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에 과거, 현재, 미래를
만난 스크루지처럼 페레이라는, 그리고 독자는 몇 명의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난다. 가르시아 로르카에 대한 정치적인 글을 페레이라에게 내보인 몬테이루 로시와 첫 만남에서 “이 시간에 내가 왜 이런 곳에 왔는지 모르지만, 이미 와 있는 이상
왜 나한테 춤을 청하지 않느냐”던 마르타, 뭔가를 하라던
델가두 부인과 기다리라고, 다른 지배적 자아가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 카르도주 박사, 기자가 모르는 것을 어찌 알겠느냐고 툭 던진 카페 종업원 마누엘까지. 숨을
들이키듯, inspire. 페레이라는 딸각거리는 뼈를, 들끓기
시작한 피를, 일으켜 세우는 맷집을 온몸 가득히 채워나간다. 행동한다.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4장인 <귀향>의 한 대목. 짙은
구름으로 잔뜩 뒤덮인 날, 국경 검문소를 지나 W로 진입하다
들어가게 된 크루멘바흐 예배당. 배를 타고 망망대해 한가운데를 항해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 곳. 나는 이 환각적인 장면에서 아직 읽어보지도 않은 모비딕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장면의 환상성에 깊이 매료됐다. 제발트는 리얼의 리얼을 쫓듯 써나가지만 그 리얼의 끄트머리에 환상을
리얼하게 펼쳐놓는다. 그리고 이 대목의 환상성은 마법에 걸린 사냥꾼 모티프와 엮이면서 기이한 역동성을
획득한다. 제발트가 느낀 현기증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감정의 다발 속에는 실패로 끝난 리비도의 분출이라는
역동적 비틀림도 존재함을.
300여 페이지를 지나, 이런
문장을 보았다. ‘색깔 없는 사각형 사이에서 새빨간 상처처럼 눈에 확 띄는데다 위치도 비대칭이어서-체스로 치면 나이트가 꼭대기에서 한 번 움직인 자리였다-볼 때마다
이상할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이 대목에서 호텔 ‘마법에
걸린 사냥꾼’에서 잠시 말장난을 나눴던 사람이 떠올랐고,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험버트 험버트에게서 처음으로 어떤 멜랑콜리를 느낀 순간, 소설의 1부 후반부가 떠오른 것이다. 나심 탈레브의 『안티프래질』에 바벨(Barbell) 전략이 언급되는데, 이는 중간(평균)은 버리고
양극단적인 선택만 하는 투자전략을 말한다. 투자전략에서는 매우 보수적인 자산과 아주 리스크가 큰 자산을
동시에 선택하는 것인데, 험버트 험버트는 양 쪽 모두 아주 리스크가 큰 선택을 한다. 소설의 형식도 그랬다. 롤리타를 세 등분한다면 처음과 끝은 파토스로
넘쳐나고 가운데는 밋밋하다. 바벨처럼. ‘이상할 정도로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저 지점부터 끝을 향해 고속낙하 할 험버트 험버트를 나는 민감하게 감지했다. 미국 전역을 로드무비 찍듯 여행하는 부분을 밋밋하게 처리할 때부터 분위기는 이미 형성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격자무늬 창살로 이루어진 사각형 중에서 한 칸에만 루비색
유리를 끼워놓은' 것을 이상하게 신경 쓰게 된 시점이 왔고,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나 또한 다이빙대 끝에 선 심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