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과 만나다 - 신약성서 신학의 정점, 그리스도교 신학의 원천 비아 만나다 시리즈
외르크 프라이 지음, 김경민 옮김 / 비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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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를 읽으며 좀 친다고 생각했다. 다 읽으니 멍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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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소년문고를 이야기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우출판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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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코멘트는 예상한 것처럼 매우 짧은 게 아쉬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되돌아볼 만한 책. 미야자키의 팬이라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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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지브리 입체건축전 도록 (복각판)
스튜디오 지브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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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뭉클해지는 지브리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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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의 역사 - 각주는 어떻게 역사의 증인이 되었는가
앤서니 그래프턴 지음, 김지혜 옮김 / 테오리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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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양에서의 역사서술의 역사(history of historiography)를 연구한 아르날도 모밀리아노(Arnaldo Momilgliano)는 에드워드 기번의 최대 성취가 역사서술에서 학식(erudition), 철학, 서사라는 고전적 역사서술의 세 요소를 종합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식이란 과거에 대한 지식이며, 철학은 과거의 사실에서 이론화와 도식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서사는 사건과 행위가 어떠한 인과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는지를 제시하는 기술이다. 학식이 없으면, 과거를 다루는 역사의 고유성을 상실하며, 철학이 없으면 역사는 반대로 과거만을 그대로 되풀이하게 될 것이며, 서사가 없다면 사건과 다른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가 고유한 학문 분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학식, 서사, 철학이 모두 필요하며, 에드워드 기번이 이 모두를 성취한 역사가였고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학식과 서사와 철학의 종합을 확인할 수 있다.

모밀리아노의 제자 그래프턴은 모든 학문의 표준적 도구인 각주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위와 같은 구도를 염두에 있는 듯하다. 각주는 오늘날의 역사학의 일부가 되면서 학식-철학-서사의 종합을 이루는 일부가 되기도 하였다. 서사를 만드는 것과 주석을 다는 것은 근대 역사학의 글쓰기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 역사학자는 각주를 통해 주장의 신뢰성을 담보하며 서사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역사학의 텍스트는 각주가 기록하는 연구조사와 비평적 주장의 형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각주의 역사를 본다는 것은 근대적 역사학이 형성된 과정의 역사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에서 그와 같은 각주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는 로마, 빈, 독일의 각종 기록보관소와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과거의 공문서를 열람했다. 역사가로서 연구에 필요한 사료를 수집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저서에는 이런 사료 수집 활동으로 모은 막대한 분량의 비판적 부록과 각주가 포함되었다. 선생으로서 랑케는 비공식적인 세미나를 진행하여 학생들에게 1차 사료만을 읽히는 훈련을 시켰다. 이러한 랑케의 모습에서는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각주를 역사학자의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았다. 또한 그는 엄밀하고 전문적인 사료비평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제도인 세미나를 창설했다.

그런데 역사학자 앤서니 그래프턴에 따르면 이러한 각주가 역사학의 전통이 된 데에 랑케가 새롭게 기여한 바는 별로 없으며, 오히려 랑케는 이미 성립된 전통 위에 서 있었던 존재였다. 더욱이 랑케가 활동하던 19세기는 각주의 역사에서 전성기가 아니라 쇠퇴의 시기였다. "각주가 표준적인 학문적 도구의 지위로 부상하면서 각주의 양식은 크게 축약된 기록 인용의 목록으로 쇠퇴해버렸다. 랑케는 근대 역사학의 장치를 창조한 연금술사로 여겨지지만, 사실 각주를 싫어했고 각주를 만드는 데에는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나 책의 부록을 쓸 때 기울였던 세심한 주의와 창의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래프턴은 19세기가 아니라 18세기에 각주가 가장 번성했다고 주장한다. 18세기 각주는 오늘날처럼 본문의 진실성을 지탱하는 용도 외에도 본문의 서사에 대한 역설적인 언급으로도 기여했다. 18세기 각주는 사료고증을 넘어서 마치 그리스 비극에서 극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도 하고 극을 능동적으로 이끄는 코러스와 같은 탁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각주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먼저 르네상스 인문주의 전통을 생각할 수 있다. 15세기 문헌학자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가 고대 라틴어를 고증해서 세속 황제가 교황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가 위조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처럼, 르네상스 시기에는 문헌학과 과거 자체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는 호고(好古)주의적 태도가 배태되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는 역사적 맥락을 중시하고 과거 자료의 권위를 우선시했다. 그들은 "증언의 직접적 권위"를 믿었다. 그래서 그러한 증언이 담겨 있는 과거 연대기 작가뿐 아니라, 수많은 고대 자료와 문서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한 뒤 각주라는 형식을 통해 내용을 제시했다. 일부는 독자들이 사료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자 라틴어 문헌을 토착어로 번역하기도 했다(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권위 있는 자료를 더 직접적으로 인용했다는 것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역사적 권위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각주의 역사에는 다른 전통들도 개입되어 있으며, 각주를 주된 학문적 방법으로 삼게 된 논쟁적 맥락을 봐야 한다. 근대 역사학에서 중요한 또 다른 전통은 호고주의 전통과 교회사 전통이다. 그 기원은 고대에서부터 찾을 수 있지만, 호고주의는 14~15세기에 성장하여 16~17세기에 번성하였다. 호고가들은 구체적으로, 텍스트를 수집하고 고대 동전의 무게를 측정하며 고대 건물을 발굴하는 등 주로 과거의 사실을 최대한 정확하게 복원하여 수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래서 이들의 작업물은 "풍부한 증거와 그 증거를 활용하는 일단의 명확한 기준"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의 기록을 단순히 반복하는 데서 그쳤기 대문에 글 자체의 문학성은 빈약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교회사는 이러한 호고주의 작업의 일환이었다. 가톨릭의 권위에 신학적/역사학적 도전을 가했던 종교개혁자는 라틴어 성서가 아닌 원전 그대로의 성서의 권위를 옹호했으며, 가톨릭의 권위를 해체하기 위해 대량의 정보를 수집하여 교회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렇게 과거 자체에 대한 탐구는 역설적으로 유럽의 17세기에 권위와 증거의 문제를 야기했다. 즉, 무엇이 어떠한 설명을 권위 있는 것으로 만드는지에 대한 질문이 첨예하게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질문이 중요해진 이유는 그 시기가 교회는 물론이고 다른 전통적 권위들이 해체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프랜시스 베이컨, 로버트 보일, 파스칼 등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적 학문 체계의 권위를 해체했으며, 스피노자는 성서의 역사적 권위를 해체했고, 왕의 정치적 권위도 해체되었다(잉글랜드 내전과 프롱드의 난). 이렇게 거꾸로 뒤집한 세상에서는 정확한 지식, 진리라는 생각은 와해되기 쉬운 이상이었다. 여기서 역사적 방법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하나는 과거 역사서술을 두고 서로 다른 프로테스탄트 종파와 가톨릭의 비판에서 맞서 싸우는 것이었고, 경험적/역사적 지식을 무용한 것으로 여기며 순수 이성적이고 수학적인 추론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 식의 회의주의에 맞서는 것이었다.

"17세기 말 역사서술의 가장 장중하고 영향력 있는 작품"인 <역사비평사전>(Dictionaire historique et critique, 1696)을 저술한 피에르 벨(Pierre Bayle)은 과거와 현대 학자들의 오류를 밝히고 더 정교한 방법론을 구축하면 지난한 학술 논쟁을 종식시키고 역사학의 확실성이 추상적인 수학과 형이상학의 확실성보다 더 우월하고 더 확실하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방법론의 우월성을 담보하는 수단이 바로 각주이다. 벨은 단순히 각주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각주를 통해 역사학과 철학을 결합하고자 했다. 각주는 단순히 역사학의 명제를 증명하는 데서 나아가 각주로써 역사학의 명제의 참거짓을 판단하는 규칙을 지정할 수 있었다. 즉, 어떠한 일반 원리를 제시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또한 "역사적 증언의 신뢰성"(de fide historia)을 담보하기 위한 고민은, 더 엄격하게 원자료의 권위를 고증하기 위한 형식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가령 각주는 정확한 인용 형식을 갖추어야 했고, 독자들이 인용된 사료와 원전의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 독자는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었으며, 그러한 엄격한 형식만이 각주를 비롯하여 역사적 지식의 확실성을 높이는 수단이었다. 역사학적 지식의 획득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형식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논쟁하고, 토론하면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의 작가들은 "사료고증의 근대적 체계 비슷한 어떠헌 것을 산출했다." 그리하여 "18세기를 지나면서 정확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역사적 설명에 차츰 파고들었는데...역사가는 하나의 선명하고 교훈적인 서사의 도덕적 문학적 미덕을 계속 믿옸지만, 사료의 비판적 논의에 대한 더 새로운 열망도 품었다." 즉 역사가들은 역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더해 역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근대적 체계 비슷한' 것의 탄생일 것이다. 그리고 각주는 이제 모든 역사가들의 표준적인 작업 절차가 되었다.

18세기 역사서술의 역사에서 단연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명한 작품인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17세기에서 18세기의 역사가들이 성취한 전통의 정점에 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계몽사상가들의 아이러니와 폭넓은 관점과, 라틴어를 사용하며 고대와 중세 세계를 현학적으로 까다롭게 다루는 연구자로서 많은 계몽사상가의 놀림감이 되었던 호고가들의 세밀한 학식을 결합시켰다. 기번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의 지극히 고전적인 언어를 사용했지만, 황제들의 선정적인 삶은 물론이고 먼지 덮인 사료의 세부사실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앞서 말했듯 기번의 저작은 학식과 철학과 서사를 결합한 작품이다. 그의 학식은 각주를 통해 충분히 볼 수 있다. <쇠망사>에는 '기번의 수다'라고도 불릴 만큼 장황하고 압도적인 숫자의 각주가 달려 있다. 그 각주에서 기번은 고대의 건축물의 정확한 길이를 논하기도 하며, 자신의 앞선 학자들(Hume, Middleton 등)의 견해를 언급하며 그들의 오류가 무엇인지 비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은 지난 2세기간의 호고가들의 업적의 결과였다.

그러나 기번의 차이는 호고가처럼 "주석이 없는 논증"이 아니라 "주석이 있는 서사"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쇠망사> 제15장 "그리스도교의 발전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사상, 풍습, 신도 수 및 상황, 각종 의식, 학예, 축전"에서 기번은 초기 그리스도교 성장 요인 중 하나로서 기적의 사용을 논하면서 기적이 특정 시대에만 나타나고 어느 시점부터는 나타나지 않는 점을 논한다. 그 부분에 달린 각주에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는...자신의 기적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오랜 교회사를 통해서 자신이 기적을 행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성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쇠망사> 1권, 민음사)라고 언급한다. 서사가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라면, 기번에게 각주는 이러한 인과관계를 더 단단하게 보강함으로써 서사를 이끄는 장치였다. 이는 전거 목록 제공과 부연 설명 쯤으로 끝나는 현대의 각주와는 다른 양상이다. 이처럼 기번의 <쇠망사>는 18세기 지성사의 역작일뿐 아니라 각주라는 학문적 도구의 역사의 진수가 담겨 있는 역사적인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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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mans had reason to dread, that the disjointed members would soon be reduced by a civil war under the dominion of one master; but if the separation was permanent, the division of the provinces must terminate in the dissolution of an empire whose unity had hitherto remained inviolate.

Had the treaty been carried into execution, the sovereign of Europe might soon have been the conqueror of Asia; but Caracalla obtained an easier, though a more guilty, victory.

- 국역본
로마인들은 제국이 나누어진다면 내전이 발생해서 다시 한 사람의 황제 통치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했다. 반면 분리가 영속화된다면 속주들의 분리는 결국 지금까지 침범되지 않고 지켜져 온 제국의 통일성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틀림 없었다.

이 협상안이 실행되었다 해도 유럽의 황제가 곧 아시아의 황제를 정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좀 더 쉬우면서도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승리를 낚아챘다.

- 번역 수정
로마인들은 제국이 나누어진다면 내전이 발생해서 다시 한 주인의 지배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며 두려워했다. 반면 분리가 영속화된다면 속주들의 분리는 결국 지금까지 침범되지 않고 지켜져 온 제국의 통일성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틀림 없었다. (154p)

이 협상안이 실행되었다 해도 유럽의 주권자가 곧 아시아의 정복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좀 더 쉬우면서도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승리를 낚아챘다.

세베루스의 사망 이후 그의 두 아들 사이의 권력 투쟁을 서술하는 부분이다.
크게 오역이라 할 것은 아니지만, 좀더 원문에 맞춰서 직역했다.




But as the Roman emperors were still considered as the generals and magistrates of the republic, their wives and mothers, although distinguished by the name of Augusta were never associated to their personal honors; and a female reign would have appeared an inexpiable prodigy in the eyes of those primitive Romans, who married without love, or loved without delicacy and respect. The haughty Agripina aspired, indeed, to share the honors of the empire which she had conferred on her son; but her mad ambition, detested by every citizen who felt for the dignity of Rome, was disappointed by the artful firmness of Seneca and Burrhus.

- 국역본
그러나 로마 황제는 군대의 총지휘관이자 공화국의 최고행정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부인이나 어머니는 황후로서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기는 했지만 직접 국정에 참여한 일은 전혀 없었다. 사랑 없이 결혼했고 사랑하더라도 존경심이나 배려는 결여되어 있었던 그녀들의 통치는 고대 로마인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묘한 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대담했던 아그리파나 황후가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황제로 만들었을 때, 그녀는 제국을 아들과 공동 통치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위엄을 중요시하는 시민들이 그녀의 야심을 혐오했고, 세네카와 부루스가 교묘하면서도 확고하게 저지했기 때문에 그녀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175p)

- 번역수정
그러나 로마 황제는 군대의 총지휘관이자 공화국의 최고행정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부인이나 어머니는 황후로서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기는 했지만 직접 국정에 참여한 일은 전혀 없었다. 사랑 없이 결혼했고 사랑하더라도 존경심이나 배려는 결여되어 있었던 그녀들의 통치는 고대 로마인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묘한 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대담했던 아그리파나는 자신이 아들에게 수여한 제국의 명예를 아들과 나누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위엄을 중요시하는 시민들이 그녀의 정신 나간 야심을 혐오했고, 세네카와 부루스가 교묘하면서도 확고하게 저지했기 때문에 그녀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어머니인 마마이아의 권력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로마제국에서 권력에 가까웠던 황후들을 논의하고 있다.
원문에 없는데 역자들이 추가한 부분은 삭제하고 일부 표현을 고쳐봤다.



The Prætorian guards were attached to the youth of Alexander. They loved him as a tender pupil, whom they had saved from a tyrant‘s fury, and placed on the Imperial throne. That amiable prince was sensible of the obligation; but as his gratitude was restrained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nd justice, they soon were more dissatisfied with the virtues of Alexander, than they had ever been with the vices of Elagabalus.

- 국역본
근위대는 알렉산데르 황제가 어렸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 자신들이 폭군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황제의 자리에 앉혀 준 연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황제를 사랑했던 것이다. 황제는 그들에게 감사의 의무감을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감사는 이성과 정의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근위대는 곧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악행보다도 알렉산데르 황제의 미덕과 선정에 더 큰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 번역수정
근위대는 어린 알렉산데르에게 접근했다. 자신들이 폭군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황제의 자리에 앉혀 준 연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황제를 사랑했다. 이 정감가는 군주는 그들에게 의무감을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감사는 이성과 정의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근위대는 곧 엘라가발루스의 악행보다도 알렉산데르의 덕성에 더 큰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기번은 로마제국의 역사에서 군대로 인한 정치상의 혼란을 반복해서 지적한다. 어쩌면 잉글랜드에서 9년 전쟁 이후 강화된 군 전력에 대한 논쟁의 역사를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단락에서 기번은 알렉산데르가 군대 개혁을 시행하면서 군대와 관계가 악화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국역은 의역이 많이 가해져 직역체로 바꾸었다.



But the favor which implied a distinction was lost in the prodigality of Caracalla, and the reluctant provincials were compelled to assume the vain title, and the real obligations, of Roman citizens. Nor was the rapacious son of Severus contented with such a measure of taxation as had appeared sufficient to his moderate predecessors. Instead of a twentieth, he exacted a tenth of all legacies and inheritances; and during his reign (for the ancient proportion was restored after his death) he crushed alike every part of the empire under the weight of his iron sceptre.

- 국역본
그러나 카라칼라 황제의 방탕과 낭비하에서 시민이라는 우월적 지위가 갖는 혜택들은 차츰 사라졌고, 속주민들은 내키지는 않는데 로마 시민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을 얻는 대신 세금을 충실히 부담하라고 강요받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랐던 세베루스의 탐욕스러운 아들은 온건한 전임 황제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세금의 비율에도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20분의 1이었던 상속세 비율을 10분의 1로 인상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치세 동안 (사망 후에는 다시 20분의 1의 비율로 돌아갔다) 제국의 방방곡곡이 그의 무정한 학정 밑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 번역수정
그러나 카라칼라 황제의 방탕과 낭비하에서 시민이라는 우월적 지위가 갖는 혜택들은 차츰 사라졌고, 속주민들은 내키지는 않는데 로마 시민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을 얻는 대신 세금을 충실히 부담하라고 강요받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랐던 세베루스의 탐욕스러운 아들은 온건한 전임 황제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세금의 비율에도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20분의 1이었던 상속세 비율을 10분의 1로 인상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치세 동안 (사망 후에는 다시 20분의 1의 비율로 돌아갔다) 그는 제국의 모든 곳을 강력한 왕권으로 짓밟았다.


*알렉산데르 이후 기번은 로마의 재정과 속주 조세에 대해서 논의한다. 이 부분도 군대와 관련이 있다. 군대를 유지하는 데 막대한 세금이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군대의 힘이 내전으로 인해 증가하자 ˝군대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채워줘야˝ 했기 때문이다(193p).
기번은, 전 속주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한 카라칼라 칙령을 그러한 탐욕의 발로로 해석한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방탕한 생활방식 때문에 그 조세 수입마저 낭비했고, 모든 로마 제국이 그의 학정으로 피해를 보게 되었다.
국역본은 내가 인용한 단락의 마지막 문장을 원문의 뉘앙스와 다르게 옮겼다. 나는 더 직역했는데, iron sceptre는 내가 옮긴 것보다 더 나은 번역어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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