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빈리 일기
박용하 지음 / 사문난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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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빈리는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에 있고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오빈저수지가 있는 마을(里)이다.

서울과 수도권의 10년, 그리고 인심이 고약했던 경기도의 한 시골에서의

7년 세월을 견디다 못한 시인 박용하는 2008년 오빈리에 터를 잡는다.

다행히도, 오빈리는 환갑을 넘긴 이웃집 어르신이 통성명하자며 먼저 손을

내밀고 언덕배기 놀고 있는 밭 350평도 부쳐 먹으라고 내놓는 인심좋은 마을이다.

시인은 마을 어른들의 도움으로 고구마, 고추, 호박, 참외, 오이, 옥수수, 토마토,

시금치 심고... 풀 베고 풀 뽑는 날들을 시작한다.

2008.11.11일에 시작한 일기는 2009.11.10일에 끝난다.

시인의 속내가 담긴 1년의 기록들을 보면서, 미래의 내 모습이 그려진다.

어쩌면, 머릿속으로 막연하게 동경하는 삶과 시골에서의 실제 생활은 많이 다를 것이다.

오랫동안 귀농을 꿈꾸어 온 나로서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지는 꽃들과 피는 꽃들을

볼 수 있고, 밤새 내린 눈이 있어서 행복하고, (눈을 좋아하던 어떤 사람이 강원도의

첫 겨울을 나면서 쌓이는 눈을 치우며 눈을 저주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지만),

날리는 은행잎을 보며 가을이 끝나감을 슬퍼하고, 매일 오빈리 저수지 들판을 걷기도,

뛰기도 하면서 벼이삭 익어가는 황금 들판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멋진 일들이다.

 

시인의 일기는 솔직하다.

시인의 글에서 분노로 들끓는다고 표현한 글을 자주 만난다.

그는 나라에 대한, 정치판에 대한 실망감으로 분노하고 시가 써지지 않는 현실이

슬프고, 돈이 없어서 술과 화로 날을 지새기도 한다. 

일기에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시인의 심사, 아내와의 싸움, 돈에 대한 치사한 마음,

돈을 벌지 못하는 아들에게 소설을 써야 돈이 된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이야기 등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의 분노는 내가 알지 못하는 그만의 삶의, 그가 가진 문제이리라.

속살이 드러나듯이 밝혀지는 시인의 글을 보며 시인의 분노가 안타깝게 여겨지지만

자연과 함께 벗삼아 살고 있는 그의 세계가 마냥 부럽다.

그는 오빈리의 벌판을 걷고 달리면서 자연이 주는 축복과 경이로움에 흠뻑 빠진다.

새롭게 충전한 힘으로 돈을 버는 아내 대신 살림하고 딸의 공부를 가르치고 시를 쓰고 

자신이 지은 수확물로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오빈리 저수지로, 밭으로 산책을 나가는

시인의 모습은 행복해 보인다. 

삶이란 기쁨, 슬픔, 행복함, 불행함, 조금의 분노, 조금의 위안들로 버무러진 것이다.

시인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네 삶도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들과 사건을 겪으며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만족하며 사는 삶이 최고이다.

 

만 원에 살구 150 개를 따가게 하는 윗집 김씨 할머니를 가진 시인은 행복하다.

떨어지는 도토리를 머리에 맞으며 도토리를 한말씩이나 줍고,

심어 놓은 방울 토마토 가지에서 계속 열리는 방울 토마토를 먹고,

땀흘려 수확한 농작물을 도시에 사는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보내고,

좋아하는 책과 음악을 듣고 시를 쓸 수 있으니 시인은 참으로 행복하다.

 

"참외 심을 곳 잡초를 제거했다. 우거진 풀을 쳐내고 땅을 갈아엎으니 거기서

벌레들이 나오고 그걸 작고 귀여운 곤줄박이가 와서 물고 갔다.

어떻게 된 건지 그 새는 내 발 옆까지 서슴없이 다가와서 새가 날아갈 때까지

나는 꼼짝 않고 서있어야 했다." ~ 106쪽

(나는 이 글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시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잊을 수 없는 일 하나 : 1986년 군생활 때 군부대가 가까운 산골 읍내에

안경점이 둘 있었다. 그 중 한 안경점에서 맞춘 안경은 며칠이 지나도 눈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러웠다. 다른 안경점 주인이 했던 말. "있을 수 없는 처방이다!"

~ 153쪽 (다른 안경점 주인의 흥분한 얼굴이 떠올라 많이 웃었다)

 

"은행잎 한 조각 떨어져도 가을빛이 줄거늘

수만 잎 떨어지니 이 쓸쓸함 어이 견디리." ~ 16쪽 두보의 시 '곡강 曲江'에서

 

"일기는 정치적인 글이다. 모든 글은 정치적이고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이다." ~ 24쪽

(시인의 말에 막연하게, 내식으로 공감하지만 의문이 생긴다.

시인이 사용한 '정치적'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오늘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일과 사건들이

생의 뒤쪽으로 가물거리며 사라지는 것인지." ~ 25쪽

 

"오빈리 들판과 오빈리 저수지를 걸었다 뛰었다 걸었다." ~ 28쪽

 

"산수유 꽃 진 자리에서는 산수유 잎이 조용히 와 있었다.

며칠 사이에 많은 꽃이 졌다. 오후에 흐리다 비가 왔다.

자연의 소리는 소음이었던 적이 없었고 자연의 빛깔은 억지스럽고

어지러웠던 적이 없었다." ~ 96쪽

 

"꽃사과 꽃이 하나 둘 져내리고 있다.

내 삶의 하루하루도 내 인생에서 떨어져나가고 있다.

삶은 그처럼 절박하고 끔찍하고 속절없고 부질없고 아름답다." ~ 98쪽

 

"삶의 그 어떤 화려하고 빛나는 형식일지라도 조용히 눈 내리는 밤보다는

나중 일이다." ~ 223쪽

 

"오빈 저수지 둑방의 억새가 바람을 견디며 한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천지사방이 그윽한 빛의 잔치였다. 빛이 물들고 있었다.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다." ~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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