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여기에서 당신은 계산할 수 없는 무한수를, 매우 방대하지만 어쨌든 계산은 가능한 유한수로 축소할 수 있다. 이런
상대적인 위안은 아주 오래 전에 읽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읽어야 하는 책, 늘 읽는 척했는데 이제 정말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책들이라는 복병에 의해 위태로워지지만 말이다.
옛날옛날 한 옛날에. 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은 실체만 없었을 뿐 내게는
첫 책이었다. 열한 살, 어느 밤. 할머니 댁 앞마당에서 바라 본 광막한 어둠과 무수한 빛의 입자들. 수
억년의 시간과 셀 수 없는 별들의 무리를 보고 듣고 느낀 날. 옛날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이야기와 티브이 속 이야기가 이제 시시해졌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금 내게는 광막한 우주만큼이나 옛날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 좀 막막하다. 시시하다는 말을 썼던 오만은 이제 많이 깎여 귀퉁이가 푸르게
마모됐다.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그 무한수를
어쨌든 유한수로 축소해서, 패턴을 파악해서, 역사로 기억하고
싶은 욕망이 새로 생겼다. 그렇지만 이 욕망은 어딘가 꼭 늙은이가 젊은 처자를 욕망하는 모양을 닮았다, 추하다. 고 말하는 목소리가 아직 내 속에 퍼렇게 살아있다.
포스트모던 이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무언지 모르지만, 어쨌든 유한수로
축소된, 패턴화된, 역사화된 이야기는 추하다. 는 느낌을 갖고 감각에 새롭게 새겨질 만한 것을 만들어보자고 아마 칼비노는 기획했을 것이다. 결과는? 보르헤스만큼 황당하게 하거나, 마르케스처럼 사기 당하는 기분 들지 않게 만드는 작품들. 책 너머에서
붉게 상기된 얼굴로 열의를 갖고 이야기를 실험하는 그가 보인다. 그만의 천진-진지-유쾌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