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은 결혼은 제도로서 중요하다는 것, 그러나 사랑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 제도의 유지를 위해 사랑은 왜곡되고 희생을 강요받았다. 결혼은 사랑이 전혀 관여하지 않거나 아주 조금밖에 관여하지 않는 분야이다. 전혀 다른 층위에 있는 둘을 섞어 인과관계로 연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74

그의 아버지는 그가 중학생일 때 집을 나갔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던 날의 기억이 파편적인 이미지들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하지만 잘되지 않아서 아버지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말인가가 담긴 눈으로 아버지는 그를 오래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그의 손을 쥐었을 때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떨고 있는 손이 아버지의 것인지 자기 것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떨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자기가 떨어야 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는 그 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했다. 그는 불편함을 털어내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고, 그래도 불편이 털어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살그머니 손을 빼냈다. 아버지는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떨어질 수 있었다.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한참 만에 나온 아버지의 목소리가 불규칙하게 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면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고 싶은지 모른다. "언젠가 아버지를 이해하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남기고 트렁크를 끌고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남아 있다. 아버지는 매우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빠져나갔다. 흡사 달아나는 것 같았다고 그의 기억은 말한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그 모습에 쓸쓸함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기억한다. 달아나는 사람의 쓸쓸함이라니.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79

이 모순의 문장은 기억에 스며 있는 욕망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한 남자가 트렁크를 들고 대문을 나섰다. 이것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이다. ‘달아나는 것 같았다’와 ‘쓸쓸함’은 그 이미지에 덧붙여진 것이다. 그것들은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목격한 자, 더 나아가 그것을 진술하는 자의 심상에 새겨진 인상이다. 기억하는 자의 욕망이 행위자의 행위를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형배의 기억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이해하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타협의 곡예를 벌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79

사랑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강요하지 않는데도 강요받는 것이다. 강요하는 이는 없고 강요받는 이만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발화(發話)된다. 누구도 사랑한다는 말을 발화할 수는 없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93

그가 그 말을 할 때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조교가 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가 쿡 소리를 내며 웃기 전에 준호는 이미 그녀를 보았다.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소박하고 은은한 향기를 맡았는데, 그것이 그 방의 주인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걸 직감적으로 파악했었다. 실제로 그 방에 그런 향의 꽃이 놓여 있거나 그런 향의 향수가 뿌려져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가 그녀의 용모를 소박하고 은은한 향기로 파악했다고 하는 편이 아마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방에는 꽃이 없었고,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그녀는 어떤 향수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뿜는 향기에 끌렸다는 것이 이 상황에 맞는 진술이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109

선택은 언제나 배제를 전제한다. 배제를 통하지 않고 선택하는 건 불가능하다. 선택이 곧 배제의 방법이다. 배제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택하기 위해서는 배제가 불가피하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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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공간, 혹은 의미와 지시의 공간이 시적 공간이 되는 순간은 일상의 공간, 의미의 공간이 옷을 입기 시작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시가 일어서게 될 때 거기 이미지와 일상의 공간 사이에는 묘한 변화의 기운이 감지됩니다. 이미지에 날개가 달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미지의 살이 부풀기 시작한다고나 할는지. 날개가 달린 부푼 이미지는 달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미지와 내가 서 있는 공간 사이에서 ‘틈’은 커지고 나의 언어도 날개를 달기 시작합니다. 날개가 달린 이미지는 공간 밖으로, 또는 나의 아주 깊은 곳, 심연을 향하여 날기 시작합니다. 이미지의 공간과 ‘틈’의 공간이 동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33

나는 ‘비알’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언제나처럼 부질없이 사라지기 위하여, 또는 스밀 수 있는 한 무엇엔가 스미기 위하여 이곳에 도착하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소리 없는 어느 곳의 죽음처럼, 지금도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을 지구 위의 사랑의 무저항의 종말처럼, 뜻 없이 뜻 없이 창에 맺히는 비알들, 얌전한 살갗들마다 소름이 돋아 오르게 하고 그 축축한 냄새로 기억을 흐리게 하는 비알들.

한 방울의 ‘비알’은 우주이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46

이상한 모자 가게였다. 마땅한 계단도 없는, 마땅한 길도 없는, 물론 문도 없는, 겨우 찾아낸, 한구석에 박혀 있는 엘리베이터는 너무 낡아서 덜컹덜컹거리던, 그러나 어느 순간, 프랑스풍의 귀족적인 비로드 장식의 모자들이 불쑥 나서서 나를 막아서던, 리얼–모더니즘의 가게, 시도 그렇지, 리얼–모더니즘이지.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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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의 편지─ 눈을 맞으며


눈을 맞으며 비로소
눈을 생각하듯이
눈을 밟으며 비로소
길을 생각하듯이

그대를 지나서 비로소
그대를 생각하듯이.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57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기역 자로 꿇고, 가장자리에 검붉은 피 칠을 한, 널브러져 있는 자장면 그릇들(검붉은 자장면이 남아 있기도 하고 먹다가 만 듯 휘저어져 있어 자장면이 부은 것 같기도 한)을 은빛 통에 담는 남자의 구부정한 모습, 그는 이 시대의 성자가 분명하다, 무릎을 어떤 수도사들보다 진지하게 꿇고 있다, 게다가 곤색 잠바를 수도복처럼 수그리고 있고, 그 위로 수도의 눈물처럼 방울방울 빗방울이 굴러 내리고 있다. 그는 기도하고 있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71

시를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비밀에 나의 비밀을 기대게 하는 일입니다.
그 비밀은 읽는 이와 쓰는 이를 연결시켜 주며, 그 순간 한 편의 시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비밀이 나의 비밀에 어깨를 기대기 전에는 나의 시는 보석이 되기 전의 원석, 즉 빛날 줄 모르는 돌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이 읽음으로써 나의 언어는 비로소 빛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83

등갓이 없는 불구不具의 등불은, 알몸으로 비추려 드는 알전구는 슬프다. 빛은 알몸이 아니어야 한다. 빛은 많은 덮개를 거느려야 한다. 덮개를 많이 거느릴수록, 깊이깊이 숨어 있을수록, 그래서 그 어둠의 덮개를 뚫고 빛의 살肉이 삐져나올수록 그곳에 지어진 집은 너의 눈을 간절함으로 가득 차게 할 것이다. 우윳빛 등불이 켜지는 순간, 네 가슴뼈에는 행복의 눈물이 가득 드리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덧문을 닫는 순간, 무지개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드리워졌다가 사라지듯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질수록, 사라졌으나 모든 마음에 희뿌연 빛의 베일을 던지며 남아 있을수록, 그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눈부시리라.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04

나는 그립고 그리운 동네의 한 귀퉁이입니다, 희망에 찬, 어머니의 갈색 장롱이고, 희망에 찬, 아버지의 그림자빛 시계이고, 또는 희망에 찬, 할머니의 무지갯빛 망사 커튼입니다, 십일월 바람에 떨며 서 있습니다, 가슴에 솟은 단풍나무 한 그루 숨 여닫는, 영원토록 변방인 또는 영원토록 구원인, 희망인 그 또는 나를 맞는,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08

쓴다는 것은 끊임없는 절단이다. 사유의 절단, 시간의 절단, 또는 사유의 절단과 그 변주, 시간의 절단과 그 변주.

쓰는 시간, 그것은 끊임없는 절단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절단한 다음 통합하는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절단의 시간은 아름답다. 절단의 시간은 눈부시다. 통합을 꿈꾸는 절단의 시간은 찬란하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09

저녁이 스러지고 밤이 온다. 어둠은 모든 비어 있는 곳에서 흘러나와 다른 비어 있는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가만히 있는 공기를 휘젓고, 머리카락을 더욱 검게 물들이고, 곳곳에 침묵의 병정을 풀어 놓으면서, 어둠은 스미지 않는 곳이 없다. ……모든 것을 자기의 무량한 날개로 덮고, 눈뜨고 있는 것들의 눈초리를 쓰다듬는다. 소리 나는 것들을 잠시 소리 나지 않게 하면서.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14

묶는 자와 묶이는 자, 무명無名·無明 시인이여, 너는 늘 묶는 자가 되려고만 하는가. 묶는 자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시를 쓰려는 자는 묶이는 자여야 한다, 속박하는 자가 아니라, 속박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필연의 시선을 유예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라. 벗어나는 자가 아니라, 벗어나지 못하는 자가 무명 시인인 것을. 그리하여 시인 중의 시인이 무명 시인인 것을.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19

현재적 상상력은 끝없는 미래이다. 끝없는 현재의 미래이다. 또는 미래의 지연遲延…….

그렇다. 모든 미래는 늘 현재 속에 숨어 있다.

눈물 한 방울은 눈물 두 방울이다.
일 그램의 눈물은 천 그램, 만 그램 눈물의 총량.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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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역사인가,
존재는 역사의 연결인가,

그보다

개인은 무의미인가,
역사는 무의미의 부질없는 연결인가,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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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는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집의 출발점이다. 거기서부터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느 곳에선가 보호받고 있음을 느낀다. 그 안온함은 마치 생명이 품어지는 자궁 같다고나 할는지…… 그때 거기선 그랬었다. 돌투성이 언덕 높은 곳에 있었던, 좁고, 남루한, 값싼 비닐 커튼이 펄럭이던 곳.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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