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에 이런 일화가 있다. 언젠가 당신께서 한 월간지에 글을 기고하였는데, 한 스님이 그 기고문을 보더니, 자신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것이었다. ‘자신과 생각이 같다니’, ‘잘 통한다느니’ 하며 법정 스님을 극찬했던 그 사람은 바로 다음 달 같은 잡지에 게재된 스님의 글을 보더니, 이번에는 ‘당신이 그렇게 안 받는데’ 운운 하면서 욕을 하더란다. 이에 대한 법정 스님의 반응. ‘내 그럴 줄 알았지. 역시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있었구만.’ 이러한 일화를 얘기하며 스님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란 불가능하며, 이해한다고 말하거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실상은 상대방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텁텁한 결론을 내리셨다. 그가 자신의 방에 붙여 매일 보았다던 법구경의 유명한 구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도 어쩌면 이러한 결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본다.
영화 ‘완벽한 타인’(2018, 감독 이재규)은 법정 스님의 결론을 뒷받침해주듯이 매우 찜찜한 마무리를 보게 된다. 영화의 줄거리와 설정을 봐보자.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3쌍의 부부(석호-예진/태수-수현/준모-세경)와 영배, 이렇게 총 8명이다. 그중에서 영배를 포함하여 남자들은 말 그대로 어렸을 때부터 40년 넘게 우정을 쌓은 죽마고우다. 당연히 서로의 배우자들끼리도 친하다. 40년지기 우정과 배우자. 얼핏 보면 서로가 서로를 전부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영화는 이 8명의 인물이 석호의 집에서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시작한다. 식사 자리 중, 핸드폰으로 오는 모든 연락 내용을 서로에게 공개하자는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문자나 카톡이 오면, 남들이 들을 수 있게 읽고, 전화가 오면 스피커폰으로 전환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각자 자신이 평생 감추고 싶어했던(심지어 배우자와 친구들한테까지) 비밀들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작고 사소한 비밀이, 다음에는 남들이 알면 부끄러운 사실들이, 마지막에는 자신 이외에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될 비밀들이. 하지만, 반전은 하나 더 있었다. 영화는 ‘핸드폰 게임을 하지 않았을 경우’의 결말을 보여준다. 그 결말에는 모두가 좋아 보인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관객은 안다, 그 같은 평온한 관계는 전부 허위이고 거짓임을. 진실한 관계란 있는 것일까.
누구나 아무리 가깝고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말하지 못하는(혹은 말하지 않는) 비밀 한 두 개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고 감추는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기저에는, 비밀이 밝혀져 일어날 인간관계의 붕괴와 사회적 자아의 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등장인물 영배는, 자신이 동성애자란 사실을 밝히자마자 바뀐 자신을 향한 친구들의 시선에 상처를 받고 40년 우정을 잃는다. 아마 그 시선의 의미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쟤는 알고 보니 저런 놈이었구나.” ‘알고 보니’ ‘그런’ 사람이었다...아마 이것이 가장 피하고 싶던 결과 아닐까? 여기 있는 나는 변한 것이 없건만, 몰랐던 사실 하나 더 알게 된 것으로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버린다.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일까 두렵다. 그래서 점점 숨김으로써 전혀 다른 두 자아가 공존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도 바로 이것이다. 타인은 영원히 ‘완벽한 타인’으로만 남는 것일까?
2018년에 방영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이러한 ‘완벽한 타인’의 결말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 드라마는 이지안과 박동훈의 유대감 형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지안은 중학생 시절 자신의 할머니를 폭행하는 빚쟁이를 죽였다. 물론 그 정당방위가 인정되었지만, 그녀는 평생 살인 전과범이라는 낙오를 지니고 살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액수의 사채 빚 때문에 안 해본 일이 없으며 돈 되는 일이라면 도청이나 미행 같은 위험한 작업도 수시로 했을 것이다. 그녀는 타인의 호의에도 비관적으로 나온다(사실 호의다운 호의도 거의 받아본 적이 없다). 이런 지안의 인간관계관을 표현하자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내가 사람 죽인 걸 알아도 잘 대해줄까?’
그런 지안의 인생을 변화하게 만든 인물은, 그녀가 일하는 회사의 부장 박동훈이다. 처음에는 박동훈이 회사 정치에 연루된 것을 알게 되자, 회사 대표 도준연이 박동훈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고 박동훈을 퇴사하게 하는 조건으로 도준연과 거래를 한다. 박동훈과 회사 내 반(反)도준연파의 계획을 알아채고 약점을 잡기 위해 이지안은 박동훈의 핸드폰에 도청 장치까지 설치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듣게 된다. 그러나 박동훈에게 다가갈수록 평생 받은 적 없던 따뜻한 호의와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진정한 어른’ 박동훈에게 마음을 연다. 그것 말고도, 지안이 동훈과 정서적으로 가까워지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박동훈의 핸드폰 도청이 있었다.
드라마 최후반부에서 박동훈은, 이지안이 그동안 몰래 자신을 도청해왔음을 알게 된다. 보통이라면 배신감에 치를 떨고, 그동안 자신이 가장 밝혀지길 원하지 않던 것(아내의 불륜)을 모두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이지안과의 관계를 끊어버려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당장 이지안을 고용했던 도준연도 그녀를 욕하며, 회사의 다른 상무들은 도청 사실을 구실로 이지안과 도준연을 보내버릴 계획을 짰다.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인 박동훈은 이지안을 경멸하지도, 내치지도 않는다. “그 사람을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자기가 안 밉냐는 지안의 질문에 박동훈이 한 말이다.
‘완벽한 타인’과 ‘나의 아저씨’는 얼핏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작품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완전히 상반된다고 말할 수 있다. 전자가, 아무리 가깝고 친밀한 사이더라도 우리는 타자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내면까지 알게 된 순간, 타자는 타자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반면에, 후자는 ‘타자에 대한 사실’을 더 앎으로써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타자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함을 드러내어 준다. 이런 의미에서 법정 스님의 생각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 사랑은 오해나 착각이 아니다. 타자는 ‘완벽한 타인’으로만은 머무르지 않는다. 인격적 교제와 친밀한 관계를 통해 타자는 내 안의 일부가 되고 나도 그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형성되면, 상대방이 ‘알고 보니’ 나를 도청한 스파이였단 ‘사실’조차 그 관계를 뒤집을 수 없게 된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배제와 포용>에서 탕자의 비유를 해설하면서 탕자를 용서하고 끌어안은 아버지의 행동이 “관계가 모든 규칙보다 우선한다는 믿음(260p)”이 전제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믿음이 박동훈의 대사를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볼프는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에겐 유익한 규칙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 규칙을 깨뜨린 사람을 다시 받아들여야 할 ‘의무’도 있다. 이미 ‘안에’ 있는 이들과 더불어 기뻐할 뿐만 아니라 돌아오고 싶어하는 이들과도 더불어 기뻐해야 한다(259p).” 어떠한 도덕이나 윤리 원칙에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깊은 교제를 맺은 이들(안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 유지도 그만큼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