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타르는 바로 서사적 시간의 종언이야말로 “존재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이고, “존재의 증대”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서사적 시간의 종언이 지니는 허무주의적 측면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시간 연속체의 해체로 인해 실존은 극단적으로 취약해진다. 영혼은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에, 끔찍한 허무에 노출된다. 왜냐하면 영혼을 죽음에서 빼내어줄 사건은 어떤 지속성도 없기 때문이다. 사건들 사이의 간격은 죽음의 지대가 된다.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그 중간의 시간에 영혼은 무기력 상태에 빠진다. 존재에 대한 기쁨은 죽음의 공포와 뒤섞인다. 환희의 순간 뒤에는 우울, 존재론적 우울이 따른다. 존재의 깊이는 동시에 존재의 절대적 빈곤이다. 그러한 존재에게는 거주의 공간이 전혀 없다. 그 점에서 료타르는 하이데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료타르가 말하는 존재의 신비는 오직 거기 있음의 신비일 뿐이다. (시간의 향기. 91~92)
이 짧은 책에서, 그는 지난 『피로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철학자의 견해를 재해석하고 반박하기도 지지하기도 하면서 글을 써 나간다. 긴장하는 마음으로 읽다가 ‘글 쓰는 이가 글의 소재로 삼은 다른 저자와 어떤 관계일 때 좋은 글이 나오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부터 독서가 흥미로워졌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인용한 「천사의 시간」 장에서의 료타르, 「행진의 시대에서 난비의 시대로」 장에서의 지그문트 바우만, 「역사의 속도」 장에서 보드리야르의 사상을 소개하고 그 사상의 한계 등을 논하는 글들은 독자인 나에게 뭔가를 던져주고 있었다. 부딪치는 와중에 반짝거리는 것들이 출몰한다. 통찰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의 시선은 이들 철학가와 거의 동일한 높이다.
그에 비해 그가 낮은데 위치해 있어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철학가/작가는 하이데거와 프루스트다. 그런데 이 글들에서 나는 별로 ‘향기’를 맡지 못했다. 알고 있던 것들을 확인해 주는 정도의 글.
마지막으로 한나 아렌트에 대해서는 상당히 단호하다. 그가 이 책에서 스스로 옹호하는 가치(머뭇거림, 느긋함, 기다림, 자제)를 저버리는 듯한 리듬이고 어투다. 책 전체를 볼 때, 한나 아렌트를 카운터 파트너로 삼은 마지막 장 「사색적 삶」은 불협화음에 가까웠다. 얕잡아 보는 뉘앙스가 풍긴다.
너무 올려다보거나(우러러보거나) 내려다보는(얕잡아보는) 상대가 아니라, 비슷한 눈높이에서 약간 올려다볼 정도의 상대를 다루기. 읽기 즐거운 글을 낳는 좋은 방편인 듯. 독서도 마찬가지.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