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있는 『영원의 건축』에서 이런 문장을 봤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우리 삶의 전반적 성격은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사건들에 따라 규정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읽기와 쓰기도 마찬가지겠지. 요 일년간 이전의 읽기 습관과 많이 달라졌다. 쓰기는 점점 사라져갔고. 소설이든 아니든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버릇이 희미해졌고 발췌해서 읽는 방식으로 옮겨졌다. 삶의 밀도는 희미해진 느낌이지만, 덕분에 좀체 벗어날 수 없었던 강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올해는 외로움이 잦았다. 결국 ‘다름’의 감각은 사라지거나 옅어지는 것이 아니다. 통하는 사이끼리 잠깐 반짝거리고 마는 것이 세상이고 사람들 사이엔 8차선 정도되는 도로가 항상 가로놓여져 있다. 엊그제 제이제이에서 신나게 춤췄던 순간은 즐거웠지만 그보다는 오늘 찬 술 한잔이 진짜에 가깝다는 느낌. 내내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 이유는 어쩌면 되풀이되는 독서의 밀도가 옅어진 것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유를 원하지만 속박을 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짐작한다. 속박되면 이제 자유조차 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보다 정치적인 사건들이 내게 미친 영향은 적다. 광화문에도 몇 차례 나갔고 매일같이 뉴스를 접하고 동료들과 미친 듯이 험담도 하고 있지만. 브렉시트 때는 손실도 컸고 트럼프 당선도 영향이 알게 모르게 컸지만. 그럼에도 내면에 그것들이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둔감하거나 오만한 말이겠지. 그래. 그럴 것이다.

 

  뉴스가 책을 이기고, SNS가 책을 슬쩍 밀어버리고, 잡념이 책을 덮어버린 한 해였다. 그래도 소설들은 있었다. 전부를 읽은 것도 일부만 읽은 것도 있지만, 멋짐은 부분에서도 드러나기 마련.

 

 

 

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 다른 두 악기가 한 무대에서 연주될 때, 내 막귀는 그 중 하나만을 쫓아가고 만다. 이번에는 이런 나도 끝까지 두 악기가 내는 소리를 모두 한꺼번에 들었고 즐겼다. 이야기의 지평과 언어의 지평이 다름을 확실히 알았다.

 

 

용의자의 야간열차, 다와다 요코
- 왜 멋짐을 알아보는 이가 이리 적은가. 더 많이 인구에 회자되면 좋으련만. 죽인다.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 안토니오 타부키
- 『페레이라가 주장하다』를 읽고, “지금 이 소설을 대한민국에서 읽는다는 것은. 중요하다”라고 썼다. 이 소설도 그렇다.

 

 

불멸, 밀란 쿤데라
- 그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보다 인물들이 매력적이진 않다. 다만 소설 전반의 세련됨은 이 소설이 더 낫다.

 

 

거장과 마르가리타, 미하일 불가코프
- 전혀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난 이 소설을 읽고 ‘마당놀이’가 생각났어. 무슨 판타지가 이렇게나 위트와 유머가 대단한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사뮈엘 베케트
- 퍼커션만으로 연주되는 재즈가 있다면 이와 비슷한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대심문관의 비망록, 안토니오 로부 안투네스
- 삭막하기 그지없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터프함’을 말했을 때, 거기 얼마만한 낭만이 잼처럼 발라져 있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아우구스투스, 존 윌리엄스
- 위대함 이라는 간판 뒤에 보기 흉한 ‘우연’이 얼마나 많이 득실득실대는지. 깐족거리지 않고 위대함을 저열함이나 평범함과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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