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인이다 - 시인 김규동의 자전적 에세이
김규동 지음 / 바이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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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규동은 1925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나 경성고보, 김일성 종합대학을

다니다 문학을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고향을 떠나 월남한다.

책 <나는 시인이다>는 와병중인 그의 구술을 받아 쓴 자전 에세이이다. 

제목에서 일편단심 시를 사랑하는 그의 진심이 느껴진다. 

평생 시쓰기를 업으로 살았고 끝까지 시인으로 남고자 하는 노시인의 지극한

순정에 깊이 고개숙여 존경의 념을 보낸다.

시인 이시영은 "선생은 눈부신 시적 성취는 없는지 몰라도 시쓰기와 민주화 운동에

오래 복무하며 후배들을 따뜻하게 챙겨 존경을 받는 분"이라고 그를 표현한다.

 

시인의 인생역정을 들여다 보니 철없던 어린 시절부터 전쟁 전후, 70~80년대까지

격동의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말썽을 피우던 개구쟁이 모습들, 공부하기를 싫어해 1학년을 두 번 다녀야 했던

대목에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말과 당나귀, 소 등에서 고루 넘어지고 까치알을 꺼내기 위해 높은 나무에 오르다가

떨어져 다친 일, 자전거를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넘어져 다친 일 등은 가슴을 쓸어

내리게 하지만 그토록 추억 많은 어린 시절이야말로 시인이 시인으로 살 수

있었던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우연히 읽은 책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글을 써서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문학을 하리라 결심하는 부분은 사람의 기나긴 일생이 한 순간 결정되는 

일이라 무척 드라마틱하다. 그는 경성고보에서 시인 김기림 선생님을 만나고

그것을 계기로 후일 김일성 종합대학을 중퇴하고 월남을 결심한다.

그와 김광림 시인이 같은 대학 출신으로 행여 남들이 알까 모른체 쉬쉬했다는

사실은 분단의 상처를 안은 그시절의 아픔이 느껴진다.

전쟁 전후로 그가 만났던 동료, 선후배 시인들은 우리나라 시의 역사에서

계보를 잇는 대가들이다.  

책속에 영화감독 신상옥과 최은희를 비롯,  김기림, 이용악, 이봉래, 조향, 김차영,

김경린, 박거영 등의 수없이 많은 문인들의 이야기 보따리가 가득이다.

경어체의 글들이 시인의 이야기를 옆에서 직접 듣는 듯 정겹다.

시인의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 문학과 예술의 유행,

문단의 변천사 등을  알 수 있는 점은 이 책을 읽는 커다란 재미중의 하나이다.

노시인의 기억에 의하면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은 가난하지만 양복 차림에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 명동에 나와 연예인과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늘 백수이던 그가 모처럼 경향신문에 취직이 되었다가 일주일만에 잘렸는데

그 이유가 서울 시내에 불이 난 기사를 "야밤에 화산 뿜듯 치솟은 불기둥이

서울 하늘을 장식했다."라고 썼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에 서점을 하던 박인환은 적자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는데 

손님이 시집의 가격을 물어오면 팔기 아까워서 "그 책 비매품인데요." 라고

답했다고 한다.

'귀천'의 시인 천상병은 길에서 친구를 만나면 손을 내밀어 100원, 200원을 받아

막걸리를 마시고 새까만 옷에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즐겁게 웃으며 하루 종일

술에 취해 돌아 다니면서도 어느 틈엔가 시를 써서 발표했다고 한다.

시인이 죽고 어머니가 부조금을 잃어버릴 까 봐 신문지에 싸서 아궁이 속에

두었는데 시인의 부인이 여름에 비가 와서 눅눅해진 방을 덮히기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돈다발이 다 탔으니 죽어서까지 훌륭한 시 한 편을 남긴 셈이다.

노시인은 소 눈알 같은 눈동자를 가진 김수영 시인이 겁먹은 듯 하지만 뭔가

궤뚫어보는 듯한, 신에게 하사받은 특별한 눈의 소유자였으며 시다운 시를 쓰기

위해 많은 책을 깊이있게 읽었으며 시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하고 언제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다 갔다고 회고한다.

 

시인은 강물처럼 멀리 달아나버린 세월일 망정 뜨겁게 포옹하고 싶다고,

시인으로 살아온 60년 세월이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을 김아무개라 칭하며 시다운 시를 쓰지 못했다는 시인의 겸양이 좋다.

"혼돈과 무질서, 허위와 광기의 시대를 용케도 시라는 무기가 있어 그나마 오늘에

이르렀어요. 시는 존재 이유였고 삶의 목적이었어요. 시인임을 자처했으나 영혼을

뒤흔든 아름다운 시 한 편 출산하지 못했음은 순전히 김 아무개의 책임이예요.

소원이 있다면 세상 떠나기 전 꿈속에서처럼 고향 땅에 한 번 다녀 오고 싶어요.

그나저나 고향 집 우물가 느릅나무는 안녕한지 모르겠어요.

죽기 전에 그 느릅나무를 만나봤으면! 아름드리 그 나무에 기대어 그가 하는

그리운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섰으련만... " 8-9쪽

 

"나무 너 느릅나무

세찬 세월 이야기 하나도 빼지 말고 들려다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 날아가마

나무야 옛날처럼 조용조용 지나간 날들의

가슴 울렁이는 이야기를 들려다오

나무, 나의 느릅나무"  ~~ 시 '느릅나무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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