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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매달린 원숭이
헤르만 요세프 초헤 지음, 박병화 옮김 / 열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한때 그자들은 나무를 오르내렸지. 털이 무성한 험상궂은 낯으로.
그러다가 원시림에서 빠져 나오라는 유혹을 받고는 세상에 아스팔트를 깔고
30층까지 건물을 쌓아 올렸다네.
그자들은 머리로 입으로 인류의 진보를 기록했지.
그러나 진보를 빼고 자세히 보면 근본에 있어서는 여전히
옛날의 그 원숭이라네." ~~ 220-221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
독일의시인 에리히 케스트너는 털복숭이 원시인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걸어온 길을 시로 묘사한다.
인간은 문명의 진보를 이룩했지만 무수한 악행들로 나무를 오르 내리던 석기시절과 똑같은
원숭이로 살아가고 있음을 풍자하고 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원숭이' 제목을 생각하며 내가 매달린건지. 신이 나를 매단건지.
한참을 고민한다. (독일어 원어 제목이 궁금하지만 번역한, 주어진 그대로를 생각해 본다.
책을 다 읽은 뒤로도 제목이 뜻하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을 가르키는지 모르겠다.)
신이 차마 인간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 못해 매달고 있는지...
더 이상 갈 곳이 없이 막다른 곳에 다다른 인간이 십자가 끝에 애원하며 매달린건지...
철학, 신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인문학을 광범위하게 공부한 초헤 신부는 종교적이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인간의 죄의 속성들을 지적한다.
쾌락과 음란, 탐식, 무관심과 나태, 시기, 분노, 자만심, 탐욕 등은 행동이나 의식의 정도가
지나칠 때 죄로 빠져들 수 있는 특징들이다.
이른바 일곱 가지 성격 특성은 인간에게 죄를 강요하는 셈이다.
인간이 아무런 저항없이 악습과 악덕을 반복적으로 행하고 방치할 때 죄는 성립한다.
초헤 신부는 일곱 가지 죄를 새롭게 해석하여 전통적인 죄악의 특징들이 현대사회의 정신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나아가 이런 특징들을 어떤 미덕으로 대체하여 인간이 회심할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1. 쾌락 - 왜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은 의미를 찾지 못하는가?
20세기 문명은 새로운 우상숭배를 만들었다. 그것은 자본과 이윤 그리고 성공에 대한 맹신이다.
성공을 위한 현대인의 노력은 쾌락 추구라는 대죄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공이라는 탐욕에 대응하는 수단은 겸양과 검소한 생활이다.
본질적인 것만이 무자비하게 밀어 닥치는 이 시대의 소비 지향적 흐름에 견딜 수 있다.
삶에 대한 검소한 태도는 성공에 대한 욕구를 덜어 줄 것이며 의미를 찾는 자유의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 사람의 성공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신도. 인간도.
2. 탐식 - 왜 우리는 지나치게 경험을 탐해서는 안되는가?
이 시대는 많은 경험을 쌓는 일이 인생의 핵심 프로젝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욕심껏 경험을 채워 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최대한 많은 정보와 경험을 삼키려는 현대의 탐식증은 육체적인 탐식증과 비슷하다.
육체적인 탐식을 다이어트나 금식으로 치료하듯이 명상이나 기도, 스포츠 혹은 문화 행사에
참여함으로써 좀 더 인생을 의식하고 일상생활의 속도를 늦춘다. 느리게 가기. 금욕하기.
3. 무관심 - 왜 한없는 자유가 우리를 혹사시키는가?
무관심은 미세한 여과장치처럼 우리의 사고에서 현실세계를 차단하고 정신을 움직이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진정한 자유는 '무언가에서' 자유롭다는 말이 아니라 '무언가를 위해서' 자유롭다는 뜻이다.
이 '위한'을 끊임없이 주시해야 하며 '위한'은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야만 자유는 상징성을 벗고
본질적인 의미와 통하게 된다. 무관심과 나태는 인간이 자유의 문제에 매달리는 것을 가로막는다.
나태한 생활을 좇는 것이 편안해 보이는 한 인간은 자유를 누릴 능력을 상실할 것이다.
무관심의 반대는 열정이다. 열정의 미덕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력으로 얻을수 있다.
허위 열정과 참된 열정을 구분하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열정과 벅찬 감동으로 삶을 헤쳐 나가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올바른 방향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4. 시기심 - 왜 우리는 타인의 질투에서 행복을 느끼면 안되는가?
시기심의 의도는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시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시기심과 질투는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상대가 소유하고 있을 때, 그것을 갖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싹튼다.
그러나 시기심이 설정한 목표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진정한 기쁨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시기심과 질투를 상쇄할 미덕은 자비와 베품,기쁨을 나누는 삶의 태도이다.
진정한 인생의 이벤트는 의미에 기초한 순수한 기쁨이고 그 의미를 나누는 체험에 있다.
5. 분노 - 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는가?
"바라기만 하면 당신은 이룰 수 있다."는 달콤한 약속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절망적인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허황된 약속은 인간의 욕구를 놓치지 않는다.
광고 전략가들은 상품을 이상과 결합시켜 판매한다. 광고하는 상품들은 제품 본래의 단순한
기능을 뛰어넘어 제품과 관련된 약속을 믿게 만든다.
가구는 가구로서라 아니라 생활의 편의를, 난방기가 아니라 따뜻함을, 세탁기가 아니라 깨끗한
빨래를 약속한다.
오늘날 TV와 방송매체, 인터넷, 버스, 지하철... 넘치는 광고. 쏟아지는 광고.
광고의 문구들은 언제나 달콤하다.
여자들은 더 예뻐지고 더 럭셔리하고 더 젊어지고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서,
남자들은 더 몸짱이고 고운 얼굴을 가져야 해서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원하기만 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약속은 결국 이기주의를 부추기고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좌절하고 분노한다.
분노를 물리칠 수 있는 미덕은 침착성이고 부동심이다.
침착한 사람은 결코 시류에 따라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변화를 위해 동기부여 세미나도, 광고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부동심을 갖춘 사람은 유행을 따르지 않으며 언제나 그 중심에 서려고도 하지 않는다.
또한 언제나 평상심을 유지한다.
6. 자만심 - 왜 우리는 아무에게도 고마워하지 않는가?
아마도 저자인 초헤 신부가 현대인들의 대죄 가운데에서 가장 목소리를 높인 부분인 것 같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인식은 데카르트적 사고에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몸마저도 단순한 기계의 부속처럼, 영혼이나 정신과 무관하게 돌아가는
살덩어리의 기계로 묘사한다.
이런 사고는 현대인들이 점점 자신의 몸에서 소외를 느끼는데 일조했다.
데카르트의 사고세계에서는 인간을 부품으로 조립하는 일도 가능하게 본다.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미루어 볼 때 충분히 가능하다.
이런 세계관은 18세기의 자유주의 (국가의 간섭을 일체 배제하고 시장의 자율 기능에 맡김)에서
19세기의 고전적 자유주의( 제한된 형태의 자유주의, 일부분 공동번영의 보장)을 거쳐 오늘날
터보 자본주의 (세계화, 다국적 기업, 신자유주의의 여파로 돈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 든다는
자본주의의 공격성을 비판하는 표현) 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기계론적 사고관은 인간적인 문제에 관련할 때 한계를 드러낸다.
인간관계는 사랑과 이해가 오가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긴장과 오해를 빚고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받는다.
다른 사람과 만족스러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용서와 화해의 능력이 필요하고 그것은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파악될 수 없는 영역이다.
작은 것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뻐할 줄 아는 미덕이 자만심을 치료할 것이다.
세상에서 인지할 수 있는 위대하고 놀라운 본질 앞에서 초라한 자신의 실체를 본다.
신에 대한 순수한 순종...
저자는 자만심에 차 있는 사람으로 경제학 관련 상을 수상한 경제학 교수를 예로 든다.
외관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진지한 학문의 의상을 걸치고 모습을 드러낸다고 표현한다.
과연 그럴까. 그런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과 신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굳이 경제학 교수를 ?)
자만심에 관련된 저자의 분노는 이해가 간다.
영적인 세계와 신을 믿는 저자로서는 오늘날 철저히 분해되고 해체된 신관, 그 배경이 되는
기계론적인 세계관과 이에 바탕한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용인한다는 것이 신의 이름으로,
아니 그 자신에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7. 탐욕 - 왜 우리는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는가?
모든 사물을 돈으로 계산하고 측정 가능한 대상으로 치환하려는 시도는 정신적인 인식의 폭을
축소시키다. 돈이 유일한 가치척도가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는 위험이 발생한다.
다행히도 사랑이나 고통, 어쩌면 성공도 아직은 측정할 수 없거나 수량화할 수 없다.
삶을 풍요롭게 하고 가슴 설레게 하며 아름답게 하는 질적인 가치는 수량화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저녁 바다에 펼쳐지는 완벽한 일몰의 풍경을 보는 사람은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체험 속에서 신의 영역으로 들어 간다.
유일성, 진실성, 선함과 아름다움은 존재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의 속성이다.

인간은 기술문명의 발달로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
그러나 죄악은 옛날, 중세, 현대로 시대를 달리 하면서 약간씩 다르게,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형태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 죄악들에서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믿음. 소망. 사랑. 지혜. 정의. 용기. 절제의 삶. 선을 향하는 삶... )
초헤 신부는 책 전체를 통해 말하는 것 같다.
신은 인간이 원하고 추구해야 하는 의미이며 본질이고 자유이다.
신은 죄악들에 대한 해결 방법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라.
그리고 모든 것이 그대 자신에게 달린 것처럼 행동하라!" ~~ 75쪽 이냐시오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