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책을 읽으니 마음이 서늘해지고 눈이 맑아진다.
올해 65세가 된 그의 글이 처음 세상에 나온지도 30년이 훌쩍 넘었다.
2010년 내놓은 <아불류 시불류> ~'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는
단상(短想)들의 모음집이다.
책의 절반 이상이 여백이고 그림이다.
노작가의 삶에서 건져 올린 정수를 맛보는 일은 화가 정태련의 섬세한 그림과
함께 여백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일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아득하게 사라진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리고 만났던 사람들과
헤어진 사람들, 그리고 만남 중인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고 어린아이의 정서를
맛볼 수 있다면 그가 어쩌면 의도했을지도 모를, 여백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는 것이 아닐까.
예술가들의 기본덕목이라고 주장하는 자아도취에서 비롯된 자신감 넘치는 글은
지친 심신을 쉬게 하는 시원한 샘물이 되고 길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는
이정표가 된다.

글 곳곳에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와 통찰력, 세태 풍자, 유머와 해학이 살아 숨쉰다.
글은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은 반문하고 되새길수록 깊게 다가온다.
저자의 고운 감성은 이별과 고독, 그리고 그리움과 사랑을 말하고 어느 사이
반짝이며 부서지는 해비늘, 쏟아지는 달빛, 단풍, 별, 하얀 함박눈을 노래한다.

코끝을 스치는 향기가 난다.
냄새에 둔한 나는 한참을 모르다가 꽃그림에 코를 대보니... 아하! 꽃에서 나는 냄새였다.
잠자리에도, 잎에도, 글에도 향기가 배어있다.
그의 글과 꽃그림에 취하라는 말인가 보다.

작가 이외수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방식은 남다르다.
트위터를 하고 젊은이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 세대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나이를 내려놓고 대접 받으려는 마음을 비워야 가능한 일이다.
그의 근황과 글을 보며 잠시 아버지를 떠올려 본다.
아버지는 언제나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존중하고 귀를 열어 의견을 물으셨다.
그것은 말처럼,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나이가 드니 알아간다.
키가 크고 몹시 마르셨던 아버지는 여름이면 흰 모시옷을 입고 학춤을 추시곤 했다.
참으로 고아(高雅)하고 아름다운 분이셨다.
지상에서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이라 노래했던 시인 천상병의 '귀천'을 좋아라 낭독하시던
아버지는 지금쯤 어느 하늘 나라 별자리를 떠돌면서 소풍을 즐기고 계시리라....

"나 어릴 적 겨울밤에 찹쌀떡 장수와 장님의 구슬픈 피리소리. 그 풍경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겨울 밤이 깊어서 외로움도 깊었던 시절." ~ 48쪽
어릴 적 긴긴 밤. 머리에 바람 들면 춥다고 털모자를 쓰고, 달게 자던 할머니의
'푸우 푸우' 숨소리에 잠이 깨어 아득한 외로움이 깊었던 어느 시간이 떠오른다.
"메밀무~~욱" 과 "찹쌀떠~~~억"을 사라고 구슬프게 외치던 그 사람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
저자의 글이 어린 시절을 두드려 끝도 없이 기억하게 만든다.
"잠시만의 머무름 속에도 아픔이 있고 잠시만의 떠나감 속에도 아픔이 있나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아픔이라는 이름 아닌 것이 있으랴." ~ 98쪽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는 것, 머무름과 떠남,
만남과 이별이 그 말보다 훨씬 더 슬프다는 것을... 나이들면서 깨닫게 된다.
그래서 저자도 그냥 아는 것과 깨달음은 다른 것이라고 했나 보다.

"감성마을 몽요담에 해의 비늘 흩어져 반짝거리고 있다.
사랑아, 오늘은 저 비늘로 목걸이를 만들어 그대 목에 걸어 주리니,
행여 흐린 세상이 오더라도 울지 말고 살아라." ~ 46쪽
"창문을 열었습니다. 하늘이 흐렸습니다. 나무들이 흐린 하늘에 그물을
걸어두고 새들이 날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69쪽
"그리움이 얼마나 간절하면 저토록 아름다운 빛깔로 불타겠느냐.
가을단풍." ~ 109쪽
"지난밤에는 바람이 심해서 감성마을 마당에 별들이 수북이 떨어져 있었다.
마시면 모두 시가 되는 술을 담갔다." ~ 159쪽
"달 밤에 홀로 숲 속을 거닐면 여기저기 흩어져 빛나고 있는 달의 파편들.
몇 조각만 주워다 그대 방 창틀에 매달아주고 싶었네." ~162쪽
"가을 찻잔에 달빛 한 조각을 녹여서 마셨습니다. 당신이 곁에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187쪽
"세상 그 어디에도 기쁨과 행복만을 가져다주는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은 언제나 그 크기와 깊이에 비례하는 고통을
수반하고 있다." ~ 244쪽
"진실로 사랑했으나 미처 고백하지 못한 낱말들은 하늘로 가서 별빛으로
돋아나고 역시 진실로 사랑했으나 이별 끝에 흘린 눈물들은 모두 벌판으로
가서 풀꽃으로 피어난다. 우리 사는 세상,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피맺힌
슬픔 한 모금씩을 간직하고 있다." ~ 244쪽

하느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일용할 고독을 주셨다고
투덜대는 이외수, 그는 고독하기에 글을 쓰지만...
고독은 충만의 다른 이름이다.
온 우주만큼 귀한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는 글을 쓰기 때문이다.
"때로는 글 한 줄이 죽어가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도 한다." ~ 182쪽

저자 이외수는 <아불류 시불류>의 마지막 장에서
'겨우 여덟 음절의 말만으로도 온 세상을 눈부시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을.사.랑.합.니.다.
그에 의하면 하늘 아래 타인은 아무도 없으며 모두 동일한 인연의 거미줄에
연결된 존재들이니 온 우주를 통틀어 나와 무관한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이다.
"사랑은 너를 위해 내가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다." ~ 232쪽
쿵,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 말에 굳게 잠근 마음의 빗장을 연다.
그리고 고백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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