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셀 아담스가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찍은 사진들이 떠오른다. 한동안 많이 좋아한 사진들이었지만, 풍경보다 인물과 인물들간의 관계가 중요한 이 소설에서 왜 풍경 사진의 대가가 떠올랐는지.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가 우연히 만난 마일스 헬러(주인공 격)와 그의 ‘롤리타’ 필라 산체스. 필라가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 닉 캐러웨이의 포지션을 해석하는 지점에서부터 아마 ‘시점’과 ‘깊이’에 대한 의문이 착 달라붙은 것 같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 직후의 미국에서, 폴 오스터가 전지적 시점을 채택해 소설을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아마 닉 캐러웨이가 더는 작동할 수 없다고 느낀 듯 하다.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는 개츠비를 보고, 그를 통해 당시의 미국을 본다. 거기에는 진한 연민뿐 아니라 쓰디쓴 감정도 녹아있다. 닉 캐러웨이는 당시 미국인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그의 성정 덕에 까칠하게까지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 그의 언어에는 만만치 않은 냉소가 스며있었다. 폴 오스터가 그의 관점을 차용할 수 없었던 이유는 지금의 미국인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전지적 시점’은 독자의 정보에 대한, 상황에 대한 일종의 ‘장악력’을 높여준다. 마치 적의 동태와 현재 아군의 상태가 어떤지에 대한 3차원적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 지휘관처럼 느끼게 해주는 데가 있다. 불법일지라도 ‘점유’하라고 외치는 이 소설의 메시지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다.
안셀 아담스가 활동했던 사진가 그룹 명칭이 ‘F64’였다. 보통의 35mm 카메라 렌즈의 조리개는 F22 정도가 최대치다. 이 정도로도 심도가 깊은 사진을 얻을 수 있지만, 요세미티의 산과 계곡처럼 광대한 피사체를 찍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대형 카메라에 F64 조리개 값을 갖는 렌즈를 사용했다. 이러한 안셀 아담스의 사진들처럼 『선셋파크』는 아주 선명하다. 개별적 인물뿐 아니라 인물과 인물의 관계에도, 물리적 공간과 시간(인물들의 가족사)까지도 선명하게 찍는다. 한마디로 ‘쨍’하다. 이 ‘쨍 함’으로 독자들의 상황 장악력을 북돋고 있다. ‘더 큰 주제’를 다루고 싶다는 작가의 욕망 또한 작동되고 있는 것이겠지.
2.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작동시키는 ‘관계’다. ‘관계’는 들뢰즈 철학을 통해 내가 새삼스레 중요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이제는 막을 내린 《남자의 자격》에서 김국진이 말한 ‘롤러코스터론(論)’처럼, 소설의 주인공들은 불운이 겹치지만, 나름으로 운이 좋다. 아. 얘네들 그래도 그나마 운 좋네. 라고 시니컬하게 반응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역으로 이쪽을 가리킨다. 독자인 ‘너’. 지금 힘들다고 미치겠다고 말하는 ‘너’가 어찌됐든 이만큼이라도 살아가고 있는 건 너의 ‘옆’에서 알게 모르게 도움 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선셋파크의 낡은 집은 ‘임시 점유’라는 점에서 ‘마콘도’와 다르고, 외부의 강제력이 없는 한 꽤 오랫동안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태엽 감는 새』의 대낮에도 별을 볼 수 있을 만큼 깊어 편안함을 느끼지만 단 며칠 생존하기도 어려웠던 ‘우물’과는 다르다. 그런 점에서 마콘도가 가족과 친족을, 우물이 혼자를 상징한다면, 선셋파크는 우정, 연대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3.
재즈(Jazz)라는 어휘에선 무언가 ‘신나는’ 느낌이 돌지만 선셋(Sunset)에서는 ‘끝나버린 축제’가 연상된다. 개츠비의 재즈시대부터 선셋파크까지 겨우 백 년이 걸렸을 뿐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 무엇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