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상인들 - 하늘이 두 쪽 나도 노렌은 지킨다
홍하상 지음 / 효형출판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의 정치는 사분오열되어 있고 관료는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로

무장되어 경제발전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무엇이 경제 대국의 명성을 지탱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상인정신이다." ~ 6쪽 

 

이 책은 오사카 상인들의 이야기이다.

전후 일본 경제를 살리고 일본이 경제 강국이 되기까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상인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익보다 고객 우선의 서비스 정신, 근검절약,

몸에 밴 겸손과 철저한 상인정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백 년의 세월을 내려 오면서 내면화되고 학습되고 체화한, 

무서운 일본의 힘이다.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살아남고 위치를 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롤모델로 삼고 배워야 할 가치들이 다름아닌 그들의 상인정신에 있다.

'상인의 유전자'가 흐른다는 오사카에는 오래된 기업들이 많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586년에 창업한 건축회사 공고구미(金剛組)이다.

공고구미는 서양에서 가장 오랜 이탈리아의 금세공회사 토리니 피렌체(1369년 창업)

보다 800년 정도 앞서 있다. 600년 역사의 화과자점 스루가야, 500년 전통의 이불가게

니시카와, 400년 역사의 히야제약 등 오사카에는 최소한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업이나 점포가 500 개가 넘는다.

100년 이하의 기업은 명함을 내밀지도 못한다.

 

100년 이하여서... 명함을 내밀지는 못하지만...

아버지는 어부의 아들이었다. 

바닷가의 자그마한 어촌 마을에서 살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논밭도

조금 있었지만 김을 채취하고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셨다.

아버지가 부산 수산중학교에 합격, 이불 짐을 싸놓고 입학일을

기다리던 차에 할아버지께서 젊은 나이인 39살에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동생들과 부모를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는 십대에 고향을 떠나 목포에서

선구점의 점원으로 남의 집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십여 년 넘게 점원 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성실하게 일했고 돈을 모아 독립,

선구점을 차린다. 선구점은 배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을 파는 장사이니

어촌 마을에서 자랐던 아버지가 하기에 가장 만만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많은 돈을 벌었고 망하기도, 흥하기도 하면서 그 가업을 오빠가 이어서

하고 있으니 줄잡아 선구업을 시작한 지가 60~ 70년이 되어 간다.

앞으로 조카가 그 사업을 이어갈지, 막내동생이 이을지는 모른다.

후일 선구점이 문을 닫히게 된다면 마음이 아주 많이... 아플 것 같다.

젊었던 아버지와 엄마, 두 분의 피땀이 어려 있고 나의 어린 시절과 형제들,

오빠의 젊음이 담긴 선구점은 추억과 그리움이 가득한 곳이다. 

가업이 오래도록 이어 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 오사카 상인의 상징은 '노렌'이다.

노렌은 일본의 작은 점포에 치렁치렁 늘어져 있는 무명천을 말한다.

노렌에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자신이 만든 음식이나 상표에 대해 목숨을 걸고

품질을 지킨다는 신용의 정신이 들어 있다.

빛바랜 노렌을 걸고 영업을 하는 초밥집, 다시마 가게, 도시락 가게, 약국,

사진관, 시계점, 꼬치집, 악기점, 옷 가게 등은 나름대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수백 년을 이어왔다.

이러한 가게들의 힘이 모여 오사카 지방의 경제력은 캐나다 전체,

호주 전체와 맞먹는 규모라고 하니 참으로 대단하다. 

 

* 일본에서는 야쿠자도 상인정신을 발휘한다.

일본의 노점상은 야쿠자에게 매달 자릿세를 상납한다.

야쿠자는 그들을 보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장사가 잘 되는 자리를 물색해 준다.

야쿠자라고 해서 우격다짐으로 돈을 뜯어내는 것이 아니고 수금을 하기 위해

상술을 발휘하는 사회가 일본이다.

일본의 야쿠자는 오사카가 본고장이다.

 

* 스루가야 화과자점은 흉년이 들어 명절날 전통 화과자의 맛을 잊지 못하는

고객들에게 10개 들이의 상자 대신 단 한 개의 과자라도 예쁘게 포장, 판매한다.

스루가야는 긴 세월 동안 내란, 기아, 전쟁을 겪었다.

에도시대에는 쇠퇴해가는 전통 과자업계의 현실에 울었고 1945년 전후 시대에는

과자를 만들 재료가 없어서 울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전통 화과자 만드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과자 하나를 지키려는 그들의 장인정신이야말로 첨단기술로써 세계를 제패한

그들의 저력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 요정 가가이로는 '꽃 밖에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꽃보다는 서비스, 서비스보다는 정성, 정성보다는 철저한 보안으로 유명하다.

가가이로의 영업방침은

- 손님의 건강을 생각해서 술을 무리하게 권하지 않는다.

- 손님이 또 올 수 있도록 성의를 다한다.

- 매상보다는 마음에 신경을 쓴다.

현재 가가이로는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이 살아 생전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요정에 올 수 있도록 값싼 요금으로 단체손님을 받기도 한다.

(일본의 할아버지들은 요정에 꼭 가고 싶어 하나 보다. 그렇게 싼 가격도 아닌 것

같은데 30명 단체에 1인당 1~2만엔... 원래 1인당 10~20만엔이라고 한다)

 

** 1857년, 네델란드인에 의해 일본의 사진 역사가 시작되었다.

최초의 사진사인 히코마는 1882년 김옥균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이다. 당시의 사진은 첨단기술 직종으로 큰 인기가 있었지만 여러

대를 내려 오면서 부침이 심했다. 사진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든 시대에

우치다 사진관은 132년간 사진을 찍어왔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마음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늘 반성에

반성을 거듭 해서 고객이 만족할 만한 작품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반성에 반성을 거듭 해서... 참. 울림이 있는 말이다.

우치다의 기업철학이 새삼 존경스럽다.

 

* 기모노를 만드는 가게 고다이마루에 불이 났다.

점포를 수리한 후에 "다시는 화재로 영업을 중지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는 사과문을 붙이고 며칠간 고객들에게 사과의 표시로 복주머니를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불의의 사고로 화재가 나서 영업을 중지하게 되었지만

고객에게 마음을 다해 사과하는 것이다. 단순한 상술로 보여지지는 않는다.

 

* 오사카가 일본경제의 중심이 된 것은 백제와 교역하던 서기 600년대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상인의 도시가 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부터이다.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기 위해 상인의 재력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천황이 있던 교토에 일본 경제력의 중심이 있었지만 실권을 쥐고 있던

그는 천황의 거처보다 큰 오사카성을 건립하고 천하의 물산이 오사카로 모이게

하는 경제정책을 펴나갔다. 

그에 의해 1580~1590년대에 일본의 대표적인 상인들이 오사카에 정착하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1598년 죽기 전에 "이슬로 떨어져 이슬로 사라지는 나의 몸일까.

나니와에서의 일들이 꿈의 또 꿈"이라는 유언을 남긴다.

오사카의 옛 지명인 '나니와' 에는  '한 때의 영화가 꿈'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가 죽고, 일본 천하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물리친 도쿠가와 이데야스에게로 돌아간다.

세키가하라 벌판은 일본을 동과 서로 나누는 분수령이다.

세키가하라의 동쪽은 도쿄가 중심이고 그 서쪽은 오사카가 중심이다.

이것이 일본 지역감정의 출발이다. 도요토미가의 멸망은 일본의 정치, 경제의

중심이었던 오사카의 몰락을 의미하고 그 중심이 도쿠가와의 거처인 도쿄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오사카 사람들은 천하의 상권을 도쿄로 가져간 도쿠가와를 싫어하는 반면

도요토미에게 무한한 애정을 가진다.

미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바늘 장사와 폭력단을 전전했지만 난세를 자신의

힘으로 헤치고 천하의 권력을 쥔 입지전적인 그를 오사카의 신으로 생각한다.

이후 도쿄와 오사카는 일본의 동과 서를 대표하는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음식, 말, 말의 속도 등 모든 면에서 대조를 보인다.

표준어인 도쿄 말씨가 바르고 매끈하지만 속내를 감춘다면 오사카 사투리는

투박하고 거칠며 속마음을 드러낸다.

오사카 상인의 말 중에 '옷 소매 아래의 가격'이라는 말이 있다.

정찰제를 고수하는 도쿄 상인들에 비해 마지막 협상에서 최대한 싼 가격,

투박하고 거친 오사카 상인이 최후로 장사꾼 기질을 드러낼 때 쓰는 말이다.

동서 지역감정의 대립이 일본의 역사와 맞물려 아주 흥미롭다.

지역감정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 "한 푼을 위해 천 리를 간다" 는 오우미 상인의 상술이다.

어깨에 나무 봉 하나 올리고 양쪽에 물건을 매달고 포목, 베, 옷감 등을

지고 다니며 팔았다.

나무 막대기인 천칭봉 하나만 있으면 1000냥의 돈을 번다는

천량천칭(千兩千秤)이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미소짓는 얼굴 속에 혁신적인 상술과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다녔다.

걸어서 북으로 1000킬로미터 밖의 홋카이도, 남으로는 1000킬로미터 밖의

큐슈까지 행상을 다녔다.

심지어 베트남과 태국 등지까지. 1600년대에 동남아를 개척하였다.

"상인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가 벌벌 떤다."는 말은 오우미 상인들에게서

유래했다. 오늘날 일본 굴지의 백화점 세이부 그룹, 종합상사 이토츄,

여성 내의 회사 와코루 등이 오우미 출신 상인들이 일으킨 대기업들이다.

 

" 첫째, 명주옷을 입지 말 것.

  둘째, 밥상에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놓지 말 것.

  셋째, 사업은 형제가 장손을 중심으로 굳게 뭉쳐서 할 것."

         ~~ 266쪽 재벌 미쓰이 집안의 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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