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는 내 친구가 언제나처럼 반듯하고 올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무언가가 그에게서 나가버린, 내가 전혀 모르는 무언가가 그를 둘러싼 모습이었다. 나는 그가 눈을 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무엇을 바라보지 않았고, 볼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냥 멍하니 자기 속을, 아니면 아주 먼 곳을 향했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입은 목재나 돌로 깎아놓은 듯했다. 얼굴은 창백하여 마치 돌처럼 한결같이 파리한데 갈색 머리카락만이 살아 있는 모습이었다. 두 손은 자기 앞 의자 위에 놓여 있었는데, 돌이나 과일 같은 물건처럼 고요하고 생명이 없이 파리하고 움직임이 없었지만, 힘없이 느슨하게 풀린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강인한 생명을 감싼 단단하고 좋은 껍질 같았다.

 

그 모습에 몸이 떨렸다. 그가 죽었구나! 생각하고 하마터면 큰 소리로 말할 뻔했다. 하지만 그가 죽지 않았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마법에 사로잡힌 듯 그 얼굴, 그 돌 같은 창백한 마스크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저게 데미안이다! 그전의 모습, 나와 함께 걷고 이야기할 때의 그는 절반만 데미안이었다. 이따금 어떤 역할을 하고, 거기 적응하고, 좋은 마음에서 함께하는 절반의 데미안이었다. 진짜 데미안은 지금의 모습, 돌로 된, 태고를 간직한, 짐승과 같은, 돌과 같은, 아름답고 차가운, 죽어 있으면서 동시에 들어본 적 없는 생명으로 은밀히 가득 차 있는 저런 모습이었다. 그를 에워싼 이 고요한 공허. 이런 에테르와 별의 공간, 이 고독한 죽음!

 

(데미안, 헤르만 헤세, 안인희, 문학동네. 80page)

 

 

데미안의 이 문장들을 읽다가 며칠 전에 읽었던 책은 도끼다』의 햇살의 철학, 지중해의 문학편에서 본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한 알의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하리라 폴 세잔. 인용한 문장의 데미안이 있는 자리에 폴 세잔 정물화의 사과를 놓는다면 어떨까?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감추어진 강인한 생명을 감싼 단단하고 좋은 껍질’, ‘돌로 된, 태고를 간직한, 짐승과 같은, 돌과 같은, 아름답고 차가운, 죽어 있으면서 동시에 들어본 적 없는 생명으로 은밀히 가득 차 있는…’ 폴 세잔의 정물화를 보고 번개를 맞은 듯 했던, 내가 느낀 말 못할 감응을 싱클레어가, 헤세가 정확하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바로 직전에 박웅현의 이 책을 읽은 덕분에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해결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던 오랜 수수께끼를 푼 듯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책은 도끼다』 전체에 대한 내 느낌은 묘하다. 프란츠 크로머의 괴롭힘으로부터 구해준 데미안에게 배은망덕할 수 밖에 없었던 싱클레어의 심정이랄까? 여덟 편의 강의는 너무 세세하고 친절해서, 밑까지 다 닦아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레미제라블, 톰 후퍼 감독

 

자베르 경감은 혹 사랑을 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장발장을 꼭 잡으리라 다짐하는 노래에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병적인 사랑.

 

새로운 발견은 에포닌이었다. 내 짧은 레미제라블상식에는 없던 여인. 영화에서 유일하게 감정이입 할 수 있었던 인물. 다른 영화나 소설이었다면 너무 전형적이어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캐릭터지만 레미제라블에서는 달랐다.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사랑 노래 사이사이의 그녀 목소리는하아.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쉴 수 밖에..

 

바리케이트 장면에서 모두가 함께 부른 “Do you hear the people sing?”. 뭔가 뭉클하게 하는 게 있어. 정말 오랜만에 청계천 8가 미치도록 듣고 싶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