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공책에 받아 적은 끔찍한 글을 읽고 난 뒤에도 저를 이해해준 사람은 아빠뿐이었어요. 사람의 마음을 연구한다는 선생님도 저를 이해하려고 애썼을 뿐이지 이해하진 못하셨잖아요.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70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이해만 있었죠.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0

다시, 깨어날 때는 귀부터 깨어난다. 죽을 때 마지막으로 청력이 사라지듯이. 어둠 속 저 멀리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면서 그의 의식이 돌아왔다.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였다. 눈을 살짝 뜨자 하얀 커튼이 보였다. 몸을 돌리니 창문 너머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빛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하오의 빛은 말 그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3

그냥 서로 궁금한 것을 묻고 아는 만큼 대답했을 뿐인데, 어쩐지 그 대화가 서글프게 들린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르갈. 캇땀 호 가야. 이제 그렇게 된 거야?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자신에게 말을 거는 줄 알았는지 자르갈이 "예?" 하고 물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자신이 "자르갈, 캇땀 호 가야"라고 외친대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7

고비사막에서 보는 하늘에는 시간적인 광대함도 담겨 있었다. 밤이 되자 어둠 속에서 고대의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사시대, 혹은 아직 인간이 지구에 나타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하늘. 별들만이 가득한 하늘. 광활하게 펼쳐진 공간처럼 시간 역시 계속 뻗어나갔다. 과거로, 더 먼 과거로, 시간이 시작되던 그 순간까지. 그렇게 시간은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깊어졌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사막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에서 본 ‘깊은 시간deep time’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깊은 시간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8

"밤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로, 밤은 밤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인간은 백오십 리 높이의 대기권에 짓눌려 그 육체적 기관이 저녁이면 피로하게 된다. 피로해진 인간은 누워 휴식한다. 육체의 눈이 감기는 바로 그 순간, 생각보다 그리 무기력하지 않은 머릿속에서 또하나의 다른 눈이 열린다. 미지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모르고 지내던 세계의 어두운 사물들이 인간의 이웃이 된다"라고 빅토르 위고는 『바다의 일꾼들』에서 썼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9

이 미래의, 두렵지만 우리를 매혹시키는 아름다움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건 우리에게 밤이 찾아와 피로해진 우리 육체가 잠들 때다. 과거라는 이름의 유령들은 잠든 우리 곁을 지키지만, 이제 우리는 거기에 없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깨어난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89

"이를 응시하는 우리 앞에는 우리의 삶과는 다른 삶이, 우리 자신들 그리고 다른 것으로 이뤄져 있는 또다른 삶이 응집되고 해체된다. 완전히 통찰하는 견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의식적이지도 않은 잠자는 사람은 이상한 동물, 기이한 식물, 끔찍하기도 하고 기분좋기도 한 유령들, 유충들, 가면들, 형상들, 히드라, 혼란, 달이 없는 달빛, 경이로움의 어두운 해체, 커지고 작아지며 동요하는 두꺼운 층, 어둠 속에서 떠다니는 형태들, 우리가 몽상이라고 부르는, 보이지 않는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라 할 수 있는 이 모든 신비를 언뜻 본다. 꿈은 밤의 수족관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91

그 밤은 한숨도 못 잤지만 잠시도 깨어 있지 않았던, 이상한 밤이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어 창밖이 밝아지는 것을 보자 그에게 묘한 감동이 찾아왔다. 더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절망하던 지난밤과 달리 병원에 가기보다는 잠을 좀 자면 더 바랄 게 없다는 느긋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러면서 이상한 확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은 울란바토르의 한 호스텔 방에서 죽기로 돼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침대에 누워 정미를 보고 있었다. 오래전의 그녀를. 젊다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던 시절의 그녀를. 그리고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라는, 그 시절 노래방에 가면 다들 합창하던 그 노래 가사처럼 젊고 서로 사랑을 하기 전의 두 사람을. 그러니까 그녀를, 그리고 그녀 옆에 선 자신을. 거기에는 어떤 후회도, 두려움도 없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03

정미는 새벽별처럼 짧은 시간 동안 지구에서 살다가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졌다. 분명 서로의 육체에 가닿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시절이 두 사람에게도 있었건만, 그리고 그때는 거기 정미가 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모든 게 의심스러워졌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05

기쁨으로 탄생을 확인해준 사람처럼, 슬픔으로 죽음을 확인해줄 사람.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은 인식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유예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09

명준이 이제는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얼굴은 유동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과거의 얼굴에서 미래의 얼굴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게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도. 배우는 표정으로 그 시간적 간극을 압축해 조명 아래에서 드러내 보인다. 현재의 얼굴에 과거를, 또 미래를 모두 담고서. 얼굴의 유동적 가능성을 믿지 않으면 연기는 불가능하다. 무대에 오르기 전, 배우의 얼굴은 빈 캔버스와 같아야 한다. 젊음과 늙음,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이 공존하는 가능성의 얼굴. 그러다가 번개의 번쩍임에 의해 어둠 속의 얼굴이 일순간 드러나듯이 연기를 통해 어떤 표정이 노출된다. 인식적 클로즈업. 그리고 알아봄. 그 모든 사랑의 발생학.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17

명준은 그렇게 상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 울음은, 말하자면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의 울음이었다.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 없는 첫 여름을 그는 영영 떠나보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29

1958년 뉴욕 시그램 빌딩의 고급 레스토랑인 포 시즌스의 벽에 걸 그림들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은 마크 로스코는 약 일 년 동안 삼십 점에 달하는, 훗날 ‘시그램 벽화’로 불리는 연작들을 그렸다. 나중에 레스토랑을 방문한 그는 그 공간이 자신의 그림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계약금을 돌려준 뒤, 그 프로젝트를 더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이 연작들은 지금 세 군데 갤러리에 흩어져 있는데, 런던의 테이트미술관과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 그리고 우리가 찾아간 가와무라기념미술관이었다. 그때 우리는 거기 로스코의 방에 앉아 나머지 그림도 모두 같이 보자는, 여태 이뤄지지 못한, 그리고 아마도 영영 이뤄지지 않을 약속을 했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37

"우리에게는 아직도 지켜볼 꽃잎이 많이 남아 있다. 나는 그 꽃잎 하나하나를 벌써부터 기억하고 있다는 걸 네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 뿐."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50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50

그건 어쩐지 리나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모든 게 눈부셨던 그해 봄, 오니리오를 지훈에게 선물한 사람이 그녀였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봄은 길지 않았다. 네스프레소 한정판 캡슐 커피 소사小史에 빗대어 말하자면, 리나와 지훈은 잘라야트라 이후에 만나서 크레알토 이전에 헤어졌고, 이제는 서로 애써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됐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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