뒤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이승훈이며 이벽이며 정약용 형제들은 그 문장이 가리키는 바를 온몸으로 절감하게 되지. 추국청에서 고문을 받으며 한때의 벗이었던 그들이 서로를 부인하고 고발하는 중심에 정약용이 있었어.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85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91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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