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잊혀진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생애를 그렸다.
저자는 알려진 몇가지 역사적 사실과 사건들 사이에 상상력을 더해 그녀의 삶을
소설로 재구성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덕혜옹주에 대한 역사적인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을 보고 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덕혜를 중심으로 복순, 김장한, 기수등 등장인물들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촘촘하게
묘사했다면 소설이 주는 감동이 더했을 것 같은데... 다소 아쉽다.
한 권의 책에 아픔으로 점철된 우리의 역사와 그 안에서 고통으로 몸부림쳤을
참담했던 한 사람의 일생을 전부 담으면서 재미와 감동까지 선사하라고 하는 것은
작가에게 지나친 요구일까.
작가의 감상적이고 다큐 고발적인 책의 흐름은 일본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덕혜옹주의
비참한 삶에 대한 연민, 아픈 역사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소설이 주는 감동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처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황녀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그 이름에 걸맞게 살지 못했던 여자.
조국과 운명을 함께했지만 종국엔 철저히 버려졌던 여자.
온몸이 아플 정도로 그리움을 품고 살았던 여자의 이야기.
역사서로도, 인문서로도, 소설로도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일본 번역서가 한 권 있을 뿐입니다.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그녀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이것은 그녀를 위한 진혼곡입니다.”~ 작가의 말

일본으로 떠나기 전 덕혜옹주의 모습
역사가 이미 정해진 수순을 밟아 그렇게 흘러왔는지...
역사를 이루는 주체들이 현명하지 못해 다를 수도 있었던 역사가 그렇게 정해진건지...
그 또한 운명인지...
망한 나라에서 왕후가 시해당하고, 자신은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고,
아들은 볼모로 일본에 붙잡혀 있어야 했던 고종의 처지가 새삼 안스럽다.
고종은 무능했던 것일까.
12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아버지 대원군과 부인 명성왕후의 강한 기에
눌려 자신의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던 고종.
환갑 나이에 보았던 어린 딸 덕혜를 얼마나 귀히 여겼던가.
그 딸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일본에 보내야 했던 고종과 양귀인의 비애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절망을 견뎌내는 일이 죽음처럼 고통스럽다는 것을 왜 일찍 알려주지 않았소?" ~ 23쪽
꼿꼿한 눈매로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명성왕후를 생각하며 고종의 탄식이다.
절망을 견디는 것은 죽음보다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절망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절망이 나를 좀먹지 않도록, 절망에 굴복당하지 않고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살기 위해 절망에 굴복하고 자신 안으로 깊숙이 숨어드는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고종과 백성들이 절망했듯이 덕혜 역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망해가는 나라의 황녀로 태어나 한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했기에.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강제로 나라를 떠나 낯선 땅 일본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독살을 두려워하다가 결국 강제결혼을 하게 되고 자신이 낳은
딸에게조차 버림받으면서 그녀의 끝없는 두려움은 자신 안으로 깊이, 더 깊이 숨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운 조국을 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와 두렵기만 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당했던 그대로 자신의 딸이 이지메 당하는 현실을 잊고 딸의 자신을 향한 원망과
비난을 잊기 위해 마음의 병은 우울증으로, 정신분열증으로 깊어갔을 것이다.
약한 나라의 설움이 그녀 한 몸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그래도 그녀는 왜 싸워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안으로 도피해야 했을까?
그녀 어깨 위에 얹힌 무게가 절대로 감당못할 만큼 큰 것이었을까?
자신이 당하고, 당해야 했던 비참한 역사적 현실에 대해 훗날 햇빛 쏟아지는 밝은
곳에서 자신의 육성으로 당당하게 소리치지 못하고 깊은 병 속으로 숨어야만 했을까...
일국의 옹주답게 자신이 처했던 어둠을 고발하여 우리의 마음을 더욱 비분강개토록
하지 못했을까.
아니, 증언을 하지 않아도 좋다.
견딜 수 없었던 절망일지라도 참고 이겨냈다면 일본은 패망하고 그녀는 해방 조국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남았던 포로들은 전범들을 죄주는 법정에 나와 그들을
고발, 증언하여 전범들의 죄상이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났다.
덕혜옹주여!
왜 떳떳이 살아남아 저들을 고발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볕을 피하고
숨어 지내야 했습니까?
병이 들기 전에 조금만 덜 상처받고 조금만 더 세월을 기다리지 못했습니까?
일본과 관계된 원한과 가슴속에서 치미는 울분의 감정들은 이제는 정리해야
할 구시대의 묵은 감정일지도 모른다.
비록 독도 문제와 종군 위안부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난제로 남아 있지만...

"나는 돌아가리라. 어머니 계신 곳으로 돌아가리라.
덕혜의 가슴 속에 세월이 만든 상처가 밀물처럼 들어차기 시작했다." ~160쪽
"내 곁에는 바람소리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 곁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세월이여, 진정 따스한 손길을 보내주오. 내 속으로 낳은 아이마저 나를 모른다 하오.
나와 살을 섞은 남자도 나를 모르다 하오. 나를 낳은 나라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소.
이토록 삶이 무겁다니. 이토록 고단하다니...... " ~ 337쪽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 407쪽 덕혜옹주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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