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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 소설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소설 제목은 아무렇게나 짓는 것은 아닐 텐데, ‘산시로’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쓴 이유와 그 시대, 그 지역의 ‘풍속’ 내음이 물씬 풍기는 소설 내용과는 무언가 언발란스 하지 않나.. 그런데, 다 읽고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이점은 오히려 형식적으로 잘 정리된 것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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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이상해지는 지점은, 이런 것이다. 산시로는 초반에 기차/여관 에피소드를 통해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함께 한(육체관계 말고 그야말로 잠만 잔) 여자에게 ‘배짱 없는 남자’로 낙인 찍힌다. 그리고 내내 그런 입장(배짱 없는 남자)을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산시로가 시골에서 도시로, 도시 중의 도시인 도쿄로, 도쿄에서도 앙꼬 가운데 앙꼬랄 수 있는 동경제국대학, 그것도 본과(당시 도쿄대학은 본과, 선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함)의 학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건 뭐. 70~80년대 서울대 법학과 학생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는 메인스트림에 합류한 사람이다. 그리고 남자다. 남자라는 게 무슨 벼슬은 아니지만 벼슬보다 더한 자격일 수 있었던 20세기 초, 동경제국대학 대학생. 그런데 ‘산시로’는 ‘피해자’ 코스프레, ‘약자’ 코스프레를 한다. 이걸 코스프레라고 한 건, 선배들, 여자들(특히 도쿄에서 알게 된 미네코, 요시코)을 대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은 독자에게도 그렇게 어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산시로는 사실상 성장하지 않는다. 처음 연못에서 미네코를 보았을 때, 그녀가 더 높은 위상에 있었던 것이 소설의 끄트머리에서는 같은 위상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성장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산시로가 성장했다 하더라도 그건 깔창을 깐 정도고, 실은 미네코가 높은 하이힐에서 내려왔다고 보는 게 맞다. 다시 말해 미네코의 퇴행이다.

 

미네코는 생생하게 끌리는 인물이다. 제목을 미네코로 바꿨으면 좋을 정도다. 그녀가 그 시대/사회가 여자에게 원했던 것보다 더 우수했을지라도 어쨌든 여자여서 감수할 수 밖에 없었던 입장들이 오히려, 산시로가 촌놈에서 도시인으로, 도쿄대 남자학우들의 그룹에 자연스럽게 편입되는 그 지점보다 훨씬 더 인상 깊다. 그런 미네코가 시대/사회압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어떤 것들. 미네코의 퇴보는 이 소설의 한계다. 아니, 그 시대의 한계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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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서양요리, 시시한 대학강의, 전차에 몸을 던진 여자, 국화인형전, 육상운동회, 전람회 등등의 풍경들. 이런 풍속들은 처음엔 거슬렸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이상하게 기억에 남은 건 이 풍경들과 미네코, 요시코와의 첫 만남 장면뿐이었다.

 

주인공들과 상관없는 듯한 사건들이 갑작스럽게 발생하곤 하는데, 수상한 마음이 들어 확인해보니 역시, 신문 연재 소설이었다. 구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마케팅으로서 ‘풍속’은 도쿄 사는 사람뿐 아니라 일본 전역의 사람들을 끌어 모았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들의 사상/사정과 풍속이 유기적으로 얽혀있다라는 느낌보다는 물위의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인물/사상/사정)보다 기름(시대의 풍속)이 훨씬 생생해서 시대/시절을 만지듯이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이 청춘 소설이라면 그것은 거의 배경/풍속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럼에도 청춘 소설이라고 느끼지 못한 이유는, 산시로가 잃은 ‘사랑’이 산시로에게도, 그리고 독자에게도 그렇게까지 가슴 아프게 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산시로가 얻은 지식/인맥/학맥들이 눈에 더 들어온다. 잃어버린 마음을 아쉬워하는 것은 아흔 아홉 개를 가진 부자가 하나를 더 바라는 것처럼 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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