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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광기, 좀 이상하게 미친 사랑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환희’의 이야기. 라동 부인의 말은 이 소설을 간명하게 요약한다. “애도가 대단한 바캉스로 변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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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의 생말로 근처 바닷가 동네를 묘사한 문장들을 읽어나가면 묘하게도 더위를 잊게 된다. 짜증이 날라간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담긴 얼음을 깨뜨려 삼킨 것 같다. ‘퇴적된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소진해 버릴 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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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가 꼭 뜨거울 필요는 없다. 미친 사랑은 뜨거울 것이 틀림없지만, 미친 사랑을 표현하는 법이 꼭 뜨거울 필요는 없다. 파스칼 키냐르의 어휘는 나른한 단어가 없다. 송장 위로 붕붕거리는 파리떼 같진 않다.
어제 『프로듀사』 보면서, 김수현과 아이유의 이불빨래 씬. 신디(아이유)의 파란색 가로줄무늬 치마. 절반쯤 읽은 이 소설의 느낌 가운데 한 가지는 그것과 접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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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에는 한 아이의 숨이 영원히 각인되어 있고, 명단은 피로 물들었다. 소설에서의 목록은 정체성의 표현이며, 명단은 소속감의 상징처럼 보인다. 개인, 가족, 문화권을 아우르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절실한 물음이 나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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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명단. 리스트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읽은 책의 별점 기준을 알라딘 새로 나온 책 리스트에서 얻는 쾌감으로 하기 시작했다. 새 책이 많이 나왔을 때 그 리스트를 쭉 훑어 내릴 때의 좋은 기분을 별점 네 개의 기준으로 삼고, 책을 읽고 그 보다 더한 느낌을 받으면 다섯, 못하면 셋. 리스트는 서사와 비슷하기도 다르기도 하다. 은유보다는 환유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도. 그것이 기능하는 방식의 한 사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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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외국어만은 아닐 것이다. 사투리나 전문용어, 은어도 마찬가지겠지. ‘언어에는 방패가 있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이중적인 의미를 띤다. 비즈니스 모델에 ‘해자’가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그건 이쪽과 저쪽을 구분한다. 그리고 곧 차별이 되고야 만다. 구분이라는 말이 전후 좌우 느낌이라면 차별은 상하(위 아래)의 느낌. 그 상하를 가르는 기준이 핏줄이든 언어든 돈이든 학력이든 외모든 간에, 그런 것들보다는 우리가 만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측심연을 내려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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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하게, 거의 알아채지 못할 만큼. 점멸하는 빛. 아주 높은 곳에서 보지 않더라도, 기껏해야 다 큰 성인의 눈높이에서 보아도 희미하게 점멸하는 빛. 우리는 각자 우리에게 그런 빛이다. 하지만 반딧불이가 그렇듯이 점멸하는 빛들이 격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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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없이, 원한 없이, 저항 없이 존재하기. 니체 철학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또 꼬아서 반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욕망 없이, 원한 없이, 저항 없이 존재하기. 잠자는 존재? 꿈을 꾸는 존재?
‘없이’는 꿈이다. ‘작게’라면 어떨지. 욕망을 작게, 원한을 작게, 저항을 작게 하며 존재하기. 아, 또 뻔한 우리 동시대의 논리로 흐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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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받은 괄호 속에서’ ‘가짜 죄수’는 서성거리다 주저앉고 만다. 점멸하는 다른 빛들을 주시하기, 펌프질 하기. 그러다가 또 풀려버리고 마는, 태엽을 감아야만 하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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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보에 관한 이야기지만, ‘인과’를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인과라는 논리는 어쩔 수 없이 제1원인을 가정할 수 밖에 없다. 보통은 ‘신’으로 수렴되는. 캔터 선생님은 인과의 삶, 책임의 삶을 산다. 그에 반해 화자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비극은 다신교적 문화였던 그리스에서 비롯된 것. 그건 삶의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암시하다. 그렇지만 단순하진 않다. 캔터 선생님과 화자의 태도를 옳다 그르다의 논리에 포함하면 위험하겠지.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다 보면, 인과가 분명한 일보다는 그렇지 않은 일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낀다. 그건 지식의 양과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아무리 많은 지식이 누적되어 온 우주를 다 뒤덮더라도 여전히 ‘인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인과의 문제인가 우연의 문제인가를 우리가 어떻게 판단할지. 언제까지 해보다 중단할지. 개인의 삶은 유한하고 한 번뿐이기에. 하지만, 그렇다. 그런 판단은 인과나 우연만큼이나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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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이 떠오르긴 하는데,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캔터 선생님이 지닌 양심(죄의식)은, 그로 인해 그를 추락시키고 만 그 양심은 사회적으론 필요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너무 성급히 다른 문을 닫아버렸다. 《영원한 이방인》에서 이런 표현을 보았다. ‘기성의 보격을 깨부수는 신중한 단어’. 기성의 보격을 깨부수는 신중한 행동, 언어, 또는 한 수. 그건 정말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기성의 보격’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전의 다른 생각들, 모든 사람들이 가질만한 그냥 보통의 판단은, 깨부수는 게 개인에겐 필요하다. 그건 인과응보를 비극으로 바꿔 부르는 작은 습관으로부터 시작될지도 모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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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최고로 사랑 받던 아이가 전염병(폴리오)으로 죽는다. 그 애가 컸다면 이러저러한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며 아이의 이모가 주절거린다. 이모부가 그런다. “하지만 그게 무슨 도움이 되냐?” 베커먼 씨가 물었다. “저렇게 계속 주절거리는 게?”. 그 부부의 아이가 아빠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움이 돼요. 어머니한테 도움이 돼요.”
각자에겐 각자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 따로 있을지 모른다. 평상시의 습관(리추얼)을 그대로 따르는 것도 하나일 테고, 세상에서 도주하거나, 은신처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일 테다.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걸 하는 것을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