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침번 근무 중에 독서할 때는 한손으로도 들기 쉽고 아무곳이나 펴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적당하다. 그래서 <고백록> <십이야> <이 시대의 사랑> <소크라테스의 변명> 중에 고민하다가 한동안 읽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집었다.

어차피 시간은 충분하기에 역자의 각주까지 꼼꼼히 읽어가는데, 한 단어에 시선이 꽂혔다.

Nomizein

'믿는다'라는 말로 옮겨진 이 단어는 '숭배하다' '인정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며 '관습' '규범' 등을 뜻하는 '노모스'nomos와는 동근어 관계이다. 어원적으로 볼 때 고대 아테나이 사회에서 신을 믿는다(nomizein)는 행위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하나, 우리가 종교를 믿는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주관적 내적 확신과 수양으로서의 믿음이다. 둘째, 제사나 기도 등의 수행을 통해 신을 숭배한다는 것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외적 예배의 수행이다. 즉, 소크라테스 시대 아테나이에서 신을 믿는다는 것이란 내면적 수양과 함께 사회적 관습의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소크라테스 재판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장의 내용을 보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망치고,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음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24c)

같은 고발장이 크세노폰의 <회상>에서는 미묘하게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끌어들임으로 해서 불의를 행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젊은이들을 망침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1.1.1)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보고한 고발장에 따르면, 소크라테스 재판의 주요 쟁점은 소크라테스가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멜레토스 등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의 전통과 사회적 관습을 따르지 않았기에 그를 고발했다. 아테나이 사람이라면 신에게 외적으로라도 경건을 표할 의무가 있건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의 신을 믿지 않는 소크라테스는 위험한 존재이며 사형에 처해야 한다.

사실 이 고발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사회적 관습으로서의 종교 행위는 양립할 수 없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처럼 소크라테스는 사회 속의 자아보다는 내면적 자아의 성찰을 주장했다.<변명>에서는 이것이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나 자신까지도 캐물음으로써 올바름을 추구하는 윤리적 개인을 만드는 것. 이것에 소크라테스가 일생을 바쳐 추구한 목표였다. 반면 사회적 관습으로서 외적으로 수행되는 믿음 행위는 윤리적 성찰이나 내면의 검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면의 경건함만 유지되면, 다시 말해 외적으로 부여된 사회적 의무와 관습만 열심히 수행하면 내면의 문제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의미의 믿음을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을 믿지 않는다는 고발은 (적어도 적들의 입장에서) 타당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고발은 틀렸다. 소크라테스는 분명 신을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가 사형 판결만은 피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다고 믿지 않는 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신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재판의 두 번째 논점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음'에 대해 논의해야만 한다. '믿음'(플라톤)과 '끌어들이다'(크세노폰)의 차이에 대하서는 상세히 논할 수 없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고발장에 쓰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인, 시인, 장인들과 만나며 그들과 논박을 벌였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이 일을 "신의 일" "신에 대한 봉사"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그가 믿는 신은 어떠한 신인가? '새로운'이라는 고발장의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그의 신은 낯선 존재처럼 보인다. 그리스 신화 속 아폴론이나 제우스 같은 신은 아님은 명백해 보인다. 다시 Nomizein으로 되돌아가보자. nomizein의 첫 번째 의미는 주관적 믿음이다. 소크라테스의 믿음은 첫 번째 의미의 믿음과 유사하다. 그 믿음은 단순한 외적 수행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을 믿음으로써 삶의 문제를 반성하고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신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가 개인의 내면의 성찰을 촉구했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 이를 nomizein의 의미와 결합하면 소크라테스가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믿었다는 고발의 내용이 이해된다. 아테나이인의 신과 달리 소크라테스의 신은 내 삶에 의미를 주고 나를 더 나은 자신으로 살기를,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돌보라고 요구하는 신이다. 이는 아테나이인들이 관습적으로 믿던 신앙과는 매우 다른 성질의 신이었다. 제우스는 윤리적으로 살라는 정언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신은 정반대이다. 이를 내면적 확신으로서의 신이라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이 내면의 확신을 따르며 살았다. 그 내면에는 올바름에 대한 확신이 중심을 차지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지 않고 쾌락에만 빠져든 아테나이 및 그들의 종교와 논박을 했다. 곧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소크라테스는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는 아테나이인 전체를 자신의 대화 상대자로 삼고, 그들이 믿는 신이란 얼마나 하찮은지 그리고 그 신에 기대어 사는 아테나이인의 탐욕과 삶이란 것도 얼마나 하찮은지 증명하고자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에 자신을 돌보라고 말하는 새로운 신을 소개했다. 이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라는 그의 명령과 다르지 않다. "묻고 검토하고 논박"(29e)하는 일은 그 명령에 따른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실천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믿는 신을 존중하지 않고 새로운 종류의 신을 믿었다.

이 모순적 말은 이렇게 이해할 때 성립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예 국가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 맹목적으로 자신의 확신만을 따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첫 번째 문제와 관련해서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나이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았고, <크리톤>에서 보여주듯 합법적 절차에 따른 결정을 자의적으로 뒤집지 않았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소크라테스가 최종적으로 주장하고자 한 바는 정치체제, 구체적으로 아테나이의 민주정은 체제의 구성원들이 올바름을 지향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강유원, <소크라테스, 민주주의를 캐묻다> 참조) 이를 제대로 파악하면 두 번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올바름, 덕, 좋음(선한 목적)을 중심이 놓고 사유했기 때문이다.

멜레토스 등 소크라테스의 적들은 그가 들여온 믿음이 아테나이에 유해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체제의 전통을 거부하는 그의 믿음을 위험분자로 분류했다. 그런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반문한다. "가장 훌륭한 양반, 당신은 지혜와 힘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명성이 높은 국가인 아테네 사람이면서, 돈이 당신에게 최대한 많아지게 하는 일은, 그리고 명성과 명예는 돌보면서도 현명함과 진실은, 그리고 영혼이 최대한 훌륭해지게 하는 일은 돌보지도 않는다는 게 수치스럽지 않습니까?"(29e)

영혼을 돌보는 삶.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이 삶을 살았으며, 그런 삶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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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9o8p7h6i5s4t 2022-07-2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8-1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Redman 2022-08-11 17:3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초란공 2022-08-14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민우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의 죄는 주류 세력을 거슬리게 한 ‘괘씸죄‘였던 건가봅니다.

Redman 2022-08-15 15:5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렇죠..괘씸죄.. 그래서 흑백선전으로 소크라테스를 몰아붙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