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이 사랑하는 시 55편과 각 시들의
느낌을 담았다. 동서고금을 통해 잘 알려진 세계의 시인들과 명시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시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이 쓰고 읽는 것으로 여겨져 다른 장르보다 읽지 않았다.
좋은 시는 그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러한 해석집이 오히려
불편한 감이 있다.
아마도 중,고교에서 시를 배울 때 시를 분해하는 것에 염증을 느낀 탓일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시 중에는 '피라미드에서의 주문', 일본의 단시와 같은 이색적인 시들도 있고,
타고르, 예이츠, 니체, 바이런, 워즈워드, 셰익스피어 등의 시인들이 쓴 익숙한 시들도 있다.
다른 어떤 시보다 우리 나라 시인들의 시가 멋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좋아하셔서 늘 암송하던 '귀천'의 천상병, 김기림 의 시는
쉽고 감동적이다.
아마도 외국시들의 원어의 의미나 운율을 모르고 있어서 그 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또한, 한국적인 정서가 내마음 속 깊이에 스며 있어서일 것이다.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읽는 그 자체로만 감동을 주는 시, 아무런 주해 없이도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가 아름답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의 학년, 학기의 교과서마다 시는 일정 부분의 자리를 차지한다.
시를 외우게 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단어,구, 절을 조각내어 해석하는 참고서를 달달 외워야
그 시에서 나오는 문제를 맞출 수가 있다.
물론 그런 교육하에서도 그 시절 배웠던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박목월의 나그네,
황지우의 즐거운 편지 등등 아름다운 시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뭔가 잘못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 '널판자에서 널판자로 나는 디뎠네' ~ 에밀리 디킨슨
널판자에서 널판자로 나는 디뎠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머리 근처에 별을 느끼며 발밑에는 바다가 출렁이는 것 같아
나는 알지 못했어 다음 걸음이 내 마지막이 될는지-
저자의 감상 ; 살아 가려면 우리 모두 불안을 감추고 다음 걸음을 준비해야 한다.
시를 읽으며 깊이 공감했다. 작은 아이 대학 입시 기간에 느꼈던 불안감은
나를 옥죄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과에 대한 초조함과 두려움...
인생은 의식하고 산다면 매번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내려놓음을 끝없이 실천해야 할 것 같다.
** '그대가 늙었을 때' ~ 에이츠
그대 늙어 백발이 성성하고 잠이 가득해, 난롯가에서 꾸벅 졸거든,
이 책을 꺼내 들고 천천히 읽으시기를,
그리고 타오르는 장작더미 옆에서 몸을 구부려 약간 슬프게,
중얼거리시기를, 사랑이 어떻게 도망갔는지
저자의 감상 ; 예이츠가 사랑이라는 언어를 잉태하기까지 그의 가슴은 가망없는
연애로 만신창이가 되었으리.
나는 늙어서 백발이 성성하고 눈이 침침해도... 따뜻한 난롯가에 앉아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다가...지나간 추억을 생각하며 그리움에 젖기도 하고... 욕심없이 늙고 싶다.
** '불행한 우연의 일치' ~ 도로시 파커
저는 그의 것이에요, 라고 맹세하며 당신의 몸이 떨리고 한숨이 나올 때
그리고 그 역시 당신을 향한 그의 무한한, 영원한 열정을 맹세한다면-
아가씨, 이걸 알아 둬 당신들 중의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저자의 감상 ; 남녀 사이에 변하지 않는 열정은 없다. 나이 지긋한 여인이
젊은 아가씨에게 넌지시 충고하는 대화체이다.
신춘문예를 위해 억지로 만든 작품에는 이런 생동감이 없다.
시간이 흐르면 모두가 변화한다.
그 순간에는 진실이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보면 한 사람이 아니라 두사람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아들을 꾸짖다' ~ 도연명
백발이 성성하고 살결도 전같이 윤택하지 못한데 비록 아들놈이 다섯이나 있다지만
모두 글공부를 싫어한다네 이것도 하늘이 내린 운명이려니 차라리 술이나 마셔야지
저자의 감상 ; 아들 복이 없는 신세를 한탄하는 쓰라린 현실과 체념하는 시인의 여유가 느껴진다.
다섯이나 되는 아들들 중에 공부하려는 아이가 없다면 참 슬프겠지만...
시를 읽는 나는 그의 한탄과 체념이 재미있다.
**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저자의 감상 ; 만해가 속세의 눈먼 열애에 푹 절어보지 않고서는 이런
징그러운 문장이 나올 수가 없다.
만해의 시들을 보며 남녀간의 애상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너무도 많아
나도 저자와 같은 생각들을 예전부터 해 왔다.
아마도 출가하기 전에 사랑했던 연인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 '새' ~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은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저자의 감상 ; 새를 읽으며 저자는 거퍼 운다.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이 화두였던 천국의 아이, 천상병
아버지는 살아 생전에 그를 무척이나 좋아 하셨다.
'귀천'에서 지상에서의 삶이 아름다운 소풍이었노라는 부분을 특히 더 좋아 하시고
노래 '한계령'을 사랑하시던 아버지. 아버지가 그립다.
** '길' ~ 김기림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누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난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김기림의 '길'은 며칠전에 고등학교 2학년 문학 문제집에서 보았는데
이 책에서 보니 참 반가웠다.
'길'은 봐도 봐도 눈물나는 시이다. 최고로 좋은 시 같다.
그저 가슴에서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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