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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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이야기를 하려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훨씬 더 멀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내 어린 시절의 맨 처음 몇 해, 아니 그보다 더 멀리 나의 조상들로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마스다 스스무의 『주거해부도감』에는 포치를 현관문을 열기 전에 마음의 여유를 갖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책이 하나의 주택이라면 포치의 역할은 무엇이 맡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보통은 프롤로그가 그 역할 아니겠냐고 할 수 있겠지만, 요즘 책들을 보면 오히려 뒷표지의 추천사나 광고 카피문구가 그 역할을 담당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현관은? 물론 그건 당연히 작가의 첫 문장, 첫 문단일 터. 마스다 스스무는 현관을 마음가짐을 바꾸는 장소. 우리는 외출할 때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면서 무의식 중에 밖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해 새롭게 각오를 다집니다. 반대로 자택이든 방문한 곳이든 신발을 벗게 되면 확실히 마음이 편해집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데미안』의 첫 문단은 그렇다면 독자를 집 안으로 초대하는 것인가 아니면 바깥으로 함께 나가 여행을 하자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처음에 들었다.

 

데미안을 처음 읽는 것이라면 이런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이번에 보다 환하게 보인 문장은 나의 조상들로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였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라는 문장이 첫 문장과 조응을 이루면서 소설이 갖고 있는 기질을 드러내고 있음을 이제 눈치챌 수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은 화자의 어린 시절일 것이다. 화자는 독자인 는 아니다. 화자 자신일 뿐. 따라서 그에게 가는 나의 길은 바깥으로 향한다. 또 저기 조상들로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한다.”는 말. 훨씬 더 멀리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인류 공통의 조상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토콘드리아 이브까지 말이다. 그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인류 공통인 것. ‘내면으로의 길을 말함이다. 그 길은 으로 향한다. 그러니 『데미안』이라는 집으로 들어가는 일은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바깥으로 나오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함께 불을 보고 있던 그가 잉걸불 속에 송진 한 조각을 던져 넣자 작고 날씬한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그 속에서 노란 새매의 머리를 한 그 새를 보았다. 스러져가는 벽난롯불 속에서 황금색으로 빛나는 실들이 그물처럼 엉켜 철자와 그림들이 나타나고, 얼굴, 동물, 식물, 벌레, 뱀들에 대한 기억이 나타났다. (중략) 불을 바라보는 일이 특이하게도 좋은 영향을 미쳐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오늘날 우리들의 집에서 볼 수 있는 불은 가스불인데, 그 불의 불꽃은 지금 우리들의 삶만큼이나 디지털적이다. 곧고 반듯하게. 삼각형으로, 수직으로 가지런히 곧추 서있다. 그 불꽃들 각각을 구분할 수 있는 개성은 없다. 어렸을 적 할머니 댁 아궁이에서 본, 사람을 홀려버릴 듯 타오르던 그 불꽃들. 이 문장을 읽고 심상이 움직이자 나 또한 싱클레어처럼 좋은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향을 미쳐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게 나도 한가지 떠올랐다. 사람들이 꽤 많이 오고 다니는 교차로 귀퉁이의 2층 카페. 그 창가에 앉아 사람들을 마냥 바라 보는 것. 처음에는 미모나 패션 등을 흥미롭게 지켜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도 모르는 새 사람들 얼굴에 드러난 표정만이 눈에 들어온다. 표정만 둥둥 떠다니는 체셔 고양이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도 만드는 그 다양한 표정들의 퍼레이드.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어느새 기운 차린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데미안』에서 불과 새매는 니체니 정신분석학이니 하는 것들과 연관되겠지만.. 단순하게 보면 사람마다 각각 다른 기질을 더 보강하고 기운 차리게 하는 상징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힌트가 된다.

 

 

3.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게.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었다면 스스로 타조가 되려고 해서는 안 돼.”

 

사람이란 나무와 같소. 당신도, 버찌가 열리지 않는대서 무화과나무와 싸우지는 않겠지?” 피스토리우스의 저 문장은 조르바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와 딱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피스토리우스와 조르바의 저 멋지고 명확한 비유가 왜 내게는 갈아야 할 때가 지난 전구처럼 깜빡깜빡 지지직 거리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시대가, 사회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너무 획일화되어 있다. 나의 꿈도 이미 그 획일화의 그물에 잡혀있다.

 

 

4.

각 개인은 소속된 곳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상자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것을 외에 그곳에 동거하는 다른 구성원도 공유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공유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을 겁니다. 그것이 프라이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택이라는 상자 안에 더욱 작은 상자가 필요하게 되고 이윽고 공유하는 상자와 전유하는 상자로 나뉘는 것입니다. (주거해부도감)”

 

한옥에서의 방과 양옥에서의 방이 거실이나 마루와, 부엌과 화장실과, 마당과 창 밖 조망과 갖는 관계는 다르다. 그럼에도 윤곽이 명확하든 그렇지 않든 이 가장 개인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은 비슷해 보인다. 단칸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전유의 공간이 집에는 없었다. 그나마 가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은 책이나 만화, TV 프로그램뿐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아니 톡 까놓고 타협해서

피스토리우스와 조르바가 말했듯 나는 남과 비교하지 않기위해서 을 만들어야 했다. 다만 만 덩그러니 만들어 놓았을 뿐, 출입문이나 창을 내는 방법에 대해서 아직도 초보인 것 같아 답답할 뿐. 『주거해부도감』을 보면 개구부(문이나 창)는 네 가지 목적만을 갖는다. 통행, 조망, 채광, 통풍. 이 네 가지를 어떤 방식으로 내 방에 구현할 수 있을까.

 

현실을 나만의 현실로 직시하자. 공유의 공간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척 살다가 전유의 공간에서 내가 되어 사는 것. 하지만 이 둘이 완전히 분열되면 안 된다. 그건 거의 본능적으로 안 된다고 느낀다. 그 해결의 실마리는 각자의 처지에서 찾아야 하겠지.

 

하지만 『데미안』의 첫 문단이 가리키듯 그 길은 둘이기도 하고 하나이기도 하다. 집과 방을 안과 바깥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지만, 결국 사람이, 빛이, 바람이, 열이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잠깐의 특이점으로 볼 수도 있을 테니깐. 『주거해부도감』에서 집은 나무가 아니라 그물 구조라야 한다.”는 문장을 만났다. 가장 내밀한 을 보호하고 건강하게 하는 일은 집 안의 다른 공간들과 유기적이고 양방향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집 짓기뿐 아니라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야 할 모두에게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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