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와 분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3
윌리엄 포크너 지음,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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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은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 장은 벤지 섹션이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책에는 화자인 벤지는 언어능력이 형성되기 전에 정신연령의 발달이 멈춘 백치다. 포크너는 벤지의 머리에 드나드는 감각을 포착해 그것을 벤지의 언어로 서술한다. 서술의 시간이동이 빈번하다.’라는 해설이 달려있다.

 

90여 페이지의 벤지 섹션을 읽고는 나머지 세 장은 안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진심으로. 너무나 훌륭해서. 첫 장이 이리도 무시무시한데나머지 분량이 이처럼 훌륭하지는 못할 텐데그런 예감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이해하고는 상관없는 문제다.

 

벤지 섹션의 묘사, 대화들을 읽어가다 어느 순간 리듬감이 붙게 되고, 그러다 문득. 언어가 무겁게 걸치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날개를 펴 날아오르는 것 같은 강렬한 인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몽타주 기법으로 편집된 영상처럼. 수천 수만 장의 숏컷들이 마치 신년을 맞이하는 뉴욕 맨해튼에서 날리는 색종이들처럼. 어둡고 화려한 지각적 인상의 단편들을 쏟아내고 있다.

 

나머지 세 섹션에서 언급되기도 하는 사건들과 인상들이, 질서 없이 붙여 놓은 조각보처럼 펼쳐진 이 문장들을 읽고 나는. 내 언어로는 미칠 수 없는 언어의 세계가 펼쳐졌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오르한 파묵의 『고요한 집』을 읽고 레젭에 대해서는 내 입으로 직접 얘기할 수 없다는 취지의 글을 블로그에 포스팅한 적이 있다. 그때의 이유는 윤리적인 것이었다. 『소리와 분노』의 벤지 섹션에 대해서는, 이것은 미학적인 것이고,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내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어떤 말이더라도 덧붙일 수가 없다. 는 식으로 밖엔 더 할 말이 없다. 정말. 무시무시한 한 장().

 

 

2.

두 번째 장은 퀜틴 섹션.

안 읽었으면 어쩔 뻔 했나.

 

시계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또다시 시간 안에 있는 것이다.’로 시작하는 콤슨가 장남 퀜틴의 1인칭 시점의, 의식의 흐름기법으로 쓰여진 섹션. 하버드를 다니는 수재인 만큼 퀜틴의 표현은 풍부하다. 그러나 그의 기질 때문이겠지만, 그의 언어는 상징적이고 낭만적이며 비극적이다.

 

1910 6 2. 이라고 명명된 퀜틴 섹션의 저 날짜는. 퀜틴이 살아있는 마지막 날이다.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확실히, 포크너의 얘기를 굳이 듣지 않아도 캐디. 벤지, 퀜틴, 제이슨의 목소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려지는 캐디는 그럼으로써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데퀜틴은 동생인 캐디를 사랑한다. 그 캐디가, 임신을 한 상태로, 아이의 아버지가 아닌 남자와 결혼을 한다. 제이슨 섹션(3)을 보면 콤슨가 사람들 조차 그 아이의 아비를 퀜틴으로 알고 있다. 퀜틴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 부정하지 않음이 사랑인가? 캐디는 퀜틴을 불쌍한 오빠.라고 부르지.

 

벤지에게 누나 캐디는 무엇보다 나무냄새로 표현되는 사람이다. 퀜틴은 캐디를 인동덩굴로 표현한다. 소설에 설명되지는 않지만 인동덩굴은 수정 전에는 흰색, 수정 후에는 노랑색으로 변한다. 그래서 금은화.라고도 한다. 그것은 어떤 암시를 독자에게 준다.

 

저 낭만적 비극인() 퀜틴의 사랑은 육체에 대한 욕망이고 순정이라는 이상에 대한 맹목이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유형이지만, 지극히 동정할 수 있는 캐릭터다. 그러나, 이 섹션에서도 이런 것들조차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아니지. 중요하다. 어리석음은 이 소설을 일관하는 핵심어니까. 그래도

 

벤지 섹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벤지가 울부짖는 소리일 것이다. 제목을 봐도 주제를 봐도 그렇다. 그 소리들이 퀜틴 섹션 134페이지에서 종소리가 다시 울리며 삼십 분을 알렸다. 나는 내 그림자 복부에 서서, 아직은 작고 얇은 잎들 속에서 햇빛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평온하게 울리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일정하고 평화롭고 잔잔하게 울렸다. 신부의 달인데도 종소리에는 늘 그렇듯 가을색이 역력했다.’라는 문장을 만나자, 고요해졌다.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의 고요. 이 문장 이후 캐디의 남자를 만난 것을 회상하는 대목이 이어지고 교외지역 작은 마을에 들러 속 송어를 보고 여자아이를 만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아.

 

읽기를 잘 했다.

 

저 고요 뒤, 송어를 두고 어리석은 말을 서로 내뱉는 아이 셋과의 우화 같은 만남 뒤, 여자아이를 유괴했다는 누명을 썼다가 풀려난 직후 미칠 듯 웃어대는 대목까지. 소리와 고요와 웃음소리가 연이어지고 비극과 한바탕의 소극이 교차하는 그 대목들은. 정말이지. 윌리엄 포크너. 무섭다.

 

 

3.

퀜틴 섹션을 읽고 또다시 그만둘지 갈등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으니까.

 

역시나 세 번째 제이슨 섹션의 초반은 실망감을 불러 일으켰다. 제이슨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호감형이 아니니까. 누나 캐디의 딸 퀜틴(죽은 삼촌의 이름을 땄다)’과 누나를 가끔 보게 하는 조건으로 누나에게 돈을 받는 파렴치한을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 또 하나의 이유는 제이슨의 어리석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잡지 못하는 송어를 두고 어리석은 말들을 주고 받는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으니까. 누나가 결혼했을 때 매형 되는 사람이 약속한 은행 일자리가 누나의 파경으로 인해 무효화되었을 때 마치 갖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양 세상을 원망하는 태도, 목화시장 투자를 하면서 손해와 이득을 계산하는 방식(흔히 개미 투자자들이 하는 심리적 오류 편향)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뒤룩뒤룩 욕심.

 

하지만 제이슨 섹션의 진가는 후반부였다.

 

한 편의 기막힌 블랙 코미디.

조카 퀜틴이 학교를 빠지고 사내녀석을 만나는 것을 쫓아가는 대목부터, 밤사이 조카가 자기 돈(정확히 말하면 누나가 딸을 위해 제이슨에게 보낸 돈이니 퀜틴의 돈이라고 해야겠지)을 들고 튄 것을 알게 되는 일요일 아침까지의 대목. 은 극적인 통쾌함뿐 아니라 제이슨이라는 인물도 그리 단순하게 평가할 캐릭터가 아니라는 반성까지 불러 일으킨다.

 

 

4.

마지막은 딜지 섹션. 딜지는 깜둥이. 퀜틴, 캐디, 제이슨, 벤지. 이들 백인 아이들의 유모이자 실질적인 엄마. 딜지가 화자는 아니지만 중심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 딜지가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시작과 마지막을 보았다며 눈물 흘리는 장면은, 신비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니 이 소설의 네 장()은 각기 미학적, 심리적, 윤리적, 종교적인 분위기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작이 걸작인 이유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것이다. 허나 이런저런 논리보다 하나의 물적 증거(physical evidence)를 내미는 게 언제나 설득력 있는 법이다.

 

여기. 우리 앞에 하나의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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