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평가 -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
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역사가의 통찰은 중요하다. 진정한 역사가의 존재로 그 사회는 집단성을 유지할 수 있다. 과거의 일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나를 파악하고 성찰하는 데 중요하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과거라 하더라도, 그것을 외면하거나 없던 일 취급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폐기가 가장 최악의 것이라면, 그 다음은 고통스럽지 않다거나 그래도 좋았다며 기억 자체를 바꾸는 일일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기억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립한다면, 사회는 역사로써 정체성을 정립한다. 그러므로 과거를 버리거나 과거를 옳지 못하게 기억하는 사회는 집단의 지향점을 놓치고 순간의 이익에 탐닉하는 존재로 전락하거나 자기모순적 인식을 지니며 분열된 채 살아가고 만다. 무엇보다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사회는 같은 잘못만 되풀이할 뿐이다. 이 지점에서 진정한 역사가의 존재가 필요해진다. 진정한 역사가란, 반드시 역사학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에 대한 정확한 기록과 냉철한 비평, 그리고 이를 통해서 오늘과 과거의 기억을 연결하는 자가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역사가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지식인은 일차적으로 역사가여야만 한다.

토니 주트가 이 책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도 "사상의 역할과 지식인의 책임", "망각의 시대에서 최근 역사가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 밝히는 것"이다. 이를 두 단어로 요약하면, '역사와 지식인'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책을 읽는 우리의 입각점도 이것이 될 것이다. 1994년부터 2006년 사이에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엮은 이 책은 2008년이라는, 20세기가 지난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에 출간되었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미 20세기가 망각의 영역으로 들어섰다고 진단한다. "20세기가 지나간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20세기의 다툼과 이념, 이상과 공포는 벌써 그릇된 기억mis-memory의 어두컴컴한 영역으로 슬그머니 사라졌다." 역사를 망각한 이들은 역사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고 득의양양하게 떠들어댄다. 그러나 바로 이전 시대에 대한 망각은 그저 사실에 대한 망각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를 이해하고 반성하는 토대의 상실로 이어진다. "우리는 20세기를 떠나보내며 지나치게 자신만만했고 성찰은 너무 부족했다. 서구의 승리, 역사의 종말, 일극 체제인 미국의 시대, 세계화와 자유시장의 피할 수 없는 전진이라는 아전인수격 절반의 진실에 젖어 대담하게 다음 시대로 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토니 주트는 전쟁의 기억,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 냉전과 미국의 시대, 지식인과 사상의 역할 등 다양한 주제와 논점을 제기하지만,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지식인과 사상의 역할이다. 물론 학문적 대가의 냉철하면서도 정확한 현실인식을 보고 배울 수 있는 3부와 4부도 중요하나, 1부 "어둠의 심장"과 "2부 지적 참여의 정치학"에 더 집중할 것이다. 저자는 '역사가이기도 한 지식인'이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사상가와 저자들을 평론한다. 앞서 말했듯, 지식인은 사태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냉철한 관찰력을 지녀야 한다. 이를 통해 지식인은 사회가 제대로 된 역사적 기억을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

저자가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당파성에 사로잡혀 아전인수격으로 사태를 해석했고, 그로 인해 발생할 피해에는 눈을 감았다. 이중에는 <혁명의 시대> <제국의 시대> <자본의 시대>라는 19세기 서양사 분야에서 괄목할 저서를 남기고, 20세기 통사를 다룬 <극단의 시대> 등 굵직하고 중요한 저사를 남긴 역사학자 홉스봄도 포함된다. 홉스봄은 일생의 대부분을 공산당원으로서 살았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헌신했다. 이러한 타협없는 삶은 개인으로서는 훌륭한 일지만, "홉스봄의 역사적 직관을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홉스봄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공산당의 논평을 떠올리게 하듯 애매한 기조를 유지했으며, 소련, 스탈린, 유럽 좌파들의 과오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했다. "홉스봄은 악을 직시하기를 거부했고 악을 악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했으며, 스탈린과 그가 한 일의 정치적 유산은 물론이고 도덕적 유산도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20세기 역사에서 좌파 안에 존재한 악마적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행적과 대면하기를 회피했다. 그 결과 홉스봄은 시대의 공포와 수피를 외면한 채 역사가의 허물만 쓴 채, "어둠의 심장"과 같았던 20세기를 방관했다. 그는 망각된 시대를 방기한 책임을 지닌 지식인이다.

그리고 '냉전'이라는 주제에 대해 여섯 권의 책을 저술한 존 루이스 개디스는 편파적인 시각으로 미국의 승리주의적 관점에 의한 냉전사를 썼다. 그의 책이 "미국 내에서 냉전의 성격과 냉전이 종결된 방식, 냉전의 미국 안팎에 남긴 끝나지 않은 근심스러운 유산에 관하여 오해와 무지가 널리 퍼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편으로, 한나 아렌트는 "거드름 피우는 고급 독일적 특성", "독일적인 편견" 때문에 20세기 최악의 박해인 홀로코스트와 진정으로 대면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저는 악의 문제에 대한 의미있는 성찰을 담았지만, 이런 아렌트의 독일성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반대로 알베르 카뮈나 에드워드 사이드,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등은 지식인이 해야할 바를 수행했다. 그들은 자신의 인종적 한계나 이데올로기적 당파성에 사로잡혀 비판적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대의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여 이를 증언하였고 사람들이 간과하거나 왜곡되게 인식하는 사상의 역할을 통찰하며.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시대에 부족한 도덕적 권위를 세웠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볼 만한 구절들을 봐보자.

"지침을 잃어버린 지식인의 상태를 꿰뚫는 본질적으로 심리적인 이 직관 덕에, 카뮈의 윤리학은, 한계와 책임의 윤리학은 특유의 권위를 얻게 되었다." (<알베르 카뮈: 가장 훌륭한 프랑스인>)

"코와코프스키가 보기에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계급투쟁에 관한 명제들 때문이 아니고,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붕괴와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이행의 약속 때문도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프로메테우스의 낭만적 환상과 완고한 역사적 유물론의 독특한 혼합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에 작별을? 레셰크 코와코프스키와 마르크스주의의 유산>)

"사이드의 영원한 업적을 꼽으라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의 지도자들을 무능하다고, 단순히 무능하기만 했으면 더 좋았겠다고 호되게 꾸짖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자주 짜증나게 만든 저평가된 카산드라였으며, 비판자들에게는 공포와 질책을 끌어들이는 피뢰침이었다. 믿기 어렵지만, 재기 넘치는 이 교양인은 진정한 악마의 역할을 떠맡았다."(<에드워드 사이드: 뿌리 없는 세계주의자>)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를 담은 이 책은, 망각된 20세기에서 우리가 건져올릴 역사적 유산과 교훈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독서는 반드시 20세기 한국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만 완성된다. 세계사 속에서 한국의 20세기는 어떠하며, 그 시대를 살았던 지식인들은 한국의 현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기술하는가. 과연 한국에 '진정한 역사가이기도 한 지식인'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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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6-1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니 주트는 제가 좋아하는 역사학자인데도, 역사에 대해 저와 생각이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
아주 흔한 말이지만, 저는 카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는 결국 당파성’이란 주장이 더 현실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김민우 2022-06-10 15:58   좋아요 1 | URL
역사가 당파성을 가진다는 것과, 당파성 때문에 잘못된 일에 대해서 제대로 말하지 않는 것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후자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하고, 개디스와 홉스봄 등을 비롯하여 같은 오류를 범하는 지식인들도 당연히 비판받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