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의 역사 - 각주는 어떻게 역사의 증인이 되었는가
앤서니 그래프턴 지음, 김지혜 옮김 / 테오리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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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양에서의 역사서술의 역사(history of historiography)를 연구한 아르날도 모밀리아노(Arnaldo Momilgliano)는 에드워드 기번의 최대 성취가 역사서술에서 학식(erudition), 철학, 서사라는 고전적 역사서술의 세 요소를 종합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식이란 과거에 대한 지식이며, 철학은 과거의 사실에서 이론화와 도식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서사는 사건과 행위가 어떠한 인과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는지를 제시하는 기술이다. 학식이 없으면, 과거를 다루는 역사의 고유성을 상실하며, 철학이 없으면 역사는 반대로 과거만을 그대로 되풀이하게 될 것이며, 서사가 없다면 사건과 다른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가 고유한 학문 분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학식, 서사, 철학이 모두 필요하며, 에드워드 기번이 이 모두를 성취한 역사가였고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학식과 서사와 철학의 종합을 확인할 수 있다.

모밀리아노의 제자 그래프턴은 모든 학문의 표준적 도구인 각주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위와 같은 구도를 염두에 있는 듯하다. 각주는 오늘날의 역사학의 일부가 되면서 학식-철학-서사의 종합을 이루는 일부가 되기도 하였다. 서사를 만드는 것과 주석을 다는 것은 근대 역사학의 글쓰기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 역사학자는 각주를 통해 주장의 신뢰성을 담보하며 서사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역사학의 텍스트는 각주가 기록하는 연구조사와 비평적 주장의 형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각주의 역사를 본다는 것은 근대적 역사학이 형성된 과정의 역사를 보는 것이다.

우리는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에서 그와 같은 각주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는 로마, 빈, 독일의 각종 기록보관소와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과거의 공문서를 열람했다. 역사가로서 연구에 필요한 사료를 수집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저서에는 이런 사료 수집 활동으로 모은 막대한 분량의 비판적 부록과 각주가 포함되었다. 선생으로서 랑케는 비공식적인 세미나를 진행하여 학생들에게 1차 사료만을 읽히는 훈련을 시켰다. 이러한 랑케의 모습에서는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각주를 역사학자의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았다. 또한 그는 엄밀하고 전문적인 사료비평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제도인 세미나를 창설했다.

그런데 역사학자 앤서니 그래프턴에 따르면 이러한 각주가 역사학의 전통이 된 데에 랑케가 새롭게 기여한 바는 별로 없으며, 오히려 랑케는 이미 성립된 전통 위에 서 있었던 존재였다. 더욱이 랑케가 활동하던 19세기는 각주의 역사에서 전성기가 아니라 쇠퇴의 시기였다. "각주가 표준적인 학문적 도구의 지위로 부상하면서 각주의 양식은 크게 축약된 기록 인용의 목록으로 쇠퇴해버렸다. 랑케는 근대 역사학의 장치를 창조한 연금술사로 여겨지지만, 사실 각주를 싫어했고 각주를 만드는 데에는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나 책의 부록을 쓸 때 기울였던 세심한 주의와 창의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래프턴은 19세기가 아니라 18세기에 각주가 가장 번성했다고 주장한다. 18세기 각주는 오늘날처럼 본문의 진실성을 지탱하는 용도 외에도 본문의 서사에 대한 역설적인 언급으로도 기여했다. 18세기 각주는 사료고증을 넘어서 마치 그리스 비극에서 극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도 하고 극을 능동적으로 이끄는 코러스와 같은 탁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각주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먼저 르네상스 인문주의 전통을 생각할 수 있다. 15세기 문헌학자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가 고대 라틴어를 고증해서 세속 황제가 교황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가 위조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던 것처럼, 르네상스 시기에는 문헌학과 과거 자체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는 호고(好古)주의적 태도가 배태되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는 역사적 맥락을 중시하고 과거 자료의 권위를 우선시했다. 그들은 "증언의 직접적 권위"를 믿었다. 그래서 그러한 증언이 담겨 있는 과거 연대기 작가뿐 아니라, 수많은 고대 자료와 문서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한 뒤 각주라는 형식을 통해 내용을 제시했다. 일부는 독자들이 사료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자 라틴어 문헌을 토착어로 번역하기도 했다(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권위 있는 자료를 더 직접적으로 인용했다는 것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역사적 권위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각주의 역사에는 다른 전통들도 개입되어 있으며, 각주를 주된 학문적 방법으로 삼게 된 논쟁적 맥락을 봐야 한다. 근대 역사학에서 중요한 또 다른 전통은 호고주의 전통과 교회사 전통이다. 그 기원은 고대에서부터 찾을 수 있지만, 호고주의는 14~15세기에 성장하여 16~17세기에 번성하였다. 호고가들은 구체적으로, 텍스트를 수집하고 고대 동전의 무게를 측정하며 고대 건물을 발굴하는 등 주로 과거의 사실을 최대한 정확하게 복원하여 수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래서 이들의 작업물은 "풍부한 증거와 그 증거를 활용하는 일단의 명확한 기준"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의 기록을 단순히 반복하는 데서 그쳤기 대문에 글 자체의 문학성은 빈약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교회사는 이러한 호고주의 작업의 일환이었다. 가톨릭의 권위에 신학적/역사학적 도전을 가했던 종교개혁자는 라틴어 성서가 아닌 원전 그대로의 성서의 권위를 옹호했으며, 가톨릭의 권위를 해체하기 위해 대량의 정보를 수집하여 교회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렇게 과거 자체에 대한 탐구는 역설적으로 유럽의 17세기에 권위와 증거의 문제를 야기했다. 즉, 무엇이 어떠한 설명을 권위 있는 것으로 만드는지에 대한 질문이 첨예하게 제기된 것이다. 이러한 질문이 중요해진 이유는 그 시기가 교회는 물론이고 다른 전통적 권위들이 해체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프랜시스 베이컨, 로버트 보일, 파스칼 등은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적 학문 체계의 권위를 해체했으며, 스피노자는 성서의 역사적 권위를 해체했고, 왕의 정치적 권위도 해체되었다(잉글랜드 내전과 프롱드의 난). 이렇게 거꾸로 뒤집한 세상에서는 정확한 지식, 진리라는 생각은 와해되기 쉬운 이상이었다. 여기서 역사적 방법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하나는 과거 역사서술을 두고 서로 다른 프로테스탄트 종파와 가톨릭의 비판에서 맞서 싸우는 것이었고, 경험적/역사적 지식을 무용한 것으로 여기며 순수 이성적이고 수학적인 추론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데카르트 식의 회의주의에 맞서는 것이었다.

"17세기 말 역사서술의 가장 장중하고 영향력 있는 작품"인 <역사비평사전>(Dictionaire historique et critique, 1696)을 저술한 피에르 벨(Pierre Bayle)은 과거와 현대 학자들의 오류를 밝히고 더 정교한 방법론을 구축하면 지난한 학술 논쟁을 종식시키고 역사학의 확실성이 추상적인 수학과 형이상학의 확실성보다 더 우월하고 더 확실하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방법론의 우월성을 담보하는 수단이 바로 각주이다. 벨은 단순히 각주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각주를 통해 역사학과 철학을 결합하고자 했다. 각주는 단순히 역사학의 명제를 증명하는 데서 나아가 각주로써 역사학의 명제의 참거짓을 판단하는 규칙을 지정할 수 있었다. 즉, 어떠한 일반 원리를 제시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또한 "역사적 증언의 신뢰성"(de fide historia)을 담보하기 위한 고민은, 더 엄격하게 원자료의 권위를 고증하기 위한 형식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가령 각주는 정확한 인용 형식을 갖추어야 했고, 독자들이 인용된 사료와 원전의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어야 했다. 그래야 독자는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었으며, 그러한 엄격한 형식만이 각주를 비롯하여 역사적 지식의 확실성을 높이는 수단이었다. 역사학적 지식의 획득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형식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논쟁하고, 토론하면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의 작가들은 "사료고증의 근대적 체계 비슷한 어떠헌 것을 산출했다." 그리하여 "18세기를 지나면서 정확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역사적 설명에 차츰 파고들었는데...역사가는 하나의 선명하고 교훈적인 서사의 도덕적 문학적 미덕을 계속 믿옸지만, 사료의 비판적 논의에 대한 더 새로운 열망도 품었다." 즉 역사가들은 역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더해 역사를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근대적 체계 비슷한' 것의 탄생일 것이다. 그리고 각주는 이제 모든 역사가들의 표준적인 작업 절차가 되었다.

18세기 역사서술의 역사에서 단연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명한 작품인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17세기에서 18세기의 역사가들이 성취한 전통의 정점에 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계몽사상가들의 아이러니와 폭넓은 관점과, 라틴어를 사용하며 고대와 중세 세계를 현학적으로 까다롭게 다루는 연구자로서 많은 계몽사상가의 놀림감이 되었던 호고가들의 세밀한 학식을 결합시켰다. 기번은 전통적인 역사서술의 지극히 고전적인 언어를 사용했지만, 황제들의 선정적인 삶은 물론이고 먼지 덮인 사료의 세부사실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앞서 말했듯 기번의 저작은 학식과 철학과 서사를 결합한 작품이다. 그의 학식은 각주를 통해 충분히 볼 수 있다. <쇠망사>에는 '기번의 수다'라고도 불릴 만큼 장황하고 압도적인 숫자의 각주가 달려 있다. 그 각주에서 기번은 고대의 건축물의 정확한 길이를 논하기도 하며, 자신의 앞선 학자들(Hume, Middleton 등)의 견해를 언급하며 그들의 오류가 무엇인지 비판하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은 지난 2세기간의 호고가들의 업적의 결과였다.

그러나 기번의 차이는 호고가처럼 "주석이 없는 논증"이 아니라 "주석이 있는 서사"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쇠망사> 제15장 "그리스도교의 발전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사상, 풍습, 신도 수 및 상황, 각종 의식, 학예, 축전"에서 기번은 초기 그리스도교 성장 요인 중 하나로서 기적의 사용을 논하면서 기적이 특정 시대에만 나타나고 어느 시점부터는 나타나지 않는 점을 논한다. 그 부분에 달린 각주에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는...자신의 기적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오랜 교회사를 통해서 자신이 기적을 행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성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쇠망사> 1권, 민음사)라고 언급한다. 서사가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라면, 기번에게 각주는 이러한 인과관계를 더 단단하게 보강함으로써 서사를 이끄는 장치였다. 이는 전거 목록 제공과 부연 설명 쯤으로 끝나는 현대의 각주와는 다른 양상이다. 이처럼 기번의 <쇠망사>는 18세기 지성사의 역작일뿐 아니라 각주라는 학문적 도구의 역사의 진수가 담겨 있는 역사적인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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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 기후, 질병, 그리고 제국의 종말
카일 하퍼 지음, 부희령 옮김 / 더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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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턴 책을 더 성실하게 만들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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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 산 책

<라틴어 직역 기독교 강요>
<아르미니우스 전집 1>

17세기 사상계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의 책을 구매.
기독교 강요는, 여러 번역본이 있는데 문병호 역본이 현재로서는 가장 나은 선택지일 것 같다. 문장이 딱딱하긴 하지만, 애초에 직역을 해놨음을 명시해놨으니 문제 삼을 건 없다. 내가 이번에 산 건 기독교강요 초판 번역본으로, 같은 역자가 몇 년 전 기독교 강요 최종판을 4권 분량으로 번역한 적이 있다.

최종판은 초판이 나온 이후 이단이나 가톨릭, 자신에 대한 비판에 반박하는 내용을 더 많이 담아서, 핵심 내용상 그렇게 차이 나는 부분은 없다. 그래서 초판을 최종판의 요약이라고 역자는 평가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저작도 한국어로 드디어 나왔다. 이단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런지 한국에서 아르미니우스 저술은커녕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한 책도 찾기 어려운데, 전집 형태로 번역되어서 반가운 기분이다. 게다가 전집도 3권 분량으로 기획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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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mans had reason to dread, that the disjointed members would soon be reduced by a civil war under the dominion of one master; but if the separation was permanent, the division of the provinces must terminate in the dissolution of an empire whose unity had hitherto remained inviolate.

Had the treaty been carried into execution, the sovereign of Europe might soon have been the conqueror of Asia; but Caracalla obtained an easier, though a more guilty, victory.

- 국역본
로마인들은 제국이 나누어진다면 내전이 발생해서 다시 한 사람의 황제 통치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했다. 반면 분리가 영속화된다면 속주들의 분리는 결국 지금까지 침범되지 않고 지켜져 온 제국의 통일성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틀림 없었다.

이 협상안이 실행되었다 해도 유럽의 황제가 곧 아시아의 황제를 정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좀 더 쉬우면서도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승리를 낚아챘다.

- 번역 수정
로마인들은 제국이 나누어진다면 내전이 발생해서 다시 한 주인의 지배로 돌아갈 것으로 생각하며 두려워했다. 반면 분리가 영속화된다면 속주들의 분리는 결국 지금까지 침범되지 않고 지켜져 온 제국의 통일성을 와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틀림 없었다. (154p)

이 협상안이 실행되었다 해도 유럽의 주권자가 곧 아시아의 정복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좀 더 쉬우면서도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승리를 낚아챘다.

세베루스의 사망 이후 그의 두 아들 사이의 권력 투쟁을 서술하는 부분이다.
크게 오역이라 할 것은 아니지만, 좀더 원문에 맞춰서 직역했다.




But as the Roman emperors were still considered as the generals and magistrates of the republic, their wives and mothers, although distinguished by the name of Augusta were never associated to their personal honors; and a female reign would have appeared an inexpiable prodigy in the eyes of those primitive Romans, who married without love, or loved without delicacy and respect. The haughty Agripina aspired, indeed, to share the honors of the empire which she had conferred on her son; but her mad ambition, detested by every citizen who felt for the dignity of Rome, was disappointed by the artful firmness of Seneca and Burrhus.

- 국역본
그러나 로마 황제는 군대의 총지휘관이자 공화국의 최고행정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부인이나 어머니는 황후로서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기는 했지만 직접 국정에 참여한 일은 전혀 없었다. 사랑 없이 결혼했고 사랑하더라도 존경심이나 배려는 결여되어 있었던 그녀들의 통치는 고대 로마인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묘한 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대담했던 아그리파나 황후가 남편을 죽이고 아들을 황제로 만들었을 때, 그녀는 제국을 아들과 공동 통치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위엄을 중요시하는 시민들이 그녀의 야심을 혐오했고, 세네카와 부루스가 교묘하면서도 확고하게 저지했기 때문에 그녀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175p)

- 번역수정
그러나 로마 황제는 군대의 총지휘관이자 공화국의 최고행정관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부인이나 어머니는 황후로서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기는 했지만 직접 국정에 참여한 일은 전혀 없었다. 사랑 없이 결혼했고 사랑하더라도 존경심이나 배려는 결여되어 있었던 그녀들의 통치는 고대 로마인에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묘한 일로 보였을 것이다. 그 대담했던 아그리파나는 자신이 아들에게 수여한 제국의 명예를 아들과 나누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위엄을 중요시하는 시민들이 그녀의 정신 나간 야심을 혐오했고, 세네카와 부루스가 교묘하면서도 확고하게 저지했기 때문에 그녀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어머니인 마마이아의 권력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로마제국에서 권력에 가까웠던 황후들을 논의하고 있다.
원문에 없는데 역자들이 추가한 부분은 삭제하고 일부 표현을 고쳐봤다.



The Prætorian guards were attached to the youth of Alexander. They loved him as a tender pupil, whom they had saved from a tyrant‘s fury, and placed on the Imperial throne. That amiable prince was sensible of the obligation; but as his gratitude was restrained within the limits of reason and justice, they soon were more dissatisfied with the virtues of Alexander, than they had ever been with the vices of Elagabalus.

- 국역본
근위대는 알렉산데르 황제가 어렸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 자신들이 폭군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황제의 자리에 앉혀 준 연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황제를 사랑했던 것이다. 황제는 그들에게 감사의 의무감을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감사는 이성과 정의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근위대는 곧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악행보다도 알렉산데르 황제의 미덕과 선정에 더 큰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 번역수정
근위대는 어린 알렉산데르에게 접근했다. 자신들이 폭군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황제의 자리에 앉혀 준 연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황제를 사랑했다. 이 정감가는 군주는 그들에게 의무감을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감사는 이성과 정의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되었기 때문에, 근위대는 곧 엘라가발루스의 악행보다도 알렉산데르의 덕성에 더 큰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기번은 로마제국의 역사에서 군대로 인한 정치상의 혼란을 반복해서 지적한다. 어쩌면 잉글랜드에서 9년 전쟁 이후 강화된 군 전력에 대한 논쟁의 역사를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단락에서 기번은 알렉산데르가 군대 개혁을 시행하면서 군대와 관계가 악화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국역은 의역이 많이 가해져 직역체로 바꾸었다.



But the favor which implied a distinction was lost in the prodigality of Caracalla, and the reluctant provincials were compelled to assume the vain title, and the real obligations, of Roman citizens. Nor was the rapacious son of Severus contented with such a measure of taxation as had appeared sufficient to his moderate predecessors. Instead of a twentieth, he exacted a tenth of all legacies and inheritances; and during his reign (for the ancient proportion was restored after his death) he crushed alike every part of the empire under the weight of his iron sceptre.

- 국역본
그러나 카라칼라 황제의 방탕과 낭비하에서 시민이라는 우월적 지위가 갖는 혜택들은 차츰 사라졌고, 속주민들은 내키지는 않는데 로마 시민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을 얻는 대신 세금을 충실히 부담하라고 강요받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랐던 세베루스의 탐욕스러운 아들은 온건한 전임 황제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세금의 비율에도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20분의 1이었던 상속세 비율을 10분의 1로 인상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치세 동안 (사망 후에는 다시 20분의 1의 비율로 돌아갔다) 제국의 방방곡곡이 그의 무정한 학정 밑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 번역수정
그러나 카라칼라 황제의 방탕과 낭비하에서 시민이라는 우월적 지위가 갖는 혜택들은 차츰 사라졌고, 속주민들은 내키지는 않는데 로마 시민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을 얻는 대신 세금을 충실히 부담하라고 강요받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랐던 세베루스의 탐욕스러운 아들은 온건한 전임 황제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세금의 비율에도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는 20분의 1이었던 상속세 비율을 10분의 1로 인상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치세 동안 (사망 후에는 다시 20분의 1의 비율로 돌아갔다) 그는 제국의 모든 곳을 강력한 왕권으로 짓밟았다.


*알렉산데르 이후 기번은 로마의 재정과 속주 조세에 대해서 논의한다. 이 부분도 군대와 관련이 있다. 군대를 유지하는 데 막대한 세금이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군대의 힘이 내전으로 인해 증가하자 ˝군대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채워줘야˝ 했기 때문이다(193p).
기번은, 전 속주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한 카라칼라 칙령을 그러한 탐욕의 발로로 해석한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방탕한 생활방식 때문에 그 조세 수입마저 낭비했고, 모든 로마 제국이 그의 학정으로 피해를 보게 되었다.
국역본은 내가 인용한 단락의 마지막 문장을 원문의 뉘앙스와 다르게 옮겼다. 나는 더 직역했는데, iron sceptre는 내가 옮긴 것보다 더 나은 번역어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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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1 "Introductory: the French Prelude to Modern Historiography"

서문: 프랑스에서 나타난 근대 역사서술의 서곡

이 책은 근대적 역사서술(modern historigraphy)의 부상의 한 측면을 밝히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쓰였다. 이 부상의 시작점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다른 것과 역사의 성격을 구분짓는 역사가의 기예(art), 즉 과거 사회의 제도(institution)를 재구성하고 이 제도를 당대 살았던 사람들의 행위, 말, 사상을 해석하는 수단으로서의 맥락으로 사용하는 기예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이 우리가 역사적 방법으로 알고 있는 것의 핵심임은 더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역사 방법과 비교하는 수단에 의해 근대적 역사서술을 고대적 역사서술을 구분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고대 역사가들은 인간사(人間事)에 대한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서사를 구성하는 기예를 발견하여 총명한 기예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당대 사회를 현대 사회에는 낯선 것으로 기술했으며 기후와 전통이 다른 맥락 속에서 인간의 행동과 신념이 얼마나 다양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문명의 과거에 인간의 행동과 사상이 현재 행동과 사상의 성격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어서 오로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 전체가 부활하여 자세히 기술되고 과거를 해석하는 데 사용되어야만 이해될 수 있는 시간의 흔적이 존재했음을 상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가들은 이를 실행할 만한 구분되고 만족스러운 방법이 있다고 단언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이 쓴 역사는 군사적.정치적 사건에 대한 서사로 구성되었거나, 비교 정치적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자체의 법칙을 발견하고 과거가 적절한 탐구 방식을 개발함으로써 이해되어야 하는, 특별한 연구대상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과거를 조사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 자체의 법칙을 발견하고 탐구 방식을 개발하는 것은 서사를 구성하는 오래된 방식보다 우선되는, 근대적 역사서술의 지배적인 성격이다. 역사가들은 사회의 과거 단계에 들어가 연구를 마쳤을 때(그리고 오직 그때에야), 자신의 결론을 서사에 통합하는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그 주제는 인간과 정부의 행위뿐만이 아니라, 결코 변화를 멈추지 않는 사회 구조,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주제의 두 측면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과거를 재구성한다는 개념을 발견한 것은 역사가의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서사를 만드는 기예(narrative art)로 파악된 역사, 그리고 역사서술의 역사가에 대한 일차적 중요성이라는 오래된 주장을 가지고 그들의 관심사를 충족했다.

역사서술의 개척자로서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가들은 과거를 탐험하기 위한 특수한 기법들을 개발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과거는 그들에게 심대한 중요성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파티움 히스토리쿰(spatium historicum)', 과거에 대한 그들의 관점에서 역사적인 것과 신화적인 것의 경계의 문제를 논하지 않겠지만, 현재 주장에서 핵심적인 요점 하나는 지적할 수 있겠다. 즉,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과거에 존재하여 과거의 제도, 과념, 물질(material)과 그 문헌이 살아남아 자신들의 삶의 범위에도 영향을 미치는 조직된 문명을, 중세 유럽인과 근대 유럽인이 과거를 당대와 비슷하게 의식했던 것처럼, 의식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느끼기에는 과거의 세계라면 탐구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들은 증거를 가지지도 않았다. 그들의 역사 감각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탐구하고 외부의 사회와 비교함으로써 전개되었다. 그러나 로마는 우리에게 제시된 과거의 세계라는 감각, 그리고 과거의 세계를 이해하고 오늘날 우리와의 관계를 규정할 필요는 중세 유럽인과 근대 유럽인 모두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과거에 대해 파헤치는 것이 근대 유럽 역사서술의 뚜렷한 특징이라면, 우리는 분명 고대 세계에 빚을 진 유럽의 바로 그 감각의 부상과 기원을 봐야 한다.

우리의 탐구를 시작할 가장 명확한 영역은 고전적 학문 기법에서의 미묘한 변화 - 다시 말해 과거 세계에 대한 접근 방법 -로, 우리가 인문주의(humanism)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동안 상식으로 여겨졌던 사실은, '고전 고대의 부활'(the revival of classical antiquity)과 같은 구호를, 중세 사상이 르네상스 사상만큼이나 고전적 고대에 천착했다는 사실, 그리고 중세와 르네상스의 차이는 단지, 심오하기는 하지만, 고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상에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중세인과 르네상스인은 고대의 가르침과 정전(canon)을 가능한 한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고대를 기준으로 스스로의 형상을 갖추고자 했다. 그러나 중세 시대의 종합과 알레고리화하는 정신이 채택한 방법은 전반적으로 고대의 삶을 당대의 삶 속에 상상을 통해서 혼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헥토르와 알렉산드로스를 기사로, 그리스도가 빌라도 앞에서 받은 재판을 봉건법의 형태에 따라 벌어진 것으로 상상했다. 더 진지하고 실천적 차원의 학문으로 가면, 로마법의 용어는 아무 망설임 없이 중세 유럽의 통치에 적용되었다. 중세인이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얼마나 의식했는지 결정하는 것은 현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일부는 로마는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가 아니라고 느낀 이들이 확실히 있었지만, 과거의 삶이 현재와 어떠한 점에서 다른지를 지적하거나 이를 수행할 체계적 학문을 정초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음은 꽤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이 과거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시작한 결과 이러한 경향은 바뀌었다. 그렇지만 이 변화는 우발적이었고 비간접적이며 역설적이었다.

인문주의 사상은 중세인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고대 세계를 본보기로서 삼아야 할 필요를 주장했으나, 중세의 가르침을 통해 고대를 제시하는 것에는 격렬하게 불만을 표했다. 그들은, 권위 있다고 여겨지는 고대의 텍스트가 해설, 알레고리, 해석이라는 여러 층으로 겹쳐있으며 종종 텍스트가 아니라 해설이 연구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사상은 순수한 텍스트로의 회귀를 요구했으며 - 그러한 외침은 이전부터 제기되었다 - 해설자보다 텍스트를 더 잘 이해해야 함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이 주장은 원천 자료(source-material)를 늘리고 이러한 행위를 더 잘 수행하게 할 수 있는 기법을 향상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역사서술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문주의 운동의 역설과 진정한 중요성을 마주한다. 이러한 주장과 요구를 내놓으면서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세계를 "그것이 실제 그러했던 대로"(as it really was) 고대로의 회귀를 요구했다는 것과는 별반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근대적 역사적 의식의 문턱에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고는 이러한 언어들에 담긴 인문주의자의 계획을 표현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을 완성시키는 역설이란 다음과 같다. 인문주의자는 과거를 따라하고 모방하기 위해 고대 세계를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복원의 과정을 더 철저하고 정확하게 수행할수록 따라하기와 모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면 이러한 행위가 단순히 따라하기와 모방 그 이상이 될 수 없음이 점점 더 명확해졌다. 고대는 고대 세계에 속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삶으로 가져올 수 없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물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며, 그 결과 당대 사회와 단순하게 합쳐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근래의 한 연구는 고전 라틴어의 언어와 문법으로 되돌아가지만 사어(死語)로서의 라틴어를 자각하며 끝나는 인문주의자의 노력을 다시 추적했다. 이제 라틴어는 더 이상 유럽인의 일상적 삶의 한 부분으로서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쓰일 수 없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문제는 점점 더 순전히 역사적 관심, 심지어 호고적(好古的) 관심사가 되었으며, 사라진 세계의 일부는 그 자체를 위해 주의를 기울여 연구하는 이들에게만 중요해졌다. 그러나 저자는 또한 이러한 과정이 라틴어 저자들이 살았던 세계를 기술하는 것을, 때로는 그들 고유의 눈으로 그 세계를 바라보며 그러한 세계의 일부로서 그들의 저술을 해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연구 분과의 성장으로 이어졌음을 증명한다. 다시 말해, 인문주의자는 본래의 목적을 아득히 넘어서면서 그리스 로마의 지혜를 불가피하게 과거의 것으로 전락시켰으며, 종국에는 과거가 현대의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모든 주장에서 그 지혜를 박탈해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인문주의자들은 과거의 문제를 독립된 연구 분야로서 관심을 기울였으며 과거의 탐구를 위한 기법들을 열정적으로 개선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대한 연구가 별도의 과학으로 인식되는 것이 근대적 역사가의 징표라면, 그 토대를 놓은 것은 바로 인문주의자들이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 로마의 문명이 독립된 세계, 즉 과거의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과거가 어떤 면에서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통해 깊게 영향을 받는다는 감각을 유럽인의 정신에서 완전히 박탈하지는 않았으며, 실제로 그럴 수도 없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들의 저작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관계라는 총체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과거가 현재와 관련이 있는가? 과거를 연구할 지점이 있는가? 현재에 생존해 있는 과거의 지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아마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거는 어떻게 현재가 되었는가? 라는 질문일 것이다. 역사적 변화의 문제, 고대 문명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복잡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변화의 문제는 16세기 말 직전 유럽인의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대적 역사서술(modern historiography)의 시작을 기대해야 할 것은 바로 인문주의의 역설(paradox of humanism)이겠다.

인문주의자의 공헌은 유럽 학문연구의 여러 분야에서 역사적 관점과 기본적인 역사적 기법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중요성은 우리의 역사서술의 역사학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명백한 무시에는 여러 원인을 거론할 수 있다. 이 운동은 극단적으로 완만했으며 - 그 효과는 18세기 이전까지는 완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 과거는 도덕적 교훈을 위해 연구되어야 하며 모방하거나 피해야 할 사례들의 창고라고 계속 믿었던, 자신들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했던 학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인문주의의 기본 원리는 종종 지적되었듯이 역사 사상의 발전을 방해했으며, 적어도 선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16세기와 17세기 역사서술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며, 그것이 전부인양 서술하는 실수가 저질러져서는 안 된다. 역사상의 발전은 인문주의가 도덕주의로 휘는 경향이 있음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계속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소홀함은, 이러한 발전이 매우 다양하고 발산적이었다는 사실로부터도 설명될 수 있다. 역사서술의 역사는 - 수학, 물리학, 천문학이 과학혁명의 역사에서 중심 주제를 제공한 것 같이 - 한 두 가지 뚜렷하고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학문이 빠르게 발전하고 다른 학문을 따라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학문의 주변부에서 우연히, 그리고 어쩌면 미약하게 발전하고 각각의 경우에 그 학문분과에 적합한 역사적 기법을 진화시킨 역사적 접근방식의 문제이다. 따라서 역사서술의 서술은 단일한 진화의 연구로 쓰일 수 없으며, 적어도 현재로서 가능한 것은 역사적 관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분야에서 역사관의 성장을 추적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역사서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즉 16세기와 17세기에 발전한 비판적 기법은 문학적 서사의 형태로의 역사 쓰기와 매우 천천히 그리고 매우 늦게서야 결합했다, 한편으로는 학자(scholar)와 골동품 수집가(antiquarians) 사이의 분리(divorce),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문학적 역사가와의 거대한 분리가 있었다, 문학적 형태로서의 역사는 학자들에 의해 발전한 비판적 기법을 고려하지도 않고 그 자체로 유사한 기법을 발전시키지 않고도 일종의 피론주의적(pyrrhonist) 반란,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신뢰할 수 있는지에 관한 널리 확산된 회의주의 운동이 일어나기까지 유유히 독자적인 길을 갔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반란의 성격은 폴 아자르(Paul Hazard)가 연구하였다. 이 반란의 지도자들의 시선은 문학적 서사라는 의미의 역사에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었으며, 마빌론(Mabillion)과 같은 학자들이 빠르게 발전시킨 과거에 관한 믿을 만한 사실을 결정하는 비판적 방법을 배제했다. 이 지도자들이 이러한 학자들에 더 면밀히 관심을 가졌다면, 피론주의적 절망의 강도가 덜했을지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오류를 현대의 역사가들도 저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서술의 역사는 역사라는 제목을 단 문학 작품의 역사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처럼 연구되었으며, 그 결과 일방적인 관점이 생겨나 서사적 역사를 쓰지 않은 학자들의 저작의 중요성에 충분한 중요성을 거의 부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후기의 요한 하위징아(Johan Hauizinga)는 모든 근대 학문의 역사는 중세 대학에 거의 빚진바가 없다고 쓴 적이 있다. 이러한 예외를 제외하면, 하위징아는 근대 학문은 신학, 의학 또는 법학이라는 세 중요 학부 중 하나 또는 삼학(trivium)이나 사과(quadrivium)라는 하위 기예의 하나에서 싹을 틔우는 과정을 통해 발전했다고 말했는데, 역사학이 중세의 커리큘럼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면 수사학의 하위분과이나 비판적 목적이나 방법 없는 단순한 낭독 형식으로서 드러났던 것이며 그 결과 역사학의 비판적 학문으로의 발달은 완전히 대학 외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제 이러한 판단은 우리가 그 이름을 낳는 문학적 형태와 역사를 동일시하기로 할 때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한 집착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 다양한 표준 저작을 통해 잘 알려진 - 다음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즉 최고의 독창성과 복잡성을 지닌 비서사적인 역사학 저작은 16세기 - 이 시대는 대학 조직과 커리큘럼이 여전히 매우 중세적이었다 - 프랑스 대학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상은 법학부에서 발달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사법적 역사학파는 이 장 나머지 부분의 주제를 이루지만,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역사서술의 역사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은, 16세기와 17세기 학자들의 공헌이 서사적 역사와 결합하여 오늘날의 역사학 저술과 상당히 유사한 저술을 생산했다면 그 공헌은 로버트슨(William Robertson)이나 기번(Edward Gibbon) 같은 거인들이 사용했을 어느 정도 검증된 사실의 방대한 축적에 지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초창기의 학자들은 사실을 역사적 맥락으로 되돌려 사실을 해석하는 데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관여했으며, 이미 제시한 바 있듯이 이는 역사적 반성(reflexion)에 대한 복잡한 문제, 즉 과거와 현재의 과거 및 현재에서의 과거의 생존에 관한 문제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 법률가들에게 있어 이 문제는 특별히 더 중요했는데, 그들이 과거의 맥락에 부여하는 자료들은 동시에 현재 사회가 스스로를 통치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6세기 학자들이 우려했던 역사적 문제는 성숙하고, 시급성이라는 점에서 실천적이었으며 심지어 철학적으로 심오할 수 있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그들의 사상은 그 자신과 더불에 그의 세대에 매우 중요했을 수 있으며, 자신의 문명에 대한 역사적 이해에 영구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사상은 역사서술의 역사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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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과 <역사와 역사가들>은 

서양과 중국의 역사관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할 수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각주의 역사>는 위에 번역한 부분을 각주라는 학문적 기법을 통해서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어 지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책이다.


<코젤렉 개념사 사전: 역사>는 '역사'라는 개념이 변화한 역사이니 참고용으로 보면 좋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지나간 미래>도 같이 읽으면, 서양에서 역사인식의 변화를 더 거시적인 역사적 변화와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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