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
공선옥 지음 / 뿔(웅진)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할머니, 아버지와 엄마, 형제들과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켜켜로 쌓여있는 목포...

눈을 감으면 선연하게 떠오르는 선창가 부두 풍경,

바람을 타고 언제나 출렁이던 바다, 손에 닿을 듯 보이던 섬들, 

짙은 안개와 뱃고동 소리, 뱃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들,

어디서건 스며 있던 짠내와 생선 비린내, 바람에 섞여있던 진득한 소금기,

유달산과 노적봉 그리고 일등바위, 오거리와 목포극장, 그리고 완도선구점...

육덕진 엄마의 짝짝이 젖무덤 아래에서 깊은 강물 속같은 평화가 스르르 찾아드는

잠과 함께 머물던 곳. 내 고향 목포...

저자는 치유의 장소가 굳이 목포가 아니더라도 부산, 인천, 강릉, 군산이거나

어디이건 상관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목포인 것이 너무도 고맙다.

목포에 가면 어느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설움들이 그 징하디 징한 정겨움으로

소리없이 치유될 것만 같다.  

설렘으로 기다린 책 <영란>을 읽으며 그리운 목포와 기억속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자 공선옥은 책 <영란>에서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한 사람이 어떻게

치유되는지를 보여준다.

사고로 아이와 남편을 잃은 한 여자가 우연히 갔던 목포에서 사연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보며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게 되고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된다.

 

슬픔과 마주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다가오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가.

그녀는 어느 여름날 한낮의 열기와 답답함을 누르며 왜 오르는지 의식조차 못하면서

산을 오른다. 삶이 어떻게 바뀌는지 전율하게 하는 과거의 한 장면이다.

그 시간 자폐아였고 천사같았던 그녀의 아이는 서서히 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견딜 수 없었던 남편은 겨울 어느날 언덕길에서 굴러 떨어졌다. 

아이와 남편의 죽음은 그녀를 어둠의 세계 깊숙한 곳으로 내동댕이쳤다

찰나의 순간들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단 한번이라도 주어진다면...

신의 의지로 어찌해 볼 수 있거나 돌이킬 수만 있다면...

인간은 삶이라는 고해의 바다를 평화롭게 건널 수 있을까.

 

목포 '영란여관'에서 자살을 시도했던 그녀는 여관주인 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인

영란이로 살아간다. 저자의 슬픔에 대한 묘사는 참으로 절절하다.

"아이가 좋아하던 반찬들을 만들며 '그리움'과 '슬픔'의 서늘한 감정들이 한 움큼씩

회오리를 일으키다 가슴을 지나 창자 깊숙한 곳을 지나는 것을 느끼며 그냥 내버려 둔다.

대신 그녀는 침을 몇 번 꿀꺽 삼킬 뿐이다." ~ 61쪽

그녀는 영란여관에서 투박하고 걸쭉한 남도 사투리를 따라하고 눌은 밥을 끓여 먹고

뱃고동 소리와 이난영의 테이프를 듣는다.

바람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아이가 물에 잠겨가던 그때 하염없이 산을 올랐던

그 여름의 한낮을, 그 강가에서 아이를 지켜보고만 있었어도 아이는 살아서 웃고

말하고 있을까를 생각하고...

남편의 옷자락이 스치는 기미를 흘려버리지 않고 붙잡았다면 남편은 곁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그동안 흘릴 수 없었던 눈물을 마음껏 흘린다.  

그녀는 영란여관에서 저마다의 사연은 다르지만 이별하고 사랑하고, 떠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누구도 다른 이의 슬픔을 대신할 수 없지만 같은, 또 다른 삶의 자리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내밀고 음식을 같이 하며 눈물을 흘릴 때 서로의 상처를 보게 되고

같이 기대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그녀에게 삶은 막걸리와 빵만으로 버티던 힘겨운 고통의 시간들이었지만...

그녀의 아픈 기억들은 언제고 일렁이면서 삐죽이 삶의 자리마다 떠오르겠지만...

그녀는 아이와 남편에게 용서를 청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삶의 자리에서 굳건하게 살아가리라.

 

"어느 날에 문득, 나의 옛집과, 그 집에 피어나던 장미와 그 장미 그늘 아래서의 사랑과,

그 사랑들과의 예고없는 이별과...... 그런 것들을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무심하게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젊은 날의 상처와 부끄러움을 남의 일인 듯,

훌훌 말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마음으로 나는

장미를 심었다." ~ 255-256쪽

 

"복숭아꽃잎이 뚝 떨어져 내릴 때 화들짝 놀라는 것이 실은 눈물이 출렁하는 순간임을,

바람이 건듯 불 때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실은 내 눈물이 흩날리는 순간임을,

내 사랑들이 남긴 눈물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인 것을 나는 알겠다.

간재미를 토막 내 막걸리에 빨다가 그만 눈물 몇 방울이 막걸리와 함께 섞이고 말았다.

내 눈물이 섞인 간재미회는 또 그것을 먹는 누군가의 눈물에 섞일 것이다.

눈물과 눈물이 섞여서 살이 되고 피가 될 것이다." ~ 261쪽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다독였으면 좋겠어요.

내 속의 슬픔을 다독이고 어루만지다 보면 마음의 눈이 깊어져서 다른 사람의

슬픔도 볼 수 있게 되지요.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사랑하면 세상도

아름다워지지 않겠어요." ~ 저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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