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들의 왕. 우습게도 계곡 아래 사람들에게 남자는 그렇게 불렸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도록 내버려두었지만 스스로는 산짐승도둑이란 별명이 자신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는 온 세상의 주인이 언젠가는 거두어갈 것들을 훔치고 있었다. 주인은 모른 척하고 외상값을 계산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하루하루가 그에게는 밀린 빚을 단번에 갚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산양들이 벼랑들 사이를 거침없이 뛰어 건너는 것을, 한 마리씩 줄을 지어 똑같은 발놀림으로 한쪽 벼랑에서 맞은편 벼랑으로 몸을 날려가며 건너는 것을 그는 목격했었다. 그들의 도약은 벌어진 솔기 두 개를 이어붙이는 것과 같다. 그건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 남겨진 하나의 바느질자국이다.

 

 

인간의 두뇌는 되새김질을 한다. 감각이 받아들인 정보를 꼭꼭 곱씹어서 하나의 가능성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의 시간을 예측하고 미리 계획을 세울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의 형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에게 그가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저질렀던 가장 끔찍한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것은 저질러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앞으로도 마음속에 생생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그 기억을 말라비틀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한 남자는 결국 그가 저질러온 일들의 결과에 다름 아니다. 그 일들을 잊는다면 그는 엎어놓은 유리컵에 불과하다. 꽉 막히고 텅 빈 감옥에 불과한 것이다.

 

 

산양 왕은 고개를 치켜들고 허공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넨 뒤 아래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굳은 살이 두툼하게 박힌 발바닥으로 절벽을 딛고 내려오면서 그는 자갈 하나 떨어트리지 않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 발가락 사이의 갈라진 굽이 열리면서 몇 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낙하지점을 움켜쥐었다. 그건 하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르페지오였다. 그가 도달한 지점에서 10미터 떨어진 곳에 사냥꾼이 장총을 옆에 끼고 엎드려 있었다.

 

 

무엇인가에 도움이 되는 유일한 앎은 현재를 아는 것뿐이다.

 

 

그의 어깨 밑에는 산양의 머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비행을 멈추고 나비가 산양의 왼쪽 뿔 위로 날아가 앉았다. 이번에는 나비를 쫓아버릴 수가 없었다. 그건 세월의 무게에 더해진 깃털,

 

 

 

...

시를 추구하는 소설. 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오늘 내가 여기 몇 문장 인용한 이 소설은 말하자면 시로 태어난 소설. 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미 시()여서 시를 추구할 필요가 없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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