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늪 지혜사랑 시인선 34
권순자 지음 / 종려나무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시인 권순자는 시집 <우목횟집>에 이어 두번째 시집으로 <검은 늪>을 내놓았다.

시들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은 늙고 병들고 초라하다.

바다의 풍경들조차도 활기차고 밝은 모습이 아닌, 어둡고 쓸쓸한 세계이다.

그녀는 전작 <우목횟집>에서 자신의 껍질을 옮기는 민달팽이같은 어머니와

낙엽처럼 바스라진 아버지에 대해 묘사했다.

그녀의 시들을 읽다 보면 가난한 시절, 자식들을 키우면서 먹고 사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했던 부모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알 수 있다.

'황태'에서 수십 년의 세월로 황태를 말리고 그 세월에 모든 진기가 빠진 어머니,

'홍어'에서 자식들을 위해 삭은 홍어처럼 자신을 세상에 내놓은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끝없는 노동으로 생이 저물어 갔던 우리네 부모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평론가 황정산은 그녀의 시작업에 대해 말한다.

"다른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존재의 기억, 즉 시간의 흔적들을

아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이해하고 그 시간들로 이루어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흔들리고 희미한 사랑의 기억들을 확실한 표지로 남기고자 하는 것,

그것이 시인이 이 시집에서 이루고자 하는 일이다." ~ 132-133쪽

 

시를 쓰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녀는 자신의 시들에 고향인 바다와 부모님의 이야기를 담는다.

아마도 시인은 흐르는 세월속에서, 나이가 들면서 부모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시로 표현하는지 모른다.

 

이별

이곳의 기억과 먼지 묻은 신발은 아직도 머뭇거리는데

가슴 저리는 이야기 잘라먹고 젖은 눈가를 만지다가

어디로 급히 떠나가느냐.

꽃잎바람에 흩날리거든 달빛이 발길을 따라오거든

얼굴 하얘지도록 울먹이던 이 날을 기억해다오.

가지마다 잎 파릇파릇해지거든

한때 유리창에 부딪치며 출렁이던

환한 웃음들을 떠올려다오. ~ 98-99쪽

 

고무장갑

어머니가 벗어놓은 고무장갑, 붉은 손가락에 진물이 난다.

청춘처럼 빛나던 붉은 손끝이 뜨거운 냄비에 데고 뜨거운 물에 늘어지고

삭아 너덜거리는 것이 어머니 손을 닮았다.

나를 품어 길러온 세상 어떤 손보다 큰 손,

성스러운 손이 오늘은 해거름에 젖어 단풍잎같이 가냘프다. ~ 15쪽

 

하얀 달

그 여름 열탕같던 감자밭을 일구고

날마다 감자꽃 자줏빛 얼굴로 잠자리에 드셨지

어머니 지친 손발이 나무막대처럼 흔들려

어린 감자들은 눈물 바람으로 감자꽃 피워 올려댔었지.

감자껍질처럼 말라만 가시던 어머니

아직도 기억의 집 속을 굴러가고 있는 유월의 그 하얀 달. ~ 26-27쪽

 

홍어

고깃배에 실려 거칠고 고단한 길 달려온, 삭고 삭은 홍어 남자

바닷바람에 자신의 몸이 부패해가면서도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부성은 아이를 찾으러,

눈물로 밤을 샌 독한 냄새 피우며 제 살을 거리로 내놓았다. ~ 73쪽

 

 

딸아이를 목발 삼아 무료 급식소를 향해 걸어가는 병든 사내,

끼니도 거른 채 잠에 떨어진 공사판의 사내,

15층 허공에서 유리창을 닦고 있는 일용 잡부 김씨 등은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이웃들이다.

삶의 어두운 현실을 모른척 하지 않는 작가는 소외된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사랑을 과장하지 않고 기억속에서 사랑의 흔적을 찾으려 애쓰는 작가의 

고군분투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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