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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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던 마침 그때 석양이 지고 있었다. 누렇고 하얀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아래로 내려감에 따라 내 시야에서 태양은 사라져가고, 그때 문득, 읽고 있었던 <<미겔 스트리트>>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모두 성장하고 있거나 떠나는군.’ ‘해트의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지는 태양을 바라보던 나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미겔 스트리트>>는 회고록이다. ‘회고라는 게 무엇인지. 하나는 저녁나절의 생각들이라는 것. 새벽에 깨어나 옛일을 떠올리든 한낮에 그랬든 상관없이 회고는 근본적으로 저녁나절의 생각들이라는 점. 우주가 그렇게 운행됨으로써 나이 들게 되고, 또 그렇게 해서 경험의 퇴적층이 겹겹이 쌓여지게 되어 생겨난 생각-느낌들. 두 번째는 저것, 내가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이동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태양이 자연스럽게 대지 위에 눕기 전에, 내가 먼저 석양을 떠나 보내게 되었다는 것, 그러자 무언가 절박한 감정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것. 그러니 회고는 또 하나, ‘떠남의 생각들이라는 것. ‘떠남의 예감 같은 것. 저 저녁나절의 생각들은 노스텔지어로 물들어 있고, 저 떠남의 생각들은 옛일을 다른 시각으로차분하게(또는 무겁게) 보게 한다는 것. 읽는 내내 이 이중의 감정이 나를 휘감았다.

 

 

글의 시작은 나를 완전 포복절도하게 했던 이 인용문으로 하려 했었다.

 

결국 바쿠는 자기 아내를 구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건 말하기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자 여러분이 바쿠 부인의 생김새를 마음속에 올바로 떠올리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그 축소 모델로 배()를 한 개 생각해야 한다. 바쿠 부인은 하도 살이 쪄서 자기 팔을 옆구리에 붙이면 그 팔이 마치 두 개의 마주 보는 괄호 부호처럼 보였다.

그런데 바쿠 부인이 그 꼴로 싸울 때 지르는 소리란...

해트는 늘 말했다. “축음기 음반을 거꾸로 빨리 돌린다면 저런 소리가 날 거야.”

 

괄호 부호처럼 보였다.’ 라는 말에서 완전히 빵 터졌는데내 글의 첫 문단이 칙칙하다고 해서 이 소설이 칙칙한 내용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삼미 슈퍼스타스의 마지막 팬클럽>>이나 <<허삼관 매혈기>>처럼 처음부터 배꼽 잡게 하지는 않지만, 소설 곳곳. 웃음을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저 인용문에서 보듯 순수하게 마냥 웃음지을 수는 없다. 인용한 이 글은 어디까지나 아내를 구타하는장면이기 때문이다. 이 연작소설에 등장하는 사내들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모두 영락없는 실패자들이다. 한창 인구에 회자되었던 말을 쓰자면 루저들. 바로 이 부분에서 몹시 쓰라렸다. 80년대 시골 소읍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로서는 이 골목의 분위기가 어떤지 대략 감이 왔기 때문이고, 그때 내가 알던 어른들의 모습들이 소설 속 인물들 뒤로 꽤나 많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고, 그때 내가 그 어른들한테 갖고 있던 감정들을 내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자의 심정도 나와 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나와는 다르다. 하나는 나이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마 기질의 차이 때문이겠지. 해트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화자는 자신의 일부가 죽었다고 말했는데, 그때 나이가 열 다섯이었다. 나는 나의 일부가 죽었다라고 느꼈을 때가 아홉 살이었으니까. 6년의 차이. 동심을 유지한 기간의 차이. 아마 나와 화자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보다 더한 결정적 차이는 적도 부근 카리브 해와 한반도의 분위기 차이겠지. 누가 더 긍정모드인지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만 봐도 알 수 있지.

 

 

유쾌하게 보자면, 소설은 트리니다드 섬의 한 빈민가의 모습을 애정을 갖고 회고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 중 이름없는 물건을 만드는 자칭 목수 포포와 생긴 것과 다르게 겁쟁이인 빅풋, 꽃불 전문가 모건, 자칭 기계 천재 바쿠, 미친 사람 맨맨 등은 캐릭터 자체가 코믹 만화에 등장할 법하게 웃기다. 반면, 미국문화에 빠진 해트의 친동생 에드워드나 자기 아내를 몹시도 괴롭히는 토니, 혐오스런 조지 같은 인물들을 보면 다시금, 노스텔지어적 마인드 상태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변하게 되고 이 루저들 곁에살아야 했던 여인들과 아이들의 처지를 떠올리게 된다.

 

 

지금 내가 아주 이중적이다.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를 실제 만난다면 절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해트와 시인 B. 워즈워스만 빼고. 돈도 못 벌면서 애들은 싸질러놓고 허구한 날 아내와 애들을 패기만 하는 사내들. 바람 피고 들어와 그걸 당연시 여기며 도박과 술에 쩔어 사는 위인들. 정신이 약간은 돈 사람들. 한 편의 에피소드로 읽는다면 그냥 지나칠 것들이지만, 그 에피소드에 하나하나의 디테일을 (상상과 경험으로) 곁들이면 어느새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을 만나게 되지. 그 현실에서 나는 이들을 좋아할 수가 없다. 어떠한 권리도 내겐 없지만 용서할 수도 없다.

 

 

허나 나는 화자의 목소리를 따라,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에 태어나 트리니다드라고 불리는 작은 섬과 함께 살아야 했던 이 인물들을 보고 어느새 아련함, 가엾음 같은 것들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몸에서 떨어지는 하얀 각질들 같은.. 어떤 것처럼, 인정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또 어쩔 수 없는 것들. 소설은 정신은 더욱 차갑게, 가슴은 따뜻하게, 얼굴엔 파안대소와 씁쓸한 미소를 동시에 짓게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여기 두 인물의 사소한 행동 같은 것들이 가슴을 울린다. 크리켓 게임의 스코어보드 읽는 법을 화자에게 가르쳐주던 해트의 말 왼쪽에는 타격을 마친 타자의 이름이 나와 있어”… ‘아웃당했어 라는 거친 말이 아니라 타격을 마친타자 라는 멋진(또한 매우 윤리적인) 말을 쓸 줄 알았던 사내 해트와 사랑하던 아내와의 이야기를 짧은 시로 전해줬던, 그러면서도 죽음이 가까이 오자 아직 어렸던 화자에게 그 모든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B. 워즈워스. 진심의 사내. 찐한 뭔가가 목구멍까지 탁 치올리게 만든 두 남자.

 

 

그대로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유재하의 노랫말처럼 모든 옛 일들을 매끈하게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을 보듬어야 할 가슴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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