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칼 바르트 지음, 문성모 옮김 / 예솔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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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20세기 신학의 거두 칼 바르트가 모차르트에 대하여 쓴 글들을 묶은 아주 얇은 소책자다. 칼 바르트가 썼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 바르트의 신학을 전혀 모르더라도 매우 쉽게 읽을 수 있다. 바르트의 신학과는 무관하게 모차르트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는 글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쓴 책'이라는 것에 관심을 둔 사람이면 실망할 수 있지만, 모차르트를 좋아하거나 '바르트가 모차르트에 대하여 쓴 책'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책에는 4편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모차르트에 관한 고백' '모차르트에 대한 감사의 편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자유'가 실려 있는데, '고백'과 '감사편지'는 제목 그대로 바르트가 모차르트에게 전하는 사적인 고백과 감사가 담겨 있다. 기억나는 건 천국에 가면 자신은 모차르트를 누구보다 먼저 만나고 싶다는 것. 모차르트에 관심이 있다면 바르트가 모차르트 음악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있는 3장과 4장이 좀 읽을 만한데, 두 장의 내용이 다소 겹치는 것이 많다.


바르트가 보는 모차르트 음악의 핵심은 '자유분방함'이다. 모차르트는 프랑스혁명과 같은 당대 정치적 사건과 직접적인 접촉이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괴테도 거의 읽은 적 없을 정도로 독서를 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음악에 '천착'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는 자연계나 정신계에서 단지 그의 음악에 필요한 사건이나 자료나 과제들을 찾고 발견해 낸 것 뿐"이며 "하나님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하늘과 땅에 대해서도, 삶이나 눈앞에 닥친 죽음에 대해서도, 그는 귀와 가슴에 아무런 갈등 없이 살아간 진정한 자유인"이었으며, 이런 자유분방함이 모차르트의 음악을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바르트의 설명이다.


또 염두에 둘 만한 설명은 모차르트는 자신의 감정이나 존재 같은 주관적인 것을 음악의 테마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베토벤처럼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고백하려 하지도 않았고 바하처럼 음악에 어떤 메시지를 담지도 않았다. "모차르트는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뿐입니다." 이러한 바르트의 설명을 따른다면,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 올바른 감상 태도는 그 안에서 구태여 종교적인 메시지나 역사적 맥락 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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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춘 신부의 단테 신곡 강의
김산춘 지음 / 문학수첩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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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편만 좀 읽어볼 만했지만, 전반적으로 이마미치 도모노부 <단테 신곡 강의>가 더 상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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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는 기술 - 명화의 구조를 읽는 법
아키타 마사코 지음, 이연식 옮김 / 까치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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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문학, 영화 예술에서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은 형식과 구조에서도 일급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림에서 색깔, 역사적 배경만 이해하던 나에게는, 명화의 구조와 이를 읽는 법을 알려주는 이 책은 정말 필요했던 책이다. 얼른 다른 그림을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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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 - 책과 독서, 인류의 끝없는 갈망과 독서 편력의 서사시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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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망구엘의 지식 속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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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 책에 대해서는 차보람 교수의 해설, 김진혁 교수(<신학의 영토들> 참고)와 이종태 교수의 꼼꼼하고 예리한 서평들이 있으므로, 서평을 쓰는 대신 대신에 이 책과 함께 읽을 만한 책 두 권을 소개하려 한다.

*이종태 "'빈 무덤'이라는 격노"

링크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3116

첫 번째는 마크 래리모어의 <욥기와 만나다>(강성윤 옮김, 비아)이다. <욥기와 만나다>는 욥기의 해석사 또는 욥기의 사상사라고 할 수 있는 책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욥기가 어떻게 수용되고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루었다.



이 책을 추천한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바다의 문들>이 욥기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바다의 문'이라는 제목 자체가 욥기 38장 8절에서 차용했다는 것 이외에도 <바다의 문들>의 구조가 욥기와 유사한 부분이 있다. 욥기에서는 욥의 고통이 먼저 있고, 욥과 세 친구의 대화가 이어지며, 엘리후의 일방적 연설을 거쳐 하느님과 욥의 대화로 마무리된다. <바다의 문들>은 먼저 인도양 쓰나미라는 재난을 묘사한다. 그에 이어 욥의 세 친구와 대응시킬 수 있는 잘못된 신정론에 대한 저자의 논박, 형식상 엘리후의 연설과 대응되는 저자의 신학적 주장이 있고, 책의 마지막을 "그때에 옥좌에 앉으신 분을 말씀하실 것이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라는 문장이 장식한다. 하트의 책을 통해서 <욥기>를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둘째 <욥기와 만나다>를 통해 사상가들이 욥기를 전유하여 인간의 고통, 세상의 본질, 신과 인간 등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했는지를 접할 수 있다. 그레고리우스, 마이모니데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 등의 주장을 읽고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를 비교해보는 것도 <바다의 문들>을 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는 방식이겠다.



또 다른 책은 유대교 출신 성서학자 존 D. 레벤슨의 <하나님의 창조와 악의 잔존>(홍국평 외, 새물결플러스)이다. 이 책은 유대교적 신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의 문제'는 선한 신이 악이 발생하는 세상을 창조한 이유와 이어지기에, 필연적으로 '창조론'의 문제와 엮일 수밖에 없다.


레벤슨은 유대교와 다른 고대 자료를 통해 해석한 창조기사는 기독교인에게는 상당히 이질적이고 충격적이다. 창조는 '무'가 아니라 혼돈과 무질서에서 시작되었다. 태고의 혼돈이 창조 이전에 이미 있었으며, 창조 과정에서 이 혼돈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억제되고 제한되었을 뿐이다. 레벤슨이 그리는 창조의 드라마는 하느님이 악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이야기이며, 그 드라마는 인간의 순종을 통해 완성된다. "고난 당하는 자가 원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처방'이다." 고난의 원인이나 악의 기원은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인간은 세계에 잔존한 악을 인정하고 하느님에 대한 제의를 통해 악과 치열하게 맞서 싸워야 한다.



레벤슨의 생각과 하트의 생각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하트는 악이 선의 부재라고 보는 데 반해, 레벤슨은 비실재를 악과 동일시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악의 문제에 관해 유대교 배경의 성서신학자와 정교회 배경의 신학자의 주장이 공명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고, 같은 주제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도 획득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레벤슨의 책은 <욥기와 만나다>와 달리 학술서적이라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려면 구약학에 대한 기본 지식은 갖추어야 한다. (이에 대해 그나마 저항감을 덜 느끼면서 읽을 만한 책이 <성서의 형성>이나 <문학으로서의 성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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