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을 훑어보았던 수년 전, 『언더 더 스킨』은 인상적인 표지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한국판 표지는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스칼렛 요한슨을 부각시켰지만, 원서 표지의 구불구불한 도로처럼 멋지지도, 함축적이지도 않다.

 

여운이 짙은 소설인데. 이 여운의 상당량은 이라는 모티프 때문이기도 해서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

이설리(주인공)의 차에 탄 사내들 각자가 처한 사정들이 짧게 짧게 드러난다. 직장을 잃고, 아내(또는 연인)와 사이가 틀어지고, 안 하는 일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적은 수입으로 궁핍하게 살면서 내일을 대비할 여유 따윈 없는. 그러면서도 운전석 이설리의 가슴을 흘낏흘낏 훔쳐보는 지구인 남자들의 모습들을 가감 없이 담아낸다. 그러다 곧 조수석 방석을 뚫고 주삿바늘이 찔러오고

 

『언더 더 스킨』은 SF라기 보다 잔혹동화다. 마더구스. 소설 배경이 스코틀랜드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마더구스 동요(동화)를 검색해보니, 얼핏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잔인한 이야기가 많다. 마더구스 자체가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목적이 강했다고 한다. 사회학 소설이라고 칭해야 할 것 같은 이 소설의 분위기와 제대로 매칭된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동화가 만화의 주제를 드러내듯, 『언더 더 스킨』은 현대판 또는 성인판 마더구스라고 불러도 되겠다.

 

 

#

모순. 이항대립이 다른 이항대립과 중첩될 때 나타나는 그 직각의 소음.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의 끈이 끊어지지 않은 이유는 사회 속에서의 ’, 그 모순의 집합이 처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2×2 매트릭스의 X축과 Y축에 (여자/남자), (노동자/자본가), (추함/아름다움), (이주/정주), (유능/무능), (개방/폐쇄), (육식/채식), (수치심/죄의식).. 대입했을 때, 서로 삐걱거리는 조합들에 대한 실태 보고서를 보는 기분이다. Under the skin, 제목 자체가 품고 있는 이중 삼중의 의미들까지.

 

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남자들. 주의 깊게 관찰한 후 그()들을 자신의 작은 차에 태우는 이설리. 이중 삼중의 역할과 입장들을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소설 읽기의 동력은 저절로 채워진다.

 

 

#

매일 차를 끌고 농장에서 나온다. 스코틀랜드를 종단하는 A9 도로를 따라 끝없이 순환한다. 바다,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 구름이 되고 비가 되고 눈이 되는. 자연은 이설리에게 정서적으로 중요하다. ‘도로가 상징하는 것은 반복된 업무, 지치고 힘듦의 연속을 뜻하기도 하지만, 쉼을 주는 자연처럼 그 순환하는 움직임 속에 깃듯 힘을, 생기를, 구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설리를 고용한 대기업, 그 대기업 회장의 아드님(?)이 지구를 방문한 후, 이설리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무엇보다 (수많은 심리 기제들을 일단 젖히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그때 그 시절, 불가역적인 시간을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순환적인 흐름 덕분에 조금은 치유되었던 이설리가 다시 직선적인 시간, 불가역적 시간을 마주치고 흔들린다. 작게, 갈수록 크게.

 

 

#

편혜영의 단편 <동일한 점심>에는 복사실 남자가 등장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의 목록대로 복사실에서 영화를 봤다. <동일한 점심>을 읽기 훨씬 전에 나는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목록대로 소설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즉각 위험하다고, 위험한 신호라고 자각했다. 이런 아이디어는 폐쇄적이고 심지어 퇴폐적인 면이 있는 것 아닌가 하고,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를 꾸짖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한편으로 자연스런 반응이었던 것 같다. 끝도 없고 마디도 없고 풍경도 없는 직선적인 시간에 질려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걸 타파해 보려는 내 나름의 무의식적 시도였던 것이다. 작더라도 뚝 부러뜨린 클로징, 그런 클로징의 순환 누적을 나는 무의식적으로 찾고, 바랐었다. 이설리가 환생을, 순환을, 초탈을 향해 나갈 때, 그때의 내가 떠올랐고 지금의 나를 마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