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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들뢰즈는 『경험주의와 주체성』에서 이런 말을 했다. “심리학자이기 위해 우리는 심리학자이기 이전에 먼저 모럴리스트나 사회학자나 역사가일 수밖에 없다.” 『생의 이면』의 작가는 심리학자였다. 지나고 보니 그 점이 보다 확실히 느껴진다. 그런데 그때 내가 알았던 심리학자로서의 작가의 모습은 그의 전체 모습 중 일부분에 불과했음이 이 소설로 드러난다. 그는 심리학자이기 이전에 모럴리스트, 사회학자 그리고 역사가다. 이 소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모럴리스트로서의 작가(화자)다. 도입 부분에서 천산 수도원의 벽서에 대해 쓰인 문장. “그 벽서에 의지가 있다면 결코 그렇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지만”, 연희가 사촌동생 ‘후’를 만나길 꺼려하는 대목에서의 “그러니까 그녀의 단호함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 사실을 모르는 편이 나았다.”는 문장 같은 데서 작가(화자)의 모럴리스트적 감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곧 문장들로 형상화되어 소설 전체 분위기를 주도한다.
2.
『생의 이면』과 첫 느낌이 꽤 다르다. 3인칭과 1인칭이 모두 나타났지만 그 소설은 확실히 1인칭의 목소리가 강했던 반면, 이 소설은 3인칭이다. 그래서 읽어나가기가 『생의 이면』보다 낫다. 숨쉬기가 낫다는 얘기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상대와 섹스를 한다고 치자. 『생의 이면』은 줄곧 상대가 위에 있고 나는 아래에 깔린 체위였다면, 『지상의 노래』는 그의 배 위에서 내가 그를 내려다보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별볼일 없는 방 안과 헝클어진 옷가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몰입도는 어떨지 몰라도 뭐랄까. 좀 더 견딜만하다. 물론 이 보기 싫고 보기 꺼려지는 섹스 상대는 또 다른 나다.
3.
주인공 ‘후’는 왜 ‘후’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다른 등장인물들의 평범한 이름에 비해 튀는 이름이어서 궁금해졌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책을 읽는 도중 작품해설을 들춰봤다. 소설에 덧붙여져 있는 해설은 안 읽는 편인데, 왠지 내 의문에 대한 해석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있다. 작품해설을 쓴 이는 후를 who, whoever 등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과는 동기에 의존하지만 그러나 동기는 결과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문장을 읽고서 ‘후’를 後로 읽었다. 後가 있으니 前이 있을 것이고 그 前은 작가 자신 또는 화자(작품해설에서는 이 소설을 교회사 전공 강사 차동연이 쓴 소설로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했는데 그 말대로라면 前은 차동연일 수도 있겠다)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야기를 쓴 사람, 즉 작가 자신을 소설 속으로 밀어 넣은 느낌이 강하다. 자신의 욕망으로, 자신의 의도로 쓴 소설이지만 결과를 제어할 수 없다는 말로 비친다. 작가 말고 주체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또 다른 이가 있다면 당연히 독자일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도식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前(작가 또는 화자의 욕망)-後(주인공 또는 소설 자체)-前(앞의 後로 촉발된 독자의 욕망)-後(또 달리 뻗어나갈 욕망). 무한히 연결되는 욕망의 사슬. 또는 영향력에의 의지. 때가 때인지라 작가의 여러 욕망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독재자와 ‘한정효’와 군인 ‘장’과 수도원 지하에 묻힌 수도사 형제들. 한 세대를 건너 그 독재자의 욕망이 또 다른 사슬이 되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이 묘한 시기.에 그것은 확실히 이승우에게서는 기대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4.
전-후-전-후의 욕망의 고리. 라는 말을 썼지만, 물론 그런 방식으로 꼬여있진 않다. 거기엔 매개물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함께 엮여 있다. 다른 이들은 어떤 식으로 느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첫 문장. “천산 수도원의 벽서는 우연한 경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 벽서에 의지가 있다면 결코 그렇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알려지는 것이 그 벽서의 운명이었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에서 “천산 수도원”이 그 매개물의 역할을 한다고 여겨졌다. 벽서는 말하자면 또 다른 ‘후’다. 매개물은 아닌 것이다. 천산 수도원은 “장소”다. 이 소설에서 장소라고 불릴 만한 것이 꽤 나온다. 천산 수도원, 동네를 삼켜버린 땅, 술집 들국화의 문 잠긴 방, 한정효의 아내가 한정효에게 선물한 성경, 미장원, 길, 천산 수도원의 지하 무덤(카타콤)…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을 암송하여 제 몸에 내재화한 수도사(‘후’도 포함된)들이나 들국화의 그 문 잠긴 방을 제 몸에서 떨쳐낼 수 없는 연희처럼.. 인물들 또한 바로 장소다. 인물들은 장소를 꽉 잡고(take), 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take place. 사건이 일어난다.
5.
지상의 노래. 가 어떤 의미인지는 궁금하지 않다. 나는 다만, 지상의 ‘노래’가 ‘노래’일 수 있다면 그것은 슬픈 것을 슬프게, 기쁜 것을 기쁘게 부르는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기만적인 것은 절대 노래가 아니다.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슬픈 것을 슬프게, 기쁜 것을 기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