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을 길들이다 과학과 사회 10
베르나르 칼비노 지음, 이효숙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죽어도 좋으니 아프지만 않게 해주세요!"

통증 클리닉에 찾아온 말기 암환자의 말이라고 한다.

통증은 인간 정신을 무력하게 만들고 그 육체를 무너지게 만든다.

살면서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통증에 대해 다룬 의미있는 책이 나왔다.

<통증을 길들이다>는 프랑스의 '르 콜레주 드 라 시테'라는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통증 관련 발표내용들을 엮은 책이다.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면서 질병의 공격적인 상징인 통증을 휴머니즘에

입각해 통증 그 자체로 이해하고 치료한다는 관점에서 획기적인 책이다.

의사, 과학자, 철학자, 문학가, 종교인, 간호사 등으로 이루어진 10명의 저자들은

각각의 체험을 통해 얻은 통증에 관한 지식을 전달한다.

컴퓨터 이용 수술 기술, 미세로봇 진단술, 새로운 항암제의 개발 등은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지만 환자 당사자에게는 치료와 동시에 통증을 완화시키는 요법이

더욱 시급한 문제이다.

최윤희씨가 죽음을 결심한 이유도 병으로 인한 통증때문이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생체 기능이 활발한 청년기를 정점으로 사람의 몸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기능이 떨어지고 점점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나이 들어서도 충분한 운동과 영양섭취로 건강을 유지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의 어딘가가 약해져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단단한 기계도 시일이 지나면 부품을 갈거나 고쳐서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보면 부스러지기 쉬운 사람의 몸이야 더 말해서 뭣하겠는가.

마흔 살에 정형외과에서 뼈가 닳아져 걸을 때 아프다는 말을 듣고

'뼈가 닳아져서? 아하! 나의 몸이 닳기 시작했구나' 하고 자각했다.

처음 느낌은 당혹스러웠지만 '40년 된 기계라 해도 벌써 몇 번을 고쳤을텐데 그래도

많이 버텨주었다'는 생각이 들어 내 몸이 고마웠다.

그때의 깨달음 이후로 어디가 아플 때면 쉽게 적응하게 된다.

늙어가는 중이어서 아프니 최선을 다해 고치고 살자라고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육체적인 통증은 철저하게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것이어서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환자의 통증을 덜어줄 수 없겠지만 정신적인 위안을 원할 경우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픈 이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의사 마르탱은 10명의 저자들 중의 한사람이다.

환자의 극심한 고통을 이해하고 마음을 다해 통증을 완화시키려 노력하는 그와

그의 아버지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프랑스식 의학 교육은 '증상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즉, 환자들이 겪는 고통의 증상들을 보면서 정확한 임상 검진을 하기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르탱의 아버지는 환자들의 통증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느 날, 마르탱은 한 환자가 심한 복통으로 몸을 꼬며 미친 사람처럼 온몸을

흔들면서 자신의 통증을 드러내려고 필요 이상으로 애쓴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어느 정도 꾀병일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너는 그렇게 말할 권리가 없어! 이 사람이 아프다고 말하면, 너는

믿어야만 해! 의사가 뭐라 해도 통증이 옳아." ~ 78쪽

며칠 후 환자는 죽었다. 그는 췌장암 환자였다.

환자가 얼마나 아픈지는 환자 자신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의사 마르탱은 말한다.

"환자들의 말이 싣고 있는 감정, 느낌, 두려움, 절망 등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이

그러한 감정을 느끼며 감동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며

내 앞에 있기 때문이며 내가 그들의 얘기를 이해할 수 있을거라고 그들이 믿고

있기 때문이며 심지어는 그렇게 할 사람이 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그 일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통증에 맞서는 첫 번째 무기는 존중이다." ~ 82-83쪽

 

* 최근까지 태아와 신생아는 통증을 느끼지 않으므로 마취와 진통제가

필요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조산아들의 호르몬 반응 검사 결과 

임신 24주를 넘는 태아 시절부터 통증을 느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태아에게 진단과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외과 행위나 반복된 침투에 대한 진통제 처방이

없다면 통증과 이에 동반되는 스트레스 반응이 태아의 안정된 발육을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태아의 통증에 대한 예방 작업은 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의료적 성격을 띤다. 

 

* 심각한 정신지체와 심한 운동장애가 결합된 장애가 있는 다중장애아의 통증은

그들 스스로 표현하지 못하는 관계로 통증을 측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때 '타인 측정 일람표'에 의해 아이와 의사소통하고 통증 정도를 평가해야 한다.

일람표는 아이에게 문제가 없는 평소 상태를 참고하여 분야간 협동팀(간호사, 간병인,

물리 치료사, 특수 교육 교사, 의사등)이 다양한 순간들에서의 아이의 반응, 태도,

의사소통과 표현 방식들의 목록을 만들어 기본 자료를 작성한다.

정확하고 세심한 관찰과 기록 자료들은 통증 현상이 의심되는 순간 즉시 사용될 것이다.

통증의 식별과 측정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로 남지만 치료진이 매순간 기울여야 하는

노력들은 통증을 표현하지 못하는 중증장애아들에게 가능한 한 최선의 삶의 질을

제공하기 위함이다.

 

질병으로 인한 통증은 지독하게 고독한 감각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통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책을 읽는다고 직접적인 통증을 극복할 수는 없겠지만 통증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가

가능하고 통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얼마의 위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통증치료에 있어서 의학적인 접근이 중요하지만 만성, 암성 통증인 경우 환자와

그 가족들의 정서 상태와 이해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통증에 대해 생리학, 의학, 심리학, 철학, 종교, 문학적으로 시도한

다각적인 접근 방식은 이 책의 큰 장점이라 하겠다.

그렇더라도 환자 자신의 지독한 고독감과 극한의 고통은 덜지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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