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리
고봉황 지음 / 왕의서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소설 <비바리>의 시간적 배경은 '제주 4.3항쟁'이다.

오늘날 4.3 사건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과거

저편으로 사라진 비극이 되었지만 소설은 4.3항쟁 전후의 시간들이 개인에게 남긴

상흔을 여실히 보여 준다.

방송작가인 고봉황의 첫 장편소설 <비바리>는 역사소설이 아니다.

저자는 4.3사건 당시 그 세월을 살아낼 수 밖에 없었던 개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스스로 주관하는 시간 안에 존재하지 못하고 역사의 흐름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언제고 본인이 원하지 않는 시간들 속에 갇히게 된다.

소설은 운명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선 나약한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되고 휘둘리는지 바라보게 만든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되찾아야 할 땅, 자식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의 세월을 헤쳐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은 한라산 너른 초원의 아름다운 제주를

떠올리게 하면서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전개되는 이야기를 쉼없이 따라가다 보면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통한의 한 세월과

지난했던 민초들의 삶에 직면하면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제주도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쓰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소설 곳곳에서

땅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느껴진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지던 스칼렛처럼,

박경리씨의 <토지>에 나오는 서희처럼 가문의 명예를 되찾고 땅을 되찾으려는

주인공 송지하는 역경을 딛고 강인하게 일어서서 그 빛을 발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가진 여인과 그 뱃속의 아이를 지켜야 했던 지하.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살리는 조건으로 원수의 아이를 잉태해야 했던 지하.

원수의 핏줄인 딸을 증오했지만 딸의 죽음 이후 그 슬픔을 견딜 수 없었던 지하. 

신분을 넘어 지하에 대한 평생의 해바라기 사랑으로 바다 건너 일본의 야쿠자가 된 우찬.

자신의 사랑이 처참히 짓밟혀진 것도 모른 채 이념을 위해 북송선을 타고 떠나는 

지식인 부시원. 엄마의 애증을 견뎌야 했던 강진과 부건 등등.  

엇갈린 시간들과 빗나간 사랑, 알지 못하는 운명과 싸우며 절망에 몸부림치는 그들

모두의 삶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그리고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제주의 거친 파도와 싸우며 평생 물질을 하며 아들을 기다리던 오순순의

"살암시민 살아진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힘겨운 삶에 대한 통한을 넘어서 삶의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견디려고 하는 기다림의 희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지난한 역사를 헤쳐 온 그들의 삶에 경배를 드린다.

제주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버린 민초들 모두를 싸안았고 말없이 우뚝 서있다.

땅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사람들의 정한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제주,

비바리의 땅, 바람과 돌과 여인들의 땅, 아름다운 제주의 아픈 역사가 소설 <비바리>에

가득 펼쳐진다.

 

"지하는 허리를 숙여 푸르게 돋아난 목초 한 웅큼을 땅에서 뽑아냈다.

제주땅의 검은 흙이 고스란히 뿌리채 묻어 있었다.

지하는 목수건을 풀어 그것을 통째로 싸서 가슴에 품었다." ~ 145쪽

 

"지하는 멀리 보이는 물영아리 오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의 소유가 된 수망리의 너른 목초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 긴 시간을 돌아 이곳에 다시 섰다. 스무 살 봄, 불타버린 땅, 검은 재로

뒤덮혔던 땅은 세월이 흘러 초록의 기운을 되찾았다. 초록의 풀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사이로 떠나간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 280-281쪽

 

"지하는 땅에 귀를 대고 엎드렸다. 멀리서 파동이 느껴졌다. 어쩌면 땅속 깊은 곳,

섬의 뿌리 어딘가에서 전해져온 대답, '살암시민 살아진다'

그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지하의 귓가를 오래도록 맴돌았다. 제주 땅에 모진 바람

맞으며 살다 간 비바리들이 건네는 말이었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녀의 지난했던 과거도 모두 살아내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만 같았다. ~ 388쪽 

 

제주 4.3 항쟁

8.15광복 이후 제주도민들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했고 이에 대해 경찰 및

우익단체는 무차별한 테러를 자행, 도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좌익세력은 제주도민들과 함께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반대, 반미. 반경찰.

반서북청년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민중봉기를 주도하였다.

이에 미군정은 경찰병력을 투입하여 진화하려 했으나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군을

투입하여 제주도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해발 200~600m 사이의 중산간 마을들은

적성지역으로 간주돼 불바다가 됐고 9만 명의 이재민과 엄청난 재산피해, 그리고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인 3만 여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발발 1년 만인 1949년 5월 종결되었지만 봉기의 여파로 인한 완전진압은

6.25전쟁을 거쳐 1954년에 가서야 가능하였다. ~ '네이버 테마 백과사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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