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을 읽다가 『재즈』의 도입부를 소개한 대목을 읽고는 관심이 생겨 재즈를 읽기 시작했다. 『빌러비드』의 줄거리는 대충 알고 있어서, 그 소설부터 시작할 순 없었다. 새해 첫 소설은 나름의 미신적인 아우라를 풍기는 데가 있어서, 가급적 쎈 소설은 피하고 싶었다. 괜찮은 선택. 아니, 새해 첫 소설로는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슬픔과 기쁨, 신음소리와 한숨 소리가 재즈 선율처럼, 리듬처럼 휘감아 돌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고는 비극적 종말 밖엔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들은 다른 선택을 했다. 소설 마지막이 낭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다른 많은 결말처럼 너무 쉽게 행복하게 끝난 건 아닐까 하고. 이상하게 이번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흑인 노예 역사, 여성, 가난. 재즈처럼, 필연성이라는 수직의 짓눌린 무게를 즉흥성의 사선(斜線)으로 어긋나게 만든 흑인 여성들. 바이올렛, 도카스, 트루 벨, 앨리스, 펠리스…
필요한 시기에 정확히 도착한 메시지였다.
『빨강의 자서전』은 낯설다. 목차부터. 도입부에 이미 게리온(주인공)은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되어 있는데, ‘빨강의 자서전’이라는 챕터에는 ‘로맨스’라는 부제가 붙어있고, 이 자서전에서는 ‘게리온’은 아직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첫 문장은 이렇다. “스테시코로스는 호메로스 이후 거트루드 스타인 이전, 시인에겐 힘겨운 기간에 세상에 등장했다.” 묘하다. ‘시인에겐 힘겨운 기간’이 모든 시인들이 힘든 시기였다는 것인지 작가 자신(앤 카슨은 시인으로 더 유명)이 스테시코로스의 ‘게리온’이라는 소재를 찾기 전까지 힘겨운 시기를 거쳤다는 건지.. 눈가리개를 하고 낯선 도시에 내려져 어렵게 눈가리개를 푼 사람처럼 독자는 조심스럽게 헤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빨강’의 진실을 가늠할 수 있게 되고 ‘날개’의 실제 여부를 짐작할 수 있게 된 순간이 오면, 마치 나노 단위로 작동하는 정밀한 메커니즘 앞에 선 것 마냥 눈이 땡그래진다. 문제는 형태의 한계 내에서 그걸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거야, 헤라클레스 할머니의 발언처럼 그건 등장인물들만의 문제는 아니고 시인 자신도 언어의 한계 내에서 그걸 어떻게 이용하느냐를 끝없이 실험하고 있고, 독자는 혹 그 실험을 처음엔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서서히 알아채게 되고야 마는데, 알아챘을 때는 이미 그 정교한 형용사의 그물에 휩싸여 아… 아… 소리 밖엔 내지 못하고 멍하니 눈을 꿈뻑꿈뻑.
아마도 번역된 모든 작품들을 살 것이고 읽을 것이다.
안토니오 타부키의 소설은 이번이 세 번째. 아직 다른 책들은 못 읽어봤지만, 확실히 이 소설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는 『페레이라가 주장하다』와 같은 계열이다. 『인도 야상곡』과는 궤를 좀 달리하는. 두 가지, 안토니오 타부키의 사회참여 성격이 짙은 이 두 권의 소설을 읽고 나는 두 가지가 마음에 들었다. 먼저, 주제. 틀림없이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거의 직구에 가까운 변화구. 묵직하게 공 끝이 살아있는. 모호하지 않은 명확한 주제는 독자의 태도를 신중하게 만든다. 하지만 묵직한 것은 또한 지루하기 마련이다. 자칫하면 교훈투성이의, 소설도 아니고 윤리책도 아닌 이상한 것이 되고 말기 일쑤다. 타부키는 그렇지 않다. 등장인물들, 누구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품위를 간직한 채 행동하는 주변인물, 조연들 덕분에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지점에서도 독자가 ‘희망’을 잃지 않게 만든다.
주인공이 든든한 후원자들을 두게 되듯 독자도 든든한 빽을 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