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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손 도장 - 2010 대표에세이
최민자 외 49인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아파트 마당에 벚꽃과 산수유가 한창이더니 지고 없다.
대신 연초록의 싱싱한 이파리들이 엊그제 비 온 뒤로 더욱 푸르르다.
모두들 봄의 생생한 기운을 안고 기지개를 펴고 있다.
꽃도 예쁘지만... 연초록의 잎으로 덮인 나무들은 생명력이 넘쳐 보여
더욱 싱그럽다.
작은 아이에게 "진아, 너는 저기 나무들이 보이지 않지?" 라고 물었다.
아이는 "아니, 나도 보여." 한다.
아마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나이 때에 내가 알지 못하였듯이...
아니 제 말대로 보이기는 하지만 나무의 초록이 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나이가 하나, 둘 먹는 것이 훈장을 다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도 아니지만 내게는 각별하다.
신기하게도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이다.
청춘의 재기발랄함과 기발함, 톡톡 튀는 언사와 싱싱함이 좋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서 은근하고 느리게 삶과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큼
이해되는 것도 참 근사한 일이다.
음식에 대한 편식이 심한 나는 문학 장르에 대한 편독 역시 심한 편이었다.
유독 장편소설을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다른 장르의 책들도 가리지
않고 읽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수필이 주는 맛과 멋에 흠뻑 빠져 들었다.
책에 실린 글들은 2009년 격월간 <에세이스트>에 실린 글들 중에서
월평, 촌평, 평론에 오른 작품을 대상으로 글을 쓴 작가 모두가 심사위원이
되어 한 해를 대표하는 작품 50편을 선정한 것이다.
발행인 김종완은 서문에서 이 책이 한국수필문학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선집으로 널리 읽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힌다.
저자 50인의 평균 나이는 50세를 훌쩍 넘기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연륜이 배어나는 글들이 주는 감동은 참으로 특별하다.
삶에 대한 깊은 연륜과 진정성에 문학적인 상상력이 더해 나온 글들이니
감동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실려 있는 글들의 소재는 멸치, 배꼽, 수박, 들고양이, 새벽 예불, 밥상,
팽나무, 하모니카, 죽음, 엄마, 아버지 등 다양하다.
각 50개의 글들에서 50사람의 인품과 향기가 느껴진다.
덤으로 인생 선배들의 사는 모습과 그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 나의 치사함에 대하여 ; 김종완
어린 시절 배가 고파서 실신한 적이 있는 저자는 이완용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기회를 내팽개치고 안중근의 당당함으로 살 자신이 없었을 것이라고 자신의
치사함을 고백한다. 그는 어떤 가격에라도 팔았을 재능이 없음이 감사하고
영혼을 팔 기회를 원천 봉쇄한 신께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에 퍼뜩 생각한다.
"결코 채워지지 않을 부자나 권력자가 될 욕망만을 좇다가 가난한 마음으로
죽게 된다면 이 얼마나 한심한가! 젠장 마음까지 가난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돈 드는 일이 아니니 마음이라도 부자로 살아야겠다" ~ 26쪽
* 수박송 ; 김서령
"여름날 오후 새빨간 큰 소반에다가 새파란 수박을 올려 놓고 잘 드는 칼로
자른다. 아아, 이 또한 흐믓한 일이 아닌가." ~ 48쪽 김성탄 <흐뭇한 한 때>
수박을 살 때 수박을 가만히 두들겨 보고 그 소리를 들어 본다.
살림을 사는 지혜도 없고 음식도 못하는 나는 어떤 소리가 잘 익은 소리인지
도무지 분간하지 못한다.
한번씩 두드려 보다가 결국은 수박 파는 아저씨에게 골라 달라고 부탁한다.
몇년 전만 해도 수박 몸통의 윗부분을 삼각형으로 날렵하게 파내 그 색깔을
보고 익은 것을 팔았는데 그런 방법은 언제부터인가 볼 수 없게 되었다.
엄마를 따라 다니면서 수박 사는 것을 구경하던 어린 시절부터 홀로 수박을
사게 된 어른이 되어서도 수박 몸통에 칼을 대는 그 순간은 언제나 긴장이
되곤 하였다.
익지 않았으면 아저씨가 무안해 할거고...
익지 않았으면 아저씨는 손해일테고...
익지 않은 것을 살 수는 없고...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푸른 대기 아래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는 수박의 속살, 그 깊은 상처는
반드시 삼각형이어야 했다. 우선 삼각형으로 깊이 찌른 후 무게 중심쯤
되는 곳에 칼끝을 꽂아 대기 밖으로 불러내곤 했다.
딸려 나온 속살이 익지 않았다면? 수박장사는 일단 제 얼굴을 수박대신
벌겋게 물들인다. 그리고 아직 녹빛이 남은 삼각형을 얼른 수박 몸 안으로
원위치하고 괜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른 수박을 향해 몸을 돌린다." ~ 53쪽
수박장사의 무안함을 묘사하는 부분이 참으로 재미있다.
하지만 이어지는 글을 보니 헛헛함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수박을 먹는 사람은 다 죽는가 보다.
김성탄도 임어당도 김현도 윤택수도 지금은 모조리 여기서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 또한 수박을 엄청나게 먹어댔으니 불원간 그들이 간 곳으로 가게 될 게
뻔하다. 살아있는 동안 잘 드는 흰 칼로 푸른 수박을 자르는 쾌감을 더
누려야 할는지 먹으면 죽는다는 걸 알았으니 수박 따위 이제 그만 끊어
버려야 할는지 그걸 모르겠다." ~ 54쪽
* 화해 ; 허원주
저자는 뉴질랜드 유학 중에 돌아온 고등학생 아들이 여자친구와 찍은 사진을
보며 아들에게 실망하고 기분이 언잖다.
그런데 아빠에게 영어로 쓴 에세이 몇 편을 보여주는 아들과 열띤 토론을
하고 마음이 슬며시 풀어지는데...
아들은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를 불러 달라고 청한다.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동안 저자는 아들이 한 남자로 성숙하고 그 인생이
여물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두~어도 진정 변하지 않을 사랑으로 남게 해 주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저자의 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에 공감이 간다.
내가 아는 아들의 모습이 전부가 아닌 것에 당황되지만 그 무엇이
아들의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해되는 찰나의 순간이 있다.
노래방에서 아이들의 노래를 듣노라면... 참 행복하다.
따로, 또 같이 마이크를 잡고 멋들어지게 노래 부르는 아이들을 보면서
기분 좋은 웃음이 스멀스멀 터져 나온다.
마지막 가족의 노래 <사랑으로>를 부를 때면 우리는 늘 어깨동무를 한다.
가족은 참 좋은거다.
* 겨울 팽나무, 아내여 이것 좀 보오 ; 한 기홍
버거운 빚과 박봉, 수차례의 자영업의 실패로 저자의 가정은 항상 궁핍하다.
제주도에서 밑동에 공동(空洞)이 있는, 아무 쓸모가 없어 오래 살아남은
팽나무를 보면서
"갑자기 나무의 의연하고 질긴 생명력에 따뜻함과 경의를 느꼈다.
여행길 내내 쓸쓸했던 가슴속 깊은 곳에서 팽나무 밑둥 닮은 공동(空洞)이
환한 원으로 커지면서, 보름달같이 둥그런 아내 얼굴이 일렁였다.
아내가 곁에 있다면 반평생 그리도 인색했던 사랑한단 말이라도 거침없이
해주고 싶은 마음에 울컥거렸다.
"추운 겨울 팽나물세, 아내여 이것 좀 보오."" ~ 84-85쪽
* 밥상 ; 박경주
저자는 초등학교 시절, 수건 돌리기를 하면서 등 뒤에 떨어진 수건에 손가락
끝이 닿던 순간의 놀라움과 당혹감, 그리고 아뜩함을 '죽음'으로 묘사한다.
뜻밖의 술래가 되는 것, 죽음은 신이 술래인 수건돌리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열 넷이 빙 둘러 앉던 식탁을 가장 먼저 떠난 건 어머니였다.
그토록 열심히 밥상을 차리다가 먼저 눈을 감았다. 빈 자리는 채워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모두 떠나면 새 밥상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나리라." ~ 231-232쪽
* 속죄 ; 김종길
저자는 누군가의 고통을 들어주고 처방을 내리는 정신과 의사이다.
무당이던 어머니의 신분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던 그는 어머니가 죽은 후, 어머니가
죽기 전의 증상과 같은 호흡곤란을 겪는다.
환자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머니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그는
어머니의 아픔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고독한 삶, 고통의 극점을 넘어 온 어머니는 진심으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만큼만 이해한다.
가장 고독하고 고통스러웠던 삶을 견뎌낸 어머니는 위대했다. 못난 아들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에게 위대했던 어머니는 외롭게 돌아가셨다."
* 아버지의 난닝구 ; 이귀복
저자의 소망은 아버지께 잔치국수 한 그릇을 만들어 대접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어린 날 자신의 상처에 대한 위로이자 치유이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되던 여름, 아버지는 첫사랑 연인과 살림을 차렸고 엄마는
그집 마당에서 아버지의 난닝구를 움켜쥐고는 있는 힘을 다해 흔들어댔다.
그후 엄마는 이모 집으로 피신하고 술에 취한 아버지는 대문을 잠그고
내게 매질을 했다. 며칠 후 내 몰골을 본 엄마는 맹수가 되어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난닝구가 찢겨져도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일찍 세상을 떠난 후 긴 시간을 홀로 보냈다.
십여 년이 넘도록 침상에 누워 식사도 대소변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처참한 아버지...
나는 친정에 발을 끊었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관절염으로 뻣뻣하게 굳은 다리가 관 위로 솟아 뚜껑 닫기가 힘들어
기역자로 접혀진 아버지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울었다." ~ 162-170
아버지의 난닝구. 말할 수 없이 슬프다.
아버지의 폭력과 어린 시절의 상처, 화해하지 못하고 보낸 아버지에
대한 회한 등으로 저자는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을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그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잔치국수를 해드렸으면 좋았을텐데...
참 많이 안타깝다.
저자의 마음 속에 있는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기를...
"이미 받은 상처는 내 것이다. 쉰일곱,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여섯
그 날의 나를 찾아 보듬는 일 뿐이다. 부모가 있었지만 늘 혼자였던 열여섯
그 아이에게 지금의 나는 또 다른 부모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 아이의 상처를 헤집어 빨간 약이라도 발라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 다음 생에 다시 만나면 멸치국물 내어 국수를 꼭 삶아 드릴게요.
아버지 좋아하는 생마늘 몇 쪽도 함께 상에 올릴게요.
그때 아버지께 고통스러웠던 내 상처를 이야기하면 한번만이라도 내 등을
토닥여 주세요." ~ 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