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한정한다면 모든 나라가 60년이 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전후‘를 60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가 아시아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 P12

전후 일본의 체제는 ‘평화헌법‘과 ‘미일 안보조약‘을 공존시켜 미군의 주둔으로 국방예싼을 억제하고 경제성장을 우선시했다. 오키나와에 주일 미군기지(전용시설)의 75%를 집중 배치, 즉 미일 안보체제의 부담과 모순을 오키나와에 떠넘김으로써 그들의 평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 P14

물론 법적으로는 전쟁도 점령도 끝났다. 현재 오키나와는 전투를 치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주민이 60년 전 수용소를 떠나 도착한 고향 마을은 미군기지가 되어 있고, 그 후에도 오키나와인은 총검과 불도저에 토지를 빼앗겼다. 미군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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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 만주 국가 초창기에 몽골족은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들은 군사동맹, 말 그리고 칭기즈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당화의 전통을 제공했다. 원의 옥새와 함께 수많은 민족을 망라하는 세계 제국이라는 개념, 즉 만주족 조상들인 여진의 금이나 명을 광범위하게 초월하는이상적인 통치권 개념이 함께 들어왔다. 혈연을 통한 개인적 연계와 문자를 통한 문학적(글을 통한) 관계는 두 민족을 결속했다. 누르하치는 다른 때는 서로의 차이를 부각시킬지라도, 동맹 관계를 촉진할 때는 종종만주와 몽골의 공통된 유산을 상기시킨다. 모든 몽골족이 신생 만주족국가의 우위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단지 전쟁에서의 결정적 승리가 그들을 항복하도록 설득했다. 만주 국가의 통치자들은 처음부터 서북에있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동맹들의 충성을 보장받기 위해 전쟁, 외교, 경제적 유인을 서로 결합한 전략을 만들어낼 줄 알았다. - P176

두 제국(청과 러시아)의 통치자 누구도 주권국가 사이의 평등한 협상을 믿지 않았다. 쌍방은 모두 조공, 충성, 복종 등 (상대방이 아래에 있다는) 위계적 가정 아래 행동했다. 이런 모순적인 생각 아래에서 어떻게 조약(네르친스크조약)을 협상할 수 있었던 것일까? 협상이 성공한 것은 오로지 나머지 두 당사자가 결정적인 중재자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준가르 몽골국이라는 숨겨진 존재 때문에 두 제국은 전통적 외교 의례를 조정했다. - P221

황제는 의도적으로 유능한 젊은이들을 목표로 삼았는데, 준가르라는 하나의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체부뎅자부가 한 무리의 호이트 몽골인을 사로잡아 충성스러운 할하 몽골에 포상으로 주려 했을 때, 황제는 "강한 장정들은 선별해서 죽이고" 단지 여자들만 종복으로 주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지도자들이 패배한 후 항복한 일부 준가르 젊은이들도 살려둘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들이 ‘한때 족장이었기’ 때문이다. - P357

황제는 "식량이 떨어졌으므로 그들을 없애기는 쉬울 것"이라고 하여, 암묵적으로 고사 작전을 지시했다.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은 남겨 다른 몽골 부족들과 만주족 기인들에게 노예로 주었지만, 그들 부족의 정체성도 잃게 되었다. - P357

목표는 단순한 반란 진압이 아니라 준가르의 저항을 "뿌리째 자르는 것"이었다. 시베리아의 러시아 지사들은 만주족 군대가 장정,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학살해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 P357

학살 정책은 청이 몽골족과의 관계를 관리하던 과거의 방식과 명백히 결별한 것이었다. 이때까지 청의 통치자들은 주로 유목민 분파들을 선별적으로 지지하는, 유구한 전통을 지닌 ‘이이제이’의 외교술을 쓰거나 반란의 주모자만 처형했다. 그들은 이전에 한 번도 종족 학살을 기도하지 않았다. 이 정책으로 청은 중국의 서북 변경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는데, 이는 한 세기가량 지속되었다. 준가르 국가와 민족은 함께 사라졌고, 준가르 초원은 거의 완전한 인구 희박 지역으로 바뀌었다. - P357

최후의 학살에서 건륭제는 이빨을 드러냈다. 그는 스스로를 다양한 민족을 조화로운 영역에서 포괄하고자 하는, 모두에게 공평한 군주라고 칭했다. 그러나 황제의 포용에 저항하는 자들은 멸망을 맞았다. 이 시기부터 황제의 조서들에는 청 중기의 관대함이라는 이상과 압제라는 현실 사이의 긴장이 드러난다. - P360

투르키스탄 원정은 한 세기에 걸친 준가르 원정을 압축한 닮은꼴이다. 호자들은 그렇게 먼 거리를 발판으로 청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받는 통일 독립국가를 세우려 했지만, 오아시스 공동체들이 서로 분열한 데다 청의 병참 장교들이 경악스러울 정도로 보급상의 성취를 거둔 결과 파멸하고 말았다. - P367

토구트의 귀환은, 러시아인들이 말했듯이, 모든 것을 포섭하는 청의 포용 아래에서 ‘민족들 끌어모으기’의 최종판이었다. 그것은 정주 제국과 초원의 천년 투쟁의 두 번째 종결이었다. 한 민족은 말살되었고, 다른 한 민족은 소생하여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말살 후에 재생이 왔고, 이는 제국의 기획으로서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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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형’은 ‘사회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하고 ‘간접지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이 때문에 식민지의 행정관리는 대부분 피지배 토착인을 고용하면서, 이들의 단결과 독립운동을 구조적으로 방지하기 위하여 ‘분할과 통치(divinde and rule)’의 분열정책을 끊임없이 채택하여 집행하였다. 또한 식민지 행정관리 충원을 위하여 피지배 토착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고등교육 실시가 필요했으며, 직접적 독립운동이 아닌 한 민족보존운동이나 민족문화운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방관적 정책을 취하였다. - P1

‘프랑스형’은 역시 ‘사회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했으나 영국형과는 달리 ‘직접지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행정관리는 대부분 프랑스인을 고용하고, 말단 행정직 일부에만 토착인을 채용하였다. 식민지 토착인의 민족보존운동에는 방관적이었으나, 민족종교에 관련된 민족문화운동에 대해서는 교육을 통하여 이를 통제하고, 카톨릭교와 프랑스식 문화체계를 이식시키려고 하였다. - P2

‘네덜란드형’ 역시 ‘사회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했으나 프랑스형과는 달리 ‘간접지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영국형 간접지배와는 약간 달리 식민지 토착인의 민족구성이나 민족전통, 민족관습, 민족문화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이를 침해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시켜 이전과 다름없이 생활하게 해서 독립운동의 저항을 극소화하면서 사회 경제적 수탈을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 P2

‘일본형’은 ‘사회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하면서 프랑스형을 모방하여 ‘간접지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형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소위 ‘동화정책’이란 이름으로 식민지 민족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한 데 있었다. - P2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의 특징 가운데 ‘사회 경제적 수탈정책’으로서는 한국을 1) 일본 사회 경제 발전을 위한 식량공급지로, 2) 일본의 공업발전에 소요되는 원료공급지로, 3) 일본제품의 판매를 위한 독점적 상품시장으로, 4) 일본의 자본수출에 따른 식민지 초과이윤 수탈지로, 5) 일본산업의 생산비를 절하시키는 저렴한 노동력 공급지로, 6)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는 것이 대표적인 주요 정책이었다. 이 위에 1930년대 이후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7) 백주에 식량과 물자를 지정해서 강제 약탈하는 ‘공출제도’, 8) 노동력의 강제징발 동원인 ‘징용’, 9) 한국청년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소모품으로 투입한 ‘징병’, 10) 12~40세의 한국여성을 전쟁 군수노동과 성노예로 여자정신대/종군위안부 강제 징발 등의 식민지 정책을 자행하였다. - P3

일제는 원래 1906년 구한말에 한국 침탈 강점의 무력으로 일본 정규군으로서 2개 사단의 ‘한국주차군’과 ‘헌병사령부’를 설치했었는데, 1915년에 이를 제19사단과 제20사단으로 편제하여 식민지 조선에 상주시켰다. 제19사단은 사령부와 그 제38여단을 함경북도 나남에, 제37여단을 함경북도 함흥에 두었다. 제20사단은 사령부와 제40여단을 서울 용산에, 제39여단을 평양에 두었다. - P7

첫째, 일제는 조선총독에게 입법 사법 행정의 3권과 조선 내의 군통수권 등 모든 권한을 주어 한국인의 저항운동이나 독립운동을 자의적으로 탄압할 수 있게 하였다. 둘째, 조선총독은 일본의 관제상 최고의 친임관으로서 소위 천황에 직속하게 하였다. 그 지위는 내각총리 대신에 버금가는 것으로 하였다. 셋째, 조선총독은 반드시 일본의 육해군 대장으로 임명토록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조서늘 일본 군부의 지배하에 두고 군사방식에 의한 무단통치를 자행하도록 하였다. 넷째, 조선총독에게는 행정권뿐만 아니라 입법권도 부여되었다. 일제는 조선통치에 있어서 일본 ‘헌법’은 적용하지 않으며 ‘법률’이 필요한 부문은 총독의 ‘명령’으로 시행하도록 했고, 이것은 동서고금에 없는 특별 권한이므로 별도로 ‘제령(制令)’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 P13

다섯째, 조선총독은 또한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중략) 조선총독에게는 이 같은 제령으로 식민지 조선에서의 재판소의 설립과 폐지, 관할구역과 그에 관한 변경 등을 결정하며, 판사의 전임, 전관, 정직, 면직, 감봉 등에 대한 권한이 주어졌다. - P14

여섯째, 조선총독은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통수권을 갖고 있었다. 조선총독은 조선주둔의 육해군부대를 통솔 사용할 수 있었으며, 필요할 때에는 군대를 만주, 북중국, 연해주에까지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 P14

일곱째, 조선총독은 당시 ‘이왕직’이라 부르던 왕실과, 소위 ‘조선귀족’에 대한 감독권을 갖고 있었다. - P14

일제는 1910년 한국을 완전식민지로 강점하자 구한국의 13도 11부 317군의 체계와 일제통감부의 이사청, 재무서 체제를 통합해서, 총독의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식민지 체제로 개편하였다. - P17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의 실시 도중인 1914년에 한국민족의 공동체적 단결에 의한 저항의 기반을 파괴하려고 종래의 ‘마을’ 단위 지방행정조직을 전면적으로 통폐합하였다. (중략) 이러한 통폐합이 종래의 단위의 기계적 기능적 통폐합이 아니라 ㄱ군의 ㄴ면 ㄷ마을을 인접 ㄴ군의 ㄹ면에 통폐합시키는 대교란이었다. 그러므로, 종래의 농촌공동체가 급속한 해체의 타격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군청과 면사무소 유치 경쟁을 촉발시켜 농촌사회에 혼란과 갈등이 크게 야기되었다. - P18

헌병경찰제도는 헌병으로 하여금 군사경찰뿐만 아니라 소위 일반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행정을 담당하게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에 의하여 일제 헌병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간인에 대한 사찰을 동시에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일반 경찰도 헌병제도와 결합되어 한국의 민간인을 군사적 방식으로 경찰하게 되었다. - P19

일제는 한국인들이 일제의 극악한 식민지 무단통치에 조금이라도 저항할 기색이 보이면 사전에 이를 철저히 탄압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에게 ‘즉결심판권’을 부여해서, 일제 헌병경찰이 한국인을 영장 없이 체포 연행하여 법원의 재판 없이 3개월까지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였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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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리처드 월린 지음, 서영화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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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나치 참여 문제와 제자들에게 미친 영향력, 그리고 현대 독일의 지성사를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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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리처드 월린 지음, 서영화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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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텍스트를 읽을 때, 외재적 관점과 내재적 관점 동시에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재적 독해란 텍스트 내용만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고, 외재적 독해는 텍스트 내용에 더해 작가의 생애나 사상, 그 텍스트가 생산된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나 역사적 상황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던, 책을 읽던, 필요한 것은 꼼꼼한 텍스트 분석과 작품을 읽을 때 필요한 배경지식이다. 특히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그 텍스트가 나온 시대의 상황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원래 의도와는 다른 해석이나 분석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철학 서적을 읽더라도 역사 공부가 필요하며, 고전 작품을 읽을 때는 먼저 해제를 꼼꼼히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외재적 독해와 내재적 독해가 설득력 있게 조화되면, 철학사나 사상사를 넘어 본격적인 지성사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리처드 월린의 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는 하이데거에게 가장 예민하고 첨예한 논쟁거리인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 전력타락한 스승의 철학과 대결하면서도 스승의 거대한 그림자에 서 있던 제자들(한나 아렌트, 카를 뢰비트, 한스 요나스, 마르쿠제)의 철학을 다룬다. 저자는 기존의 많은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하이데거의 철학이 가지는 역사-정치적 심층 차원을 간과한 채 순수한 텍스트 내재적 독해만을 수행해 나치즘과 하이데거 사상이 가지는 친밀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저자의 결론은 하이데거가 나치즘을 옹호한 것은 결코 순간적인 실수나 덜컹거림이 아니라 존재와 시간등에서 나타나는 그의 철학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점이다. 나치즘과 하이데거 사이에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밝히기 위하여 저자는 본서 2장에서 하이데거와 그의 제자들이 살아가던 19세기 말 20세기 초 독일의 반유대주의와 니힐리즘, 그리고 근대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지적 풍토를 밝힌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흐름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 맥락에서 그는 나치즘을 니힐리즘에서 유럽을 구원할 초인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3~6장은 한나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여 지성사적 맥락에서 그들의 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안에서 하이데거의 그림자 속에 서 있던 이들의 한계를 되짚는다. 7장은 하이데거의 정치철학을 평가하며, 8장은 존재와 시간의 주요 개념과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다룬다. 여기서도 하이데거의 반()근대주의적 사유를 볼 수 있다.


 

아마 한국의 독자들에게 가장 궁금증을 유발하는 인물은 한나 아렌트일 것이다. 중요한 철학자의 전집 번역은 거의 없는 한국에서 한나 아렌트는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될 정도로 그녀의 정치철학은 매우 높은 위상을 차지하며 귀중한 통찰을 준다. 특히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사용한 악의 평범성개념은 홀로코스트 이후 악의 문제와 정치적 책임 문제를 사유하는 데 있어서 여러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러나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그녀의 생애와 하이데거와의 관련성 속에서 재구성하며, 그녀의 시각 안에 내포된 한계를 지적한다.


 

아렌트는 유대인이었지만, 자신의 유대성을 부끄러워했으며, 빈민가의 유대인 거주자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녀는 자신을 좀 더 세련되고 숭고한 정신의 전통, 즉 유럽의 지적 전통과 동일시했다.” 그녀는 자신을 동화된 독일인으로 여겼지, 동화되지 않은 유대인들과는 선을 그었다. 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무신경하게 피해자와 집행자를동일시하는 기술에서도 볼 수 있다.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죄의 근원을 근대성에서 찾는 그녀의 사유이다. 아렌트는 나치가 저지른 범죄는 특정하게 독일이 저지른 범죄라기보다, 정치적 근대성 일반이 갖는 문제의 징후였다고 기술한다. 그녀에게 홀로코스트 같은 문제는 근대 사회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인 문제였다. 그래서 아이히만에게서 잘못된 행위가 규범이 되어버린 거대 관료기계로부터 파생되는 평범성과 무사유성을 보았던 것이다. “관료주의적 전문화와 노동 분업이라는 근대의 원칙은 홀로코스트의 집행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그녀가 꺼내든 개념은 하이데거의 비본래성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주의적 해석은 당연하게도 특정한 집단학살이 가지는 특수성을 포착해내지 못하며 나치의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한나 아렌트의 근대성 비판과 나치에 대한 기능주의적 접근은 하이데거와의 관련성 속에서만 온전히 해명될 수 있다.



 

스승의 철학과 거리를 두고자 했으나 그렇지 못하였던 아렌트의 한계는 다른 제자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 책에서 다룬 4명의 제자들은 모두 공통으로 하이데거처럼 근대성, 근대주의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을 느꼈으며, “근대를 죄악하는 보수주의적 관점을 공유하였다. 그들은 정치적 근대성, 즉 민주주의, 자유주의, 개인의 권리 기타 등등의 본성에 관한 일련의 뿌리 깊은 편견을 받아들였다.”


 

물론 저자의 하이데거 독법에 비판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소위 우리 시대의 사상가라는 슬라보예 지젝은 월린을 포함한 자유민주주의 비평가들이 자칫 하이데거가 근대성의 기본 교의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물었다. 지젝은 하이데거의 근대성 비판을 매우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듯하다. 그는 하이데거가 유대성을 언급한 것은 인종으로서의 유대인이 아니라 근대 기술 문명에서 절정에 달한 제작성의 태도를 비판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장난이다. 역자도 지적했듯이 왜 다른 민족이 아닌 유대인이 서구 형이상학적 사유, 곧 제작성의 사유와 태도를 대표하는가?” 유대성이라는 누가 봐도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단어를 쓰면서, 이 단어는 전혀 민족적이지 않고 인종적이지도 않다고 해명하는 것은, 조잡한 언어적 환원주의이고, 기만이다. 근대성 비판과 극복은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이 가져온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도, 이를 탈실재화하고 탈맥락화하는 것이 진정 근대성 비판인지 되묻고 싶다.

 


책이 꽤 전문적이기는 하지만, 철학책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면, 적어도 현존재(Dasein)’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면, 책을 읽는 데 크게 어려운 점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제자들을 다룬 부분은 꽤 재밌다. 서문이 제1판과 제2판 두 개가 있는데, 옮긴이의 말과 제1판 서문을 읽고 본문을 읽은 뒤 제2판 서문을 읽는 것이 나을 것 같다. 2판은 레오 스트라우스, 레비나스 같은 이들과 하이데거 사상과의 연관성을 밝히는데, 이 부분은 넘겨도 무방할 듯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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